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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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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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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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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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98 (막간의 이야기)

DUMMY

 “..그래서, 검은 두건을 쓴 사내가 와서 나와 내 일행의 정보를 알려줬다?”


 “그래. 포타첸의 공작 안나의 심복이라는 말에 믿고 들였다. 증표도 보여줬고.”


 프란치셰크가 두려움에 떨면서도 최대한 또박또박 사실을 읊는다. 만약 여기서 실수한다면, 온몸이 산채로 조각나버리게 된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것만은 피하고 싶다. 거기에, 운이 좋다면, 눈앞의 미치광이가 자신에게서 쓸모를 찾을지도 모른다.


 “포타첸의 공작 안나라..”


 포타첸은 근 10년 새 안나의 뛰어난 통치 아래 번영하고 있는 곳이다.


 번영의 과실이 소수의 상위 계층에게만 향한다는 불만이 있긴 하나, 번영은 번영이다. 공작령 전체의 부는 엄청나게 늘었고, 무력은 인근의 공작령을 병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올레스니카와 같은 강대한 세력이더라도 말이다.


 “별다른 말은 더 없었나?”


 “없었다. 네가 공작의 새로운 측근이라고 했고, 곧 피셰에 도착한다고만 했지. 그것만으로 우리가 움직일 이유는 충분했다.”


 프란치셰크가 후회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떨군다.


 만약 그 꼬임에 넘어가지 않고 이 미치광이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적어도 습격자들을 좀 더 유능한 자들로 뽑았더라면 상황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소 긴장을 내려놓은 정우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생산성이 없는 잡생각일 뿐이다.





 “보여준 특징은? 목소리라던가, 얼굴이라던가, 체형 같은 것들.”


 “목소리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짧게 이야기해서. 얼굴도.. 잘 모르겠군. 검은 두건을 깊게 눌러 써서 안쪽을 볼 수가 없었다. 제대로 다듬지 않은 수염만 기억에 남는다. 키는 5피트 5인치 정도였고.”


 “..그게 다인가?”


 정우가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갑다 못해 베여버릴 듯한 시선으로 프란치셰크를 응시한다.


 “잠깐! 담배 냄새가 진하게 났었어! 입에서 제국식 곰방대를 계속 물고 있었다고! 이건 유용한 정보잖나!”


 공포가 프란치셰크의 심장을 움켜쥔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저 눈빛. 저것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확정되지 않은 저 미지의 공포가 정신을 좀먹는다.


 마치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처형자의 칼날처럼.


 “그걸 판단하는 건 나야. 그리고.. 방금 정보는 유용한 것 같군. 이걸로 이야기는 끝인가. 수고했다.”


 정우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 노력을 쏟았음에도, 원래부터 행적을 추적하려 했던 검은 두건의 사내에 대한 의문점만 추가로 붙어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에게선 의문과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고민, ‘작업’으로 쌓인 피로가 느껴진다.





 “나는 어떻게..”


 한발짝 떨어진 죽음이 그에게 미약한 희망을 불어넣었다. 삶을 포기했던 심장에 살고자 하는 욕망이 돌아와, 심장을 옥죄고 있는 공포가 그것을 퍼트린다.


 쩍!


 그러나, 프란치셰크가 한껏 비굴한 얼굴을 하며 내뱉은, 내뱉으려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정우가 들고 있던 도끼가 그대로 그의 머리에 꽂혔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예리한 칼이 두부를 가르듯.


 일격에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급소다. 프란치셰크가 고통을 느낀 시간은 채 2초도 되지 않을 것이다.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언젠가 네 옆에 설 테니.”


 정우가 프란치셰크의 부릅뜬 눈을 조용히 감겨준다. 이미 공포를 선사할 ‘조각’은 열넷이나 있다. 하나 정도는 온전한 시신을 남겨둬도 괜찮다.


 자신이 조금만 덜 악독했다면, 실행력과 ‘각오’가 조금만 부족했다면 이들과 같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복수와 삶, 목표와 현실 사이에 낀 어중간하면서도 ‘인간적인’ 삶을.


