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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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작품등록일 :
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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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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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2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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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DUMMY

 “나 들어간다.”


 누군가 정우의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 통보에 가까우면서도, 굳이 상대에게 말해주는 미묘한 배려. 유나다.


 “무슨 일이야?”


 쓰고 있던 편지를 잠시 내려놓고, 정우가 유나를 맞이한다.


 “또 꿍한 얼굴 하고 있네. 전에 이야기한 술집, 자리 잡아놨어. 가자.”


 유나가 엄지를 등 뒤의 문을 향해 까딱인다. 그녀의 태도는 방의 분위기완 다르게 태평하기 그지없다.


 정우가 걱정거리를 숨기려 한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채는 데 능숙한 유나다. 이미 정우에게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다는 것쯤은 이미 눈치챘다.


 그러나, 굳이 지적하진 않는다. 모든 걸 자기 혼자 짊어지려고 하는 녀석이다. 물어봐 봤자, ‘일이 생겼어’ 정도 같은 말이나 돌아올 것이다.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줘야만 하는, 귀찮은 녀석이다. 어째서 이런 녀석에게 마음이 끌려버렸는지.





 “그래. 마침 편지도 다 썼겠다, 내려갈 때 여관 주인한테 맡겨두면 되겠어.”


 정우가 붉은 밀랍초를 집어 촛농을 흘리고, 인장 반지를 찍는다. 교차한 권총과 단검 위의 까마귀 문장이 봉투의 입구를 단단히 봉했다.


 “이야, 개인 인장까지 생기고, 이제 사업가 태가 확실하게 나는걸.”


 유나가 묘하게 뺀질거리는 듯한 태도로 입꼬리를 올린다. 정우에게 장난을 칠 때 자주 짓는 표정이다.


 무거운 분위기도 바꿀 겸, 머릿속의 상념도 몰아낼 생각이다.


 “내 천성하곤 거리가 있다만. 어쩔 수 없지. 일이니까.”


 정우가 어깨를 으쓱인다. 적성과 능력과 별개로, 그는 직접 현장을 누비며 생과 사를 나누는 것을 선호한다.


 책상은 그에게 갑갑한 감옥이요, 처리해야만 하는 서류들은 정신을 억압하는 족쇄다.





 “..쳇. 나오기나 하셔. 오늘은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실 테니까.”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심통이 난 유나가 허리에 손을 올린다. 눈앞의 멍청이가 갈수록 살아가는 즐거움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언제나 굳은 표정을 유지하고, 어쩌다 표정이 바뀔 때도 광기와 잔인함이 드러나거나 슬픔만이 느껴진다.


 그것이 너무나 걱정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의 심장에 박힌 가시를 뽑아주고 싶다. 그의 얼굴에 드린 그림자를 걷어버리고 싶다.


 이따금 그가 보여주는 순진하면서도 얼빠진 모습이, 순수한 소년 같은 미소가 좀 더, 좀 더 보고 싶다.





 “주인장! 여기 보드카 큰 걸로 두 잔 주쇼! 안주도 적당히 깔아주고.”


 “아, ‘전쟁매’! 오셨구려. 거기에 ‘까마귀’까지. 당장 대령하겠소.”


 레흐의 그니즈카 성 근처에 위치한 술집은 이상할 정도로 텅 비어있다. 손님이라곤 정우와 유나뿐이고, 직원들 역시 술집의 크기에 비해 숫자가 적다.


 해가 떨어지고도 1시간 넘게 지난 시간이다. 웬만해선 일을 마치고 피로를 풀러 온 사람들로 북적여야 한다.


 “‘전쟁매’라, 어쩌다 붙은 이름이야?”


 자리에 앉은 정우가 가볍게 미소 짓는다. 편안한 사람과 편안한 장소에 있다. 그의 어깨에서 조금이나마 중압감이 사라졌다.


 “너랑 비슷하지 뭐. 내가 훈련하는 병사들이 날 그렇게 부르더니, 이젠 여기 사람들 전부가 그래. 표적을 안 놓치는 게 비슷하다나.”


 말과는 달리 유나가 이명이 마음에 든다는 듯 씩 웃는다. 처음엔 이방인인 그녀였지만, 점점 이곳을 또 하나의 안식처로 여기고 있다.


 황도와는 달리, 사랑들이 살아가는 활기와 내일을 향한 희망이 느껴지는 점이 그녀의 마음을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이런, 까마귀 그쪽도 죄가 많은 사내 같소.”


 상을 차리는 주인장이 넉살 좋은 웃음을 터트린다. 수십 년 씩 사람들을 상대해 온 그인 만큼, 정우와 유나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것 정도는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헛소리할 거면 저리 가서 상이나 닦으쇼. 주인장.”


