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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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작품등록일 :
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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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8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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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DUMMY

 “대화에 응해주어 고맙소. 진심으로. 다시 한번 귀하와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할 수 있어 기쁘오.”


 정우의 악담에도 레흐가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행동과 악담보다는, 드디어 상대가 대화에 나서주었다는 사실만이 그에겐 중요하다.


 무슨 일이건 첫발, 첫 궤가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그동안 갈등을 겪었던 모든 이들과도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으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분명, 정우와도 그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어둠 속에서 건져 내야만, 스스로가 타락하지 않으리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내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진 않을 거거든. 당신이 그 반지를 다시 손에 낄 때까진.”


 정우가 유나의 손에 소중히 감싸여있는 반지에 눈길을 던진다. 그의 눈동자에 증오와 경멸이 들끓는다.


 저런 반지를 끼고 있던 자들이 백성들을 조금이나마 소중히 여겼다면, 하다못해 조금만 더 의무에 충실했다면 마을이 모조리 불타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뭐, 그때도 마냥 좋진 않겠다만. 적어도 예의 정도는 갖추겠지. 일단 ‘올레스니카의 공작’에게 충성을 맹세한 몸이니.”


 정우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다. 의도한 바는 아니나, 기회가 온 이상 끝까지 조롱하겠단 생각으로 가득하다.


 어떻게든 저 가식 너머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겠다는 충동이 끊임없이 정우의 머리를 잠식한다.





 “아니, 지금이 훨씬 마음에 드오. 사막에서 함께 모닥불을 쬐며 이야기하던 때가 떠오르는군. 귀하가 내가 끓인 보르시가 맛있다 해주던 게 기억나오.”


 레흐의 말에는 티끌 한 점의 거짓도 없다. 비록 그때보다 가시가 돋친 말이 무례한 어투로 날아온다 해도, 권위와 직책에 묶여 마주 보지 못할 때보단 훨씬 낫다.


 “참으로 즐거운 한때였소. 잠시나마 공작으로서의 책무를 내려놓아 느낀 해방감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었소. 자유의 바람은 다디달았소.”


 레흐가 머나먼 추억을 돌아보는 듯 미소 짓는다. 비록 몇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지만, 그간의 과중한 업무는 그 시간이 한껏 늘어난 엿가락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러나, 기억이 멀게 느껴진다 해서 행복감이 느껴지는 사실이 변하진 않는다.


 “낮에는 마차를 모래언덕 너머로 몰고, 밤에는 야영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었소.”


 정우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천성 자체는 방랑자나 전사, 유목민에 가깝다.


 정우에게 책상과 서류가 감옥이자 족쇄이듯, 레흐 역시 자유로운 삶을 갈망한다.


 원한다면 누구보다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람임에도, 의무와 서약이 그를 얽어맨다.





 “달리는 것이 초원이었고, 직접 말을 몰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오. 하하, 모든 것이 완벽할 순 없지 않겠소.”


 레흐가 실없는 농담을 던진다. 분위기가 지나칠 정도로 무거울 때,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공작령의 많은 이들이 그를 친근히 여기고, 미소를 지켜주려 한다.


 “나랑은 다르군. 난 역참에서 당신을 만난 날이 극도로 후회되는데.”


 그러나 정우는 그런 사람들관 다르다. 이미 증오와 질투로 가득 찬 그의 마음에는 연민과 웃음이 들어갈 자리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당신이 그리도 잘난 척하는 걸 적당히 넘길 수도 있었을 테니까. 별 관심도 없는 ‘옛날 이야기’ 같은 것도 안 들었어도 됐을 테고.”


 점점 말의 강도가 강해진다. 자신이 겪어본 만큼,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가장 아픈 곳을 찌른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아채 땅에 내팽개치고 싶어지도록.


 “...”


 레흐의 표정이 굳는다. 겉으론 이겨낸 체하지만, 아직 그날의 고통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했다.


 찔린 상처 위로 흉터가 생겼으나, 그 밑의 상처는 여전히 벌어져 있다.





 “야! 말이 너무 심하잖아!”


 유나가 들고 있던 잔을 탁자에 내리치며 정우를 쏘아붙이려 한다.


 뒷골목 출신인 자들이 그렇듯, 유나 역시 좋은 형편에서 자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7살 무렵에 병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10살 무렵에 어떤 아저씨와 눈이 맞아 그녀를 버려두고 집을 나갔다.


 오히려 그렇기에, 가족에 관해서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걸 쉽게 넘기지 못한다.


