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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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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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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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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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DUMMY

 “빌어먹을..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더한 고통을 겪은 내겐 아무도 없었으니까.”


 분을 이기지 못한 정우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단 한 명도! 그래서 당신이 고결한 체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강하게 움켜쥔 주먹은 장갑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듯하다.


 “네 ‘집사’ 같은 존재가 내게 있었나? 아니지. 지켜야 할, 널 소중히 생각해주는 이웃이 있었나? 아니야. 살아갈 목적을 줄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분노에 가득 찬 그의 외침은 절규에 가깝다. 그가 나약함으로 치부해 계속해서 죽여왔던 감정을 토해내고 있다.


 “심장에 대못이 박히는 중에도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고!”


 “...”


 정우의 외침에 레흐는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다. 그가 느꼈을 감정이 심장에 날아와 박힌다.


 똑같이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만큼 정우의 아픔을 짐작할 수 있다.





 “..괜찮아. 이젠 네 곁에 내가 있잖아. 현도, 여기 레흐도. 이전엔 아무도 없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정우가 내리친 주먹을 유나가 감싸 쥔다. 그녀의 뺨을 따라 생긴 눈물길이 희미한 불빛을 받아 반짝인다.


 손의 온기가 정우의 녹슨 심장의 겉면을 긁어낸다. 흉터투성이가 된 심장을 어루만진다.


 “같이 아파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야. 네가 얼마나 아팠을지 알겠다는 말도, 네 입장을 이해하겠다는 말도. 우린 네가 아니니까. 불가능한 약속을 할 순 없어.”


 유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우를 안는다. 분명 정우의 가슴께도 채 넘지 못하는 그녀지만, 정우를 완전히 안아주고도 남는 듯이 보인다.


 “...”


 정우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레흐를 봤던 그 순간부터,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마을이 불타버린 그날 이후로,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처음으로 사람의 피를 흘렸을 때, 가슴의 구멍이 조금이나마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구멍으로 계속해서 피를 흘려 넣었다. 자신의 것도, 죽어 마땅한 자들의 것도, 그렇지 않은 자들의 것도.


 그때마다 구멍은 더 커지고, 더 많은 피를 요구했다. 흐른 피가 굳어 핏빛 늪이 되어, 정우의 혼을 끌어당겼다.





 “대신, 앞으로 네가 아플 땐 반드시 곁에 있어 줄게. 네가 엇나갈 것 같다면 우리가 잡아줄게. 기쁠 땐 함께 즐거워해 줄게.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들어줄게.”


 유나가 정우를 더 강하게 끌어안는다. 정우는 십수년간 억눌러 온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지금부터는 앞을 보고 나아갑시다. 그만 과거를 놓아주시오.”


 레흐가 정우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정우의 시기 어린 비난을 들은 뒤, 그가 어째서 정우에게 그리도 많은 신경을 쏟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정우와 같은 미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켜야 할 의지가, 돌봐야 할 사람이 없었다면 그 역시 복수에 미쳐 무수한 피를 흩뿌렸을 것이다.


 처음엔 순혈당의, 다음엔 순혈당의 협조자들의, 나아가선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연관된 사람들 모두의 피를.





 “..누구도. 그 누구도 내게 불타버린 마을을 옛날 일이라고 말할 수 없어.”


 침묵을 지키던 정우가 입을 연다.


 “...”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유나와 레흐가 마저 설득하려 해보지만, 정우의 손짓에 저지당한다.


 “그래도.., 방법이나 우선순위를 바꿀 순 있겠지. 좀 더 부드러운 방향으로.”


 정우가 어딘가 후련해진 듯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조금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더는 레흐 당신을 적대하지도 않겠어. 당신을 계속 적대해 봐야, 내 상황만 더 비참해질 뿐일 테니.”


 정리된 감정 탓에 평소의 그라면 하지 않을 말을 꺼낸다. 애먼 사람을 질투심에 괴롭힌다고 해서, 복수가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죽은 사람들 역시 돌아오지 않고, 그동안 행한 악행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잠시 길을 벗어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하아.”


 한숨을 내뱉는 것과는 반대로 그의 입꼬리는 미세하게나마 올라가 있다.


 오랜 시간 그와 함께 해온 자라면 그가 평온을 찾았음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다시 맹세하게 해줘.”


 정우가 유나가 꼭 쥐고 있는 반지를 가리킨다.


 레흐는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부류의 귀족이다. 이자라면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과 유나에서 출발한 소중한 것이 하나씩 늘어갈지도 모른다.





 “알겠소. 마음을 정한 것 같으니, 다시 올레스니카의 공작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소.”


