붉은 손 - 97 (순혈당 - 6)

“유나, 먼저 돌아가 있어.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테니까.”
정우가 사냥꾼과 용병으로서의 자신을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고, ‘까마귀’로서의 자신을 꺼내놓는다.
“몰살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소식이 퍼지잖아. 그냥 목을 그어버리고 끝내자.”
유나가 어딘가 쓸쓸한 듯한, 안타까움이 담긴 시선으로 정우를 바라본다. 정우가 ‘인간성’을 내려놓을 때마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도 함께 도려내진다.
“아니, 지금 끝내지 않으면 쪼개진 조직들이 다시 일어설 거야. 이번 기회에 확실히 공포를 심어줘야 해.”
그러나, 정우는 완강히 거부한다. 피투성이가 된 방과 시신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엔 그 어떤 연민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가축을 바라보는 도축업자의 시선조차 그보다 무감정할 순 없을 것이다.
거기에, 정보 획득을 위한 심문이나 다른 불온 세력을 향한 경고 역시 놓칠 수 없다.
겨우 자비심 같은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다는 명목 따위에 비해선 너무나도 좋은 기회다.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한, 닳을 대로 닳은 인간성이다. 어머니가 죽은, 마을이 불탄 그날 이후로 불타 잿더미가 된 인간성이다.
지킬 인간성 따위, 이미 남지도 않았다.
“하아.. 알았어. 밖에서 보자. 그리고..”
유나가 깊은 한숨을 몰아쉬곤 말을 잇는다. 정우의 고집은 잘 알고 있다. 이미 마음을 결정한 이상, 절대로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 끝이 파멸일지라도 말이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 걸치자. 일도 여럿 끝냈고, 잠시 숨돌릴 시간도 있어야지. 자리 만들어둘 테니까, 시간 비워둬.”
표정과 말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두운 그림자는 여전히 유나의 얼굴을 떠날 줄 모른다.
“..그래.”
숨을 삼키곤 유나의 얼굴을 응시하던 정우의 입에서 무의식적인 대답이 흘러나온다.
아무리 쾌활하고 밝은 그녀라고 한들, 이런 분위기에서 술자리 권유를 할 리가 없다.
무언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물론 그녀가 고의로 해로운 행동을 할 리는 없지만, 어딘가 불안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현이한테는 사업 이야기가 길어졌다고 해둘 테니까, 상처 좀 추스르고 와. 상처 난 거 봤다간 현이가 또 난리 칠 거야.”
유나가 두르고 있던 망토를 거꾸로 뒤집어 입고는, 등을 관통당한 자에게 다가간다. 단검을 휘두를 때 흘린 피로 칠갑 된 옷이 전부 가려졌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다닌다면 피비린내와 혈흔 모두를 숨길 수 있을 정도다.
“끄으으..윽”
아직 살아있던, 등을 관통당한 자의 목을 유나가 조심스레 긋는다.
아무리 전투가 끝나 ‘물러진’ 그녀라 해도, 이곳에 온 목적은 잊지 않는다.
거기에, 죽어가는 자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목적도 있다. 이미 피를 너무나도 많이 흘렸고, 부서진 뼈의 파편이 내장을 찢어버렸다.
살릴 수 없다면 말끔히, 고통 없이 숨통을 끊어줘야만 한다.
“...”
유나가 지하실을 나서고 1시간쯤 흘렀을 때, 프란치셰크가 눈을 떴다.
몸은 앉아있는 의자에 꽁꽁 묶였고, 머리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감자포대가 씌워져 있다.
“일어났나?”
건너편에 앉은 정우가 움직임을 눈치채곤 그에게 말을 건넨다. 분명 1시간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했을 것임에도, 목소리에 미묘한 피로감이 섞여 있다.
“..죽여라. 쓰레기야. 네놈같이 비열한 놈에게 할 말 따위, 저주 말곤 없다. 쓰레기에 어울리는, 더러운 수족아.”
이미 싸움도, 저항도, 순혈당의 존속도 포기했다. 그러나, 정우에게 협력할 마음만큼은 생기지 않았다.