 그런 생각이 정우에게 남아있던 ‘인간성’의 파편을 끌어냈다.





 ‘정의에 맞서는 자, 공포와 마주하라. 이 광경을 기억하라. 밤의 그림자마다 내가 숨어있으니. - 한밤의 까마귀.’


 그나마 피가 덜 튄 벽면에 정우가 피로 경고를 적어 내린다. 이런 식으로 흔적을 남기는 건 싫어하지만, 가장 유용한 무기인 공포를 얻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내가 적어놓고도 웃기는군. ‘정의’라니.”


 끔찍한 참상 속에서 정우가 실없는 웃음을 흘린다. 마치, 어처구니없는 광대의 농담을 들은 것 같은 웃음이다.


 처음 복수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그것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믿었다. 피의 값은 오로지 피로만 치를 수 있으니.


 그러나, 복수의 여정을 걸으며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손이 그에게 물었다.


 과연, 너는 도적단에 정의를 집행할 자격이 있는가? 이미 복수 대상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사람을 죽이지 않았나.


 그중에는 무고한 사람도, 극악한 사람도 있었다. 확실한 건, 그들 중 죽어 마땅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자신을 움직이는 동력은 꺼지지 않는 분노일 뿐, 허울 좋은 정의가 아니란 것을.


 정의와 도덕, 통념과 질서가 사라진 자리는 단 두 가지의 기준이 채웠다.


 ‘하고 싶은가?’ 와 ‘필요한가?’ 라는, 원초적인 기준들이 정우를 도시 속의 야수로 만들었다.


 누구보다 이지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세상을 마주하는 자세는 야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자네, 그 소식 들었는가?”


 “순혈당원 놈들이 끔찍하게 죽었다는 거 말인가. 요즘 다 그 이야기뿐이잖나.”


 피셰의 거리에는 잔혹하게 살해당한 순혈당원들의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많은 이가 패악질을 부리던 자들이 사라진 것에 환호했다. 몇몇은 까마귀의 이름을 연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포 역시 그들의 가슴에 깊게 새겨졌다.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끔찍한 시신의 상태는 입을 거치며 더욱 처참해졌고, 마음에 족쇄를 채웠다.


 이전부터 적던 불온한 논의는 거리에서 아예 자취를 감췄다. 선정이라는 당근과 합쳐진 공포는 너무나도 훌륭한 채찍이었다.





 “머리가 아프군. 이 ‘이 검은 두건의 사내’..”


 안락의자에 파묻힌 정우가 얼굴을 찌푸리며 이마를 만진다.


 정우가 머무르는 은신처에는 조촐한 욕조부터, 간단한 수술까지도 가능한 의약품이 비축되어 있어 몸을 추스르기엔 최적인 장소다.


 현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이곳에 머물며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이번에도 그 ‘검은 두건의 사내’다. 올레스니카를 향한 여정의 시작부터 순혈당을 부추겨 공격을 가한 것까지, 모두 그 사내가 연관되어 있다.


 이 자는 과연 누구인가. 황도에서 원한을 산 자? 아니다. 원한을 살만한 자들은 모조리 죽이거나, 내 편으로 만들어 두었다.


 혹 미처 살피지 못한 원한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런 자라면 도적단을 움직이는 건 몰라도 일국의 공작의 징표를 얻을 순 없다.


 경쟁 조직 또한 아니다. 황도의 내 구역을 손에 넣기 위해선 붉은머리부터 제쳐야 한다.


 문답 무용으로 날 죽이려 들기 전에, 적어도 1번은 포섭 제안이 날아와야 한다.


 “그렇다면 남는 건..”


 붉은머리의 수족, 혹은 그 ‘윗선’에서 파견한 누군가다.


 당장 올레스니카와 포타첸, 양 공작령이 엮인 엄청난 건수다. 붉은머리 혼자 이런 곳에서 음모를 꾸밀 리 없다.