 레흐가 인장 반지를 다시 착용하고, 빈 술잔을 채운다.


 이왕 이라면 친구로서 정우를 곁에 두고 싶었던 그였지만, 미워하던 사람을 주군으로 모시던 정우에게도 사정이 있음을 짐작하고 있다.


 “나를 도와 올레스니카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오?”


 “맹세합니다.”


 무릎을 꿇은 정우의 어깨를 레흐가 주먹으로 가볍게 건드린다.


 “서약의 기간은 숨이 끊어지거나, 서약에서 해방될 때까지요. 도중에 수많은 고난이, 고뇌가 기다릴 거요. 물론, 귀하의 과격한 수단은 내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소. 괜찮소?”


 “괜찮습니다. 이미 제 뜻을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다면, 귀하를 나와 함께 이 땅을 섬기는 형제로 맞이하겠소.”


 레흐가 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그대로 정우에게 건넨다.


 “드시오. 이 술은 나의 언약이오.”


 일어서 술잔을 받아서 든 정우가 망설임 없이 술잔을 비운다.


 “누구의 뜻도 아닌, 서로의 뜻에 따라 신의를 다하기를. 그리하여, 진심으로 하나 되기를.”


 “누구의 뜻도 아닌, 서로의 뜻에 따라 신의를 다하기를. 그리하여, 진심으로 하나 되기를.”


 레흐가 먼저 축복의 말을 꺼내고, 정우가 이어서 받는다. 둘 사이를 가로막던 감정의 골이 사라진 자리에 신뢰와 경의가 자리 잡아간다.





 “아, 그리고.. 귀하에게 맡길 직책이 하나 더 있소.”


먼저 자리에 앉으려는 정우를 레흐가 붙잡는다. 그의 눈엔 어떤 결의가 깃들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주군.”


 “귀하는 내가 본 누구보다 귀족을 싫어하오. 아니.. 싫어한다기 보단 증오한다는 쪽인가.”


 “..예. 주군의 옳은 정치는 믿을 수 있으나, 여전히 귀족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귀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에게 귀족을 믿어달라고 하는 건 무리겠지.”


 레흐가 이해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리 정우가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었다 한들, 뿌리 깊은 증오를 들어 낼 순 없다.


 “나는 올레스니카가 모든 이들의 안식처가 되었으면 하오. 사람의 온기가 겨울의 삭풍조차 막아내는 곳. 사람의 빛이 한밤의 그림자마저 지우는 곳이 되었으면 하오.”


 레흐가 손 안의 빈 술잔을 내려다본다. 바닥에 방울진 흔적에 그의 얼굴이 비친다. 피로하면서도, 결의와 희망에 찬 얼굴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이가 스스로 가능성을 마음껏 펼쳐,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곳이 되었으면 하오. 내가 필요 없는 곳 말이오.”


 레흐의 말은 진실하기 그지없다. 진정으로 자신이 권좌에 앉을 필요가 없는 날을, 권좌 그 자체가 없어지는 날을 꿈꾸고 있다.


 이런 생각은 ‘어린가지’ 채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황도에서 살던 친우와 연락하며 점점 더 강해졌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제국과 서부 왕국에 있는 공화파 인사들과 교류한 지도 5년이 넘었다.





 “그를 위해선 귀하가 필요하오. 부디 내 ‘심판자’가 되어주시오. 내가 폭군이 될 조짐이 보인다면, 날 멈춰주시오. ‘그 어떠한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소.”


 “..!”


 정우의 눈이 경악으로 커진다. 눈앞의 사내는, 자신이 엇나갈 것 같다면 목숨을 빼앗아서라도 막아달라고 하고 있다.


 “권좌는 그저 의자일 뿐이오. 권력은 그저 도구일 뿐이오. 손상되면 다시 만들면 그만이지.”


 레흐가 또박또박 말을 이어간다. 술기운에 호기롭게 내뱉는 헛소리가 아니다. 진심으로 정우에게 자신을 살해할 수 있는 권한을 주려 한다.


 “하나, 이것은 다르오. 단 하나뿐이지. 이걸 잃는다면, 난 모든 것을 잃은 거요. 이전의 나는 죽고, 과거의 망령만 남는 거요.”


 레흐가 자기 심장을, 그 너머의 ‘신념’을 가리킨다.


 “그러니, 부디 내 제안을 받아주시오. 귀하라면 날 엄히 감시해줄 수 있소.”


 “..주군의 명을 받듭니다. 제 단검과 권총이 언제나 허리띠에 묶여있길 바랍니다.”