“말이 심한걸. 너희도 숨어서 음모를 잔뜩 획책했지 않나. 별다른 것 없다고 본다만. 설마, 자기들은 당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라도 있었나?”
다른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분노할 만한 저주임에도, 정우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악다구니다. 이미 저런 수준의 저주는 자장가처럼 들린다.
“뭐가 같다는 거냐?! 네놈이 우리와 같은 대의를 품어본 적 있나? 아니면, 소중한 사람을 여럿 잃어보기라도 했나?!”
프란치셰크가 묶인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고래고래 소리친다. 마지막 긍지라도 어떻게든 지켜내려는, 무의미한 노력이다.
“너 같은 머저리들은 하나같이 똑같군. 죽을 때도 헛된 ‘대의’니 뭐니 떠들면서, 자기만 고통을 겪은 척 하는 게.”
“끄아아아악!”
팔걸이에 묶인 프란치셰크의 손에 정우가 단검을 쑤셔 박는다. 흘러나온 피가 아래에 조그만 피 웅덩이를 만든다.
“방금, 지옥에 떨어지라고 했나? 유감이지만 세상은 이미 지옥이야. 극히 일부의, 세상에 관심이 없는 녀석들이나 지나칠 정도로 행복한 녀석들이나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허억..허억..그래서.., 네놈이 나보다 낫다는 거냐!”
“아니, 너보다 내가 강하단 거야. 악마가 다른 악마를 죽였을 뿐이란 거다. 정의네 뭐니 떠들 생각은 없어.”
“끄으으윽! 이 X새끼야! 어서 죽이라고!”
정우가 손등에 박힌 칼날을 다시 회수한다. 손등이 찢어지는 고통에 프란치셰크가 절규하지만, 정우는 눈썹 하나 움찔거리지 않는다.
“죄를 미화하지 마. 어떤 대의명분을 갖다 붙이건, 살인은 살인이야. 폭력은 폭력이고. 너희들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거창한 숙명이니 뭐니 하면서 포장하지 마.”
정우의 마을이 불탈 때, 마을을 지킬 의무가 있는 귀족과 군대는 ‘대의’라는 표어를 걸며 서로를 견제하기 바빴다.
겨우 그런 실체도 없는 것 때문에, 도적들이 활개 치게 내버려 두었다.
불타버린 마을을 회상하는 그의 눈에 다시 한번 증오와 분노가 차오른다. 십수 년 넘게 흐른 지금도, 정우의 마음속 마을은 여전히 불타고 있다.
“뭐, 선문답은 여기까지 하자고. 널 죽이기 전에 뭘 좀 물어보고 싶거든.”
그러나, 정우는 분노와 증오를 잠시 마음 한편으로 밀어둔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직은. 이미 양껏 포식한 ‘학살자’는 고분고분히 한발짝 물러난다.
“이미 죽을 걸 아는데, 내가 왜 말해야 하지?”
“큭큭큭.. 이거, 동료들이 전부 개처럼 뒈졌는데도 자기 혼자 살아나가겠다는 마음이 남은 건가. 인간의 바닥은 언제나 흥미롭단 말이야.”
정우가 피 묻은 단검을 닦으며 입꼬리를 올린다. 강철같은 ‘각오’에 경의를 표하는 그인 만큼, 부러진 각오에는 경멸을 아끼지 않는다.
“그..그냥 죽이란 소리다! 어서!”
“정 그렇게 죽고 싶으면, 혀라도 깨물면 되지 않나. 재갈도 없고, 길어야 3분 정도의 고통만 참으면 된다. 왜 그러지 않지?”
“..!”
정곡을 찔린 프란치셰크가 크게 동요한다. 머릿속으론 죽는 것 외의 선택지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입 역시 머리의 의지를 충실히 따라 죽일 것을 종용한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은 삶에 대한 욕망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이, 걸어보지 못한 다른 길들이, 아직 들어보지 못한 찬사가, 보고 싶었던 세상이 그에게 살라고 속삭인다.
“지금이라도 말할 생각은 없나? 그래야 좀 더 ‘편할’텐데.”