 “하하! 오늘따라 더 까칠하구려! 전쟁매. 제일 좋은 놈으로 내왔으니, 좋은 시간 되시구려.”





 “자, 마시자. 속이 안 좋다느니, 머리가 아프다느니 하는 말은 안 들을 거야. 그리고, 네가 먼저 취하면 나도 내가 무슨 짓 할지 몰라.”


 유나가 정우의 술잔을 채우며 씩 웃는다.


 “큭큭, 너도 참 한결같다.”


 정우도 따라서 웃는다. 상대를 비웃는 잔혹한 비웃음도, 광기에 젖어 내보이는 광소도 아니다.


 “내가 한결같이 매력적이긴 하지.”


 “뭐래.”


 유나가 그리도 바라마지 않던, 때 묻지 않은 소년 같은 미소다.


 그 미소에 우정 이상의 사랑이 담기지 않은 것에서, 마음 한쪽이 아려온다.


 그래도,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 지금은.





 “그래서, 이렇게까지 자릴 준비한 이유가 뭐야? 굳이 주점을 대절까지 할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잔을 몇잔 정도 나누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정우가 주변을 둘러본다.


 그의 시선엔 의심이나 불안은 담기지 않았다. 눈앞의 조그마하면서도 듬직한 친우가 자신을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다.


 “역시 알아챘구나.”


 술잔을 홀짝이던 유나의 눈이 조금 커졌지만, 금세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눈치채지 못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거야 술집이 비어있으니까. 손님은 우리뿐이고.”


 “딱히 별 뜻은 없어. 그냥 편하게 마시고 싶어서.”


 유나가 입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돌린다. 토라진 듯한 모습이 전쟁매라기 보단 다람쥐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까 고마워하라고! 대절하는 데 금편을 네 닢이나 썼단 말이야!”


 “고마워하고 있어. 진심으로.”


 다시 한번, 정우의 얼굴에 소년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며칠 전 열댓 명의 사람들을 학살한 자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투명하게 빛나는 미소다.


 그의 감사는 한 치의 거짓도 들어있지 않다. 제멋대로인 자신을 계속해서 믿어주고, 언제나 옆에 있어 주었다.


 난생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생겼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망령들의 울부짖음 역시 잠잠해진다.


 등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믿을 수 있고, 설령 날 향해 무기를 겨눈다 해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 아까부터 유나가 술집의 문가와 시계를 자주 바라보는 건 무시하기로 한다. 적어도 해가 되는 자를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먼저들 들어와 있었군. 늦어서 미안하오. 처리할 서류가 많아졌소. 덕분에 여러분과의 만남이 더 기대되긴 했소만.”


 그러나, 그 기대는 얼마 가지 못하고 산산이 깨졌다.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레흐다. 레흐가 왔다. 안락에 젖어있던 뇌가 빠르게 번뜩인다. 아무리 조용한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고 한들, 굳이 밤중의 술집을 대절할 필요는 없다.


 상관으로 임대한 여관을 이용할 수도 있고, 정 조용한 것이 좋다면 개인실이 딸린 술집을 이용해도 된다.


 레흐가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도록, 그의 성 근처의 술집을 일이 끝날 시간에 맞춰 대절한 것이다.





 정우의 마음속에 이는 감정은 분노나 짜증, 배신감이 아니다.


 가장 먼저, ‘왜?’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유나도 자신과 레흐의 사이가 불안하기 짝이 없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본심과 달리, 붉은머리의 지령 때문에 충성을 맹세한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런 레흐를 어째서 이런 곳에 부른단 말인가.


 “..어째서 오신 겁니까. 주군.”


 정우의 입에서 방금과는 다르게 얼음으로 된 칼날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온다. 잠시 머무르던 따스함이 혹한을 맞이한 겨울꽃처럼 시들어버렸다.


 “하루의 피로를 풀러 왔소..라고 하면, 믿어주겠소?”


 그런 정우에게 레흐가 쓴웃음을 흘린다. 이전부터 정우가 자신을 극도로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에 나왔다. 어쩌면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애처롭고 불안하다.


 만약 자신이 공작으로서의 책무보다 복수를 우선했다면 분명 그와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기 때문에.





 “신하는 주군의 말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럼, 부디 편히 쉬시길.”


 무표정한 정우의 얼굴 아래엔, 증오와 경멸이 들끓는다. 이 자의 이 고결한 태도엔 언제나 구역질이 난다.


 당장이라도 그 고결함을 들춰내, 모든 인간이 짐승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


 그러지 않고선, 당장이라도 울부짖고 싶어질 정도의 분노와 슬픔이 밀려올 것 같다.