 “동감이오. 솔직히, 나도 목숨은 아깝거든.”


 레흐가 진지했던 분위기를 순식간에 깨버리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던진다.


 “뭐래. 재미없는 말 할 거면 술이나 마셔.”


 “주군께선 사람을 웃기는 덴 영 재주가 없으십니다.”


 “내가 재미없는 게 아니라, 둘이 웃기기 힘든 거라니까.”


 그 모습을 정우와 유나 모두 미묘한 미소를 짓는다.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엔 레흐를 향한 경의와 애정이 담겨 있다.


 이날, 레흐는 과거의 자신이 그랬듯 ‘모든 것’을 대가로 ‘진정한 충성’을 얻어냈다.





 금박을 입힌 가구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집무실의 안, 한 여인이 바쁘게 서류를 읽어내리고 있다.


 서류의 내용은 급증하는 무역과 신대륙 식민지 간의 분쟁, 이웃 국가인 ‘라인동맹’과의 분쟁과 관련한 주제 등으로 다양하다.


 서른 후반을 바라보는 여인은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로 온몸을 치장하고 있다.


 지나친 화려함에 저속해 보일 수 있음에도, 여인의 수려한 이목구비와 머릿결이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을 남긴다.


 구대륙의 최강국, ‘갈리아’의 국왕에 어울리는 위엄있는 자태다.





 “전하. 밀서가 도착했습니다. 제국 측의 ‘협력자’가 보낸 듯 합니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시종장이 밀봉된 봉투를 건넨다.


 ‘전하’라는 말을 들은 여인은 잠시 짜증을 느꼈지만, 아직 그것을 티를 낼 순 없다. 지금은 인내심을 갖출 때다.


 ‘폐하’라는 호칭은 동방의 제국을 거꾸러트리거나, 서부의 황제가 된 이후에 칭해도 된다.


 “알겠네. 읽어볼 테니, 자리로 돌아가게.”


 여인이 봉투를 열자마자 시큼한 귤 향이 퍼진다. ‘협력자’와 약속한 증표다.


 ‘순조롭게 계획 진행 중. 귀국의 불충한 자들에게 압박을 가할 것. 확인되는 대로 이쪽에서도 다음 수를 두겠음.’


 단 3줄뿐인 편지의 내용은 단출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여인의 표정은 비장하기 그지없다.


 “때가 되었나.. 근위대와 기수가문들을 소집해야겠군.”


 그 편지는, 구대륙 전체를 뒤흔들만한 무게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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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붉은 손 - 119 (르브셰 공성전 3) 24.06.08 2 0 11쪽
119 붉은 손 - 118 (르브셰 공성전 2) 24.06.04 4 0 12쪽
118 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24.06.01 5 0 12쪽
117 붉은 손 - 116 (까마귀 무리) 24.05.30 6 0 11쪽
116 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24.05.28 6 0 12쪽
115 붉은 손 - 114 (승전보) 24.05.25 7 0 12쪽
114 붉은 손 - 113 (최초의 공화국 7) 24.05.22 5 0 11쪽
113 붉은 손 - 112 (최초의 공화국 6) 24.05.18 7 0 11쪽
112 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24.05.14 7 0 11쪽
111 붉은 손 - 110 (최초의 공화국 4) 24.05.11 8 0 11쪽
110 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24.05.04 7 0 11쪽
109 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24.04.30 9 0 12쪽
108 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24.04.26 9 0 11쪽
107 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24.04.24 8 0 11쪽
106 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24.04.20 8 0 11쪽
105 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24.04.19 9 0 11쪽
104 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24.04.16 12 0 11쪽
103 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24.04.10 12 0 11쪽
» 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24.03.31 14 0 11쪽
101 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24.03.28 11 0 11쪽
100 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24.03.22 13 0 11쪽
99 붉은 손 - 98 (막간의 이야기) 24.03.21 11 0 11쪽
98 붉은 손 - 97 (순혈당 - 6) 24.03.17 10 0 11쪽
97 붉은 손 - 96 (순혈당 - 5) 24.03.12 11 0 11쪽
96 붉은 손 - 95 (순혈당 - 4) 24.03.09 11 0 12쪽
95 붉은 손 - 94 (순혈당 - 3) 24.03.05 11 0 12쪽
94 붉은 손 - 93 (순혈당 - 2) 24.02.27 10 0 11쪽
93 붉은 손 - 92 (순혈당 - 1) 24.02.21 11 0 12쪽
92 붉은 손 - 91 ('흑의백' 나탈리아 - 6) 24.02.16 1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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