 정우와 시작점은 같으나,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괜찮소, 유나. 어찌 됐건 내 이야기를 들어준 것 아니오. 덕분에 옛 상처를 나눠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았소. 그러면 된 거요.”


 그런 유나를 레흐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만류한다.


 “그리고, 그분들은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소. 삶의 증거인 이 땅이, 이 땅의 사람들이 번성하고 있지 않소.”


 그가 술집을, 그 너머의 도시를, 더욱 너머의 땅을 돌아본다.


 “드넓은 초원이, 성벽의 벽돌 하나하나가 그분들의 업적을 기억할 것이오. 무엇보다도, 나를 포함한 올레스니카의 모든 이들이 그분들을 기억할 것이오.”


 레흐의 말에 술집 안이 술렁인다. 그들 모두가 그들의 공작을 경애해 마지않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단순히 그가 공작이기에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자신들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 그래봐야 당신도 귀족일 뿐이야.”


 주변과는 다르게 정우는 경멸에 찬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오히려 이전보다 강해진 시선으로 레흐를 바라본다.


 “모든 귀족은 폭군이야. 언젠가는 자기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을 뜯어먹을. 언제 본모습을 드러내는가가 다를 뿐이지.”


 “...”


 정우의 날선 비난에도 레흐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다.


 정우의 감정을 모두 토해내게 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자신 역시 폭군이 되지 않도록 언제나 경계하고 있기에 받아들이려는 의도도 분명 존재한다.


 “당신 선정도 결국 가식일 뿐이야. 양들을 먹기 좋게 살찌우는 목장주라고!”


 점점 정우의 어조가 격해져 간다. 레흐의 생각대로, 고조된 감정은 사그라들 줄 모르고 점점 더 바닥을 향해 치닫는다.


 “뚫린 입이라고 마구잡이로..!”


 “아무리 까마귀 그쪽이라 해도 말이 지나치군.”


 거듭되는 정우의 폭언에 참지 못한 술집 주인과 직원들이 참지 못하고 끼어든다.


 그들의 목소리엔 강렬한 분노가 담겨있다. 어찌 감히 자신들의 샛별을 모욕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말이 틀렸소? 뭐, 자기들 목에 칼을 쑤셔 박을 거라는 것도 모르니, 어쩔 수 없나. 두고 보시오. 이자가 나중에 어찌 변할지.”


 “당장 그 입 다무시오.”


 “지금 당장 네놈을 이곳에서..”


 술집에 있던 모두가 정우를 향해 한 발짝 씩 다가간다. 분명 위협스런 태도를 취하고 있음에도 정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저들이 싸움을 걸어준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상관없다. 그 자리에서 때려눕혀 레흐를 자극할 수 있으니.





 “그만! 물러나 주시오! 이 자리는 우리 세 사람의 자리요. 여러분들이 날 생각해주는 마음은 알겠으나, 이곳에선 부디 물러나 주시오.”


 그러나 실제로 충돌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레흐가 모두를 제지했기 때문이다.


 “각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정우의 멱살을 잡아채려던 술집 주인이 뒤로 물러선다.


 “아니, 레흐면 족하오. 지금은 공작이 아니지 않소. 그러니, 한 사람으로 부탁하겠소. 부디 먼 발치에서 지켜봐 주시오.”


 레흐가 술집 주인의 손을 잡아주며 미소 짓는다. 그의 따스한 미소에 주변에 들끓던 분노가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예. 각하. 물러나 있겠습니다.”


 “그냥 레흐래도.”


 뒤로 물러서는 술집 주인을 레흐가 애정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바라본다. 자식을 바라보는 아비의 시선조차 그보다 애정이 담겨있긴 힘들 것이다.





 “하! 끝내주는 촌극이군. 고결한 척하는 귀족에, 그 귀족을 떠받들어주는 멍청이들이라니.”


 정우가 과장된 자세로 손뼉을 친다. 그러나, 비웃음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공허하다.


 “그거 아나? 인간의 ‘가죽’을 조금만 벗겨내면, 그 아래는 결국 짐승하고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거.”


 악에 받친 정우가 광기에 젖은 비웃음을 흘린다. 그를 바라보는 레흐의 눈가엔 점점 물기가 어린다.


 “당신이 보여주는 고결함도 결국 그런 가죽에 지나지 않아. 본모습을 보이란 말이야! 추악하고 쓰레기 같은 면을! 인간답게!”





 “슬프오. 진심으로.”