 그러나, 아직은 그 감정을 드러낼 순 없다.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간신히 수습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지 마! 미리 말 안 한 건 미안해. 그래도, 이런 자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우리 모두를 위해서.”


 당황한 유나가 정우의 손목을 붙잡아보지만, 정우는 매몰차게 그녀의 손을 뿌리친다.


 “그럼 잘못 생각했네. 어떻게 감히 신하와 군주가 함께 술을 마시겠어. 그렇지 않습니까? 주군.”


 레흐가 빈정거리는 듯한 말을 던지곤 문을 향해 나선다. 그에겐 레흐와 마주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내가 군주가 아니면 되는 게로군. 좋소.”


 레흐가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대답한다. 그가 결심을 굳힌 듯 홀로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공작의 자리를 내려놓겠소. 유나, 잠시 이 반지를 맡아주겠소?”


 레흐가 손에서 공작의 인장반지를 빼서 유나에게 건넨다.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말과 행동에 정우의 무표정한 얼굴이 무너졌다. 억눌러왔던 감정이 경악과 뒤섞여 밖으로 드러난다.


 그 얼굴은, 어딘가 지쳐 쓰러진 자가 우는 것과 같아 보인다.


 “나야 괜찮은데.. 이걸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괜찮은 거야?”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받아든 유나가 묻는다. 그녀 역시 예상외의 행동에 크게 충격받았다.


 “내게 있어 공작 위는 헌신의 맹세를 지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소. 오히려 무거운 짐에 가깝지. 아, 그래도 그 반지는 아버님의 유품이니 소중히 보관해주면 좋겠소.”


 레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한다. 그에겐 어떠한 가식도 없다. 진심으로 공작위에 어떠한 미련도 갖고 있지 않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눈과 귀를 의심할 만한 언행이다.





 “카스파의 아들 레흐도, 올레스니카의 공작 레흐도, 서약에 묶인 레흐도 아닌, 귀하와 함께 여정을 걸었던 레흐로서 부탁하오.”


 그리고, 이어지는 레흐의 행동은 더더욱 예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일국의 공작이 그의 신하에게 허리를 숙였다. 초유의 사태에, 유나와 정우를 넘어 술집의 모두가 경악에 찬 시선으로 레흐를 바라본다.


 “부디 나와 마주 봐 주시오. 귀하의 마음을 내게 부딪혀주시오. 귀하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싶소. 귀하의 고통을 나눠질 순 없더라도, 옆에서 지탱해주고 싶소.”


 “..이전부터 당신의 그 마음 씀씀이가 싫었던 거야.”


 정우가 독설을 내뱉으면서도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의 눈은 혼란으로 가득 차, 평소 그가 보여주던 명료함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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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붉은 손 - 119 (르브셰 공성전 3) 24.06.08 2 0 11쪽
119 붉은 손 - 118 (르브셰 공성전 2) 24.06.04 4 0 12쪽
118 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24.06.01 5 0 12쪽
117 붉은 손 - 116 (까마귀 무리) 24.05.30 6 0 11쪽
116 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24.05.28 6 0 12쪽
115 붉은 손 - 114 (승전보) 24.05.25 7 0 12쪽
114 붉은 손 - 113 (최초의 공화국 7) 24.05.22 5 0 11쪽
113 붉은 손 - 112 (최초의 공화국 6) 24.05.18 7 0 11쪽
112 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24.05.14 7 0 11쪽
111 붉은 손 - 110 (최초의 공화국 4) 24.05.11 7 0 11쪽
110 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24.05.04 7 0 11쪽
109 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24.04.30 9 0 12쪽
108 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24.04.26 9 0 11쪽
107 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24.04.24 8 0 11쪽
106 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24.04.20 8 0 11쪽
105 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24.04.19 9 0 11쪽
104 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24.04.16 12 0 11쪽
103 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24.04.10 12 0 11쪽
102 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24.03.31 13 0 11쪽
101 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24.03.28 11 0 11쪽
» 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24.03.22 13 0 11쪽
99 붉은 손 - 98 (막간의 이야기) 24.03.21 10 0 11쪽
98 붉은 손 - 97 (순혈당 - 6) 24.03.17 10 0 11쪽
97 붉은 손 - 96 (순혈당 - 5) 24.03.12 10 0 11쪽
96 붉은 손 - 95 (순혈당 - 4) 24.03.09 11 0 12쪽
95 붉은 손 - 94 (순혈당 - 3) 24.03.05 11 0 12쪽
94 붉은 손 - 93 (순혈당 - 2) 24.02.27 10 0 11쪽
93 붉은 손 - 92 (순혈당 - 1) 24.02.21 11 0 12쪽
92 붉은 손 - 91 ('흑의백' 나탈리아 - 6) 24.02.16 1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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