 붉은머리의 조직이 아무리 황도 뒷골목을 지배하고 있다고 한들, 대가문들이나 제국 고위 관료의 위세 앞에선 폭풍 앞의 촛불에 불과하다.


 적어도 제국 고위층 중 몇몇이 이 일을 주도하고 있다. 최소한으로 생각해보더라도, 제국 익문사 정도는 이 일을 주도, 내지는 묵인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그들의 눈과 귀는 황도를 넘어, 구대륙 전반에 깔려 있다. 몰랐다는 경우의 수는 말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 익문사가 이번 일과 연관이 있다면, 황제 역시 이번 일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이 먼 곳까지 날 파견해놓고선 어째서 죽이려 하는지 이해가 가진 않지만, 시도가 가능한 후보는 이들 뿐이다.





 “역시 붉은머리인가.. 제기랄.”


 황제나 제국 관료, 대가문 같은 자들이 내게서 가치나 위협을 느낄 리 없다. 그들에게 있어 나는 길가의 돌멩이와도 같은 존재다.


 방해되면 치우고, 던져서 누군가를 맞출 수 있다면 던지는 그런 존재. 그 과정에서 ‘돌’의 안위 따윈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


 그렇다면, 남는 건 붉은머리가 날 제거하고 다른 자를 내 위치에 앉히려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잠시 미뤄두거나, 단념한 걸로 보인다만.


 적어도 지금은 모른 척 그녀의 지시를 이행해야 한다. 돌아가거나 도주하기엔 너무나도 멀리 와버렸다.


 적어도 1번은 기회가 올 것이다. 이 ‘판’에서 수를 놓는 자가 될 기회가. 그때를 기다리며 준비해야 한다.





 “이게 그 편지야? 지은이네가 보냈다던.”


 사흘 후, 상관으로 돌아와 사무를 보던 내게 현이 다가와 편지를 건넨다. 편지의 봉인엔 조직의 도박장 인장이 찍혀 있다.


 “맞아. 저기, 진짜로 우리가 하는 일.. 안전한 거 맞아?”


 현의 불안한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순혈당 건으로 자리를 비운 건 유나의 협력으로 간신히 넘기긴 했지만, 현의 불안감을 완전히 지울 순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위험하게 할 순 없다.


 “괜찮아. 절대로 위험해질 일 없을 거야. 내가 널 위험하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굳어버린 얼굴을 움직여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응. 믿고 있어. 세상 누구보다도.”


 그런 내 모습에, 현이 어딘가 슬픈 듯한 미소를 돌려주곤 방을 나선다.


 다시 한번, 그녀를 슬프게 해버렸다.





 “후.. 일단 당장 해치울 수 있는 일부터 해치우자.”


 한숨을 내쉬고 편지를 열어본다. 편지엔 내가 조사를 지시한 사항에 대한 보고나, 도박장의 운영에 대한 사항들이 적혀 있다.


 항구의 아편 거래 건 이후로 붉은머리가 황도의 밀수업을 꽉 잡고 있다는 건, 붉은머리가 최근 황궁을 출입한다는 건과..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내 머리에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이 덮친다. 내가 황도를 떠나자마자, 나신 역시 황도를 떠났다는 보고다.


 날 불신하는 붉은머리가 나신을 앞세워 황도의 내 조직을 집어삼킬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나신을 시켜 날 추적하고, 상황을 봐서 죽이도록 명령했다.


 ‘검은 두건의 사내’는, 나신이었다. 포타첸 공작의 측근이 되고, 배후에서 암약할 만한 수완과 실력을 갖춘 자는 붉은머리의 수하 중에선 나신뿐이다.


 단순히 나 하나만을 노리고 그런 인재를 서쪽에 파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공작의 측근으로 말이다. 조만간 ‘큰 건’이 일어날 조짐이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군.”


 언젠가 그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직감은 들었지만, 이런 형태일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 조직원들 모두를 소집해야겠어.”


 이 ‘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쓸 수 있는 모든 패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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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붉은 손 - 141 (전초전 1) 24.09.27 18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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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붉은 손 - 137 (벨리치아 학살) 24.09.06 1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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