 레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그의 뺨을 타고 내려간다.


 “심장이 조이듯 아프오. 도대체 어떤 슬픔을 겪어야, 그리도 절망할 수 있단 말이오.”


 “...”


 “귀하의 말에선 오로지 차가움만이 느껴지오. 사람의 온기도, 빛도, 가능성도 느껴지지 않소.”


 “...”


 예상외의 반응에 정우도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거기에, 귀하는 자신의 일은 하나도 말하지 않았소. 귀하가 날 꺼리는 이유를 여럿 말해주었소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생각하오.”


 이어지는 말에 정우의 시선이 흔들린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은, 하지 못한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온다.


 “부탁이오. 귀하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오.”


 “내 이야기해달라고?! 좋아. 해주지.”


 결국, 정우의 가슴속 둑이 무너져 내렸다. 계속해서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레흐에 분노한 것인지, 레흐의 간곡한 태도가 그의 마음을 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내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만족했나?”


 정우가 마을이 도적단에 불타버린 일부터, 복수의 여정을 걸으며 무수한 피를 흘린 일까지 모두 레흐에게 털어놓았다.


 물론, 마지막까지 남은 자제심이 범죄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은 빼고 말하도록 억제했다.


 “털어놔 줘서 고맙소. 힘든 결정이었을 텐데.”


 “너...”


 레흐가 고개를 숙인다. 유나 역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안쓰럽게 바라만 보고 있다.


 “네가 계속해서 레흐를 질투하던 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유나가 정우의 손을 잡는다.


 “헛소리하지 마. 내가 왜 질투 같은 감정을 느끼겠어.”


 정우가 유나가 내민 손을 뿌리친다. 고조된 감정이 소중한 친우의 호의마저 짓밟고 있다.


 “..그만 인정해. 너랑 레흐는 정말 많이 닮았어. 고집이 쓸데없는 정도로 강한 거나, 다른 사람한테 기대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것까지.”


 “거기에 서로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하고 있다는 것도.”


 “가끔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것까지 비슷하네.”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미소 짓는 유나의 얼굴엔 희망과 공감에서 오는 아픔이 뒤섞여있다.


 “...”


 그 모습이 정우의 심장을 깊숙이 파고든다. 아무리 감정과 인간성이 메마른 그라 해도, 유나가 아픔에 공감하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바로 그 점이 싫은 거잖아. 너와는 다른 선택을 한 것 같은 그 모습이, 그 결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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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붉은 손 - 122 (대회전의 전조) 24.06.22 1 0 11쪽
122 붉은 손 - 121 (초원의 음모) 24.06.20 4 0 11쪽
121 붉은 손 - 120 (르브셰 공성전 4) 24.06.18 5 0 12쪽
120 붉은 손 - 119 (르브셰 공성전 3) 24.06.08 7 0 11쪽
119 붉은 손 - 118 (르브셰 공성전 2) 24.06.04 7 0 12쪽
118 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24.06.01 9 0 12쪽
117 붉은 손 - 116 (까마귀 무리) 24.05.30 8 0 11쪽
116 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24.05.28 6 0 12쪽
115 붉은 손 - 114 (승전보) 24.05.25 7 0 12쪽
114 붉은 손 - 113 (최초의 공화국 7) 24.05.22 6 0 11쪽
113 붉은 손 - 112 (최초의 공화국 6) 24.05.18 8 0 11쪽
112 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24.05.14 9 0 11쪽
111 붉은 손 - 110 (최초의 공화국 4) 24.05.11 8 0 11쪽
110 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24.05.04 8 0 11쪽
109 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24.04.30 10 0 12쪽
108 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24.04.26 11 0 11쪽
107 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24.04.24 10 0 11쪽
106 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24.04.20 11 0 11쪽
105 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24.04.19 11 0 11쪽
104 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24.04.16 13 0 11쪽
103 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24.04.10 15 0 11쪽
102 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24.03.31 14 0 11쪽
» 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24.03.28 14 0 11쪽
100 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24.03.22 14 0 11쪽
99 붉은 손 - 98 (막간의 이야기) 24.03.21 12 0 11쪽
98 붉은 손 - 97 (순혈당 - 6) 24.03.17 12 0 11쪽
97 붉은 손 - 96 (순혈당 - 5) 24.03.12 13 0 11쪽
96 붉은 손 - 95 (순혈당 - 4) 24.03.09 13 0 12쪽
95 붉은 손 - 94 (순혈당 - 3) 24.03.05 1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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