“제발..죽여라. 더 이상 내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적이라 해도 최소한의 자비는 베풀 수 있지 않나. 부탁이다. 스스로 혀를 깨물고 싶지 않아.”
프란치셰크가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간청한다. 경험한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악의 앞에 점점 정신이 무너지고 있다.
“그렇게 서두르지 마. 일단 불편한 포댓자루부터 벗어버리고 생각해보라고.”
정우가 의자에서 일어나 프란치셰크의 뒤로 다가간다. 발소리가 한 번씩 울릴 때마다, 가련한 자의 몸이 움찔거린다.
“그냥 말하고 편히 죽는 게 좋았을 텐데.”
정우의 손이 조금씩 포대를 벗겨내고, 어둠에 익숙해진 프란치셰크의 눈에 빛이 돌아온다.
“으으으아아악! ..이건..이건..!”
그리고, 프란치셰크는 당장이라도 눈을 뽑아버리고 싶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았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연장과 시간이 부족해서 개인적으론 아쉬웠거든.”
정우가 프란치셰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용히 속삭인다.
순혈당원들의 시신 전부가 처참한 상태로 훼손되어 있었다. 살점과 뼈, 피부와 내장 모두 마구잡이로 찢기고 이어져 인간의 형상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혈액과 체액이 뚝뚝 떨어지는 ‘조형물’들이 늘어선 모습은 심약한 사람이라면 그 즉시 미쳐 날뛸 정도의 공포를 선사한다.
“흐으..흐으..흐으윽.”
인생에서 ‘대의’ 다음으로 가장 소중했던 이들의 끔찍한 모습에, 프란치셰크가 고개를 돌리고 소리죽여 운다.
“준비한 정성이 있는데, 눈을 돌려서야 쓰나. 제대로 보라고. 네 동지들의 마지막 모습이잖아.”
정우가 프란치셰크의 턱을 잡아 강제로 처참한 광경을 목도하게 한다.
입이 귀에 걸릴 듯 비웃는 그의 얼굴은 그 어떤 악귀보다도 순수한 악의에 가깝다.
“..끄으으..흐으으으..! 지옥에서도 네놈을 추방할 거다! 네놈 부모도 네놈을 낳아놓은 죄로 지옥에서 고통받을 거야! 아니, 네놈의 가장 첫 조상까지!”
역린인 부모가 건드려졌음에도 정우는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는다. 지금 프란치셰크가 겪는 고통만 해도 충분한 보상이 되고 있다.
“저기서 재밌는 점이 뭔지 알아? 바로..”
“지옥에서 네놈을 기다리겠다! 네 영혼이 티끌 한 점 남지 않을 때까지 이 고통을 돌려주고야 말겠다!”
분노에 이성을 잃은 프란치셰크에겐 어지간한 말은 들리지 않는다.
지나친 슬픔에 이미 터진 실핏줄의 압력이 더욱 강해져, 평범한 눈물이 흐르듯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
“말을 하면 끝까지 들어야지.”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 정우각 멀쩡한 반대편 손등에 단검을 박아넣는다.
“끄아아아악! 이 X발 새끼가!”
“여하튼.., 재밌는 점은 살아있는 사람한테도 저기 있는 것들을 그대로 할 수 있다는 거야. 내 실력이라면 ‘조각’이 끝나고 2분은 살려둘 수 있지.”
“..! 흐으으으아아아! ..제발 살려, 아니, 죽여줘! 제발! 죽여달라고! 뭐든 할게! 제발 죽여줘!”
운명을 직감한 프란치셰크에게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복수심, 증오, 분노, 슬픔 같은 감정이 모조리 증발했다.
남은 것이라곤, 지옥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피하고 싶다는 열망밖에 없다.
피와 눈물이 뒤범벅된 그의 얼굴에선 어떤 ‘인간성’도 보이지 않는다.
“그거야 너 하기에 달렸지. 그럼 ‘대화’를 시작해볼까?”
정우가 단검을 들고 속삭이는 모습에선, 악마를 묘사한 부조의 모습보다도 순수한 악의가 흘러나온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