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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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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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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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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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DUMMY

 새로운 충성맹세 이후로 6달여, 정우가 올레스니카와 그 땅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복수 말곤 아무것도 없던 자신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 레흐의 소중한 것을 지켜주고 싶어졌다.


 정보수집보단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일선을 넘는 공포보단 질서를 불러오기 위한 위압을 우선했다. 


 잔혹한 살해는 없어졌고, 한밤의 까마귀의 활동 역시 최대한 상처입히지 않고 제압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드물게 발생하는 흉악범이나 중죄인들조차, 손가락을 꺾거나 뼈를 부러트리고 병사들에게 넘겼다.


 피에 물든 부리로 악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한밤의 까마귀가, 질서를 유지하는 감시자로 거듭났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모습에 자신도 놀라는 정우였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예전보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주변을 신경 쓰게 되었다.





 “이야, 오늘도 땀 잔뜩 흘렸는걸. 얼른 가서 시원하게 술이나 한잔 걸치면 좋겠네. 맥주도 좋고, 탁주도 좋고.”


 유나와 정우, 현이 나란히 피셰의 성벽 아래를 거닌다. 마침 3명의 일정이 겹쳐, 함께 돌아가기로 했다.


 유나가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선 정우를 힐끔거린다. 입꼬리 역시 묘하게 귀여우면서도 짜증 나는 각도로 올라가 있다.


 “왜. 왜 날 쳐다보는 건데.”


 정우가 유나의 시선을 피하며 잡아뗀다. 술 한잔 정도는 그냥 사줘도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올라간 입꼬리에 장난기가 도져버렸다.


 “에라이. 요즘 좀 눈치가 늘었나 싶었는데.”


 “유나님도 좀 사세요. 매일 저랑 우리 자기한테 얻어먹기만 하잖아요. 술값이나 밥값을 낸 적이 없어.”


 사정을 모르는 현이 도끼눈을 뜨고 유나에게 핀잔을 준다.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 내가 왜 그렇게 예정에도 없는 돈을 써버렸을까? 웅? 누구 때문에?”


 유나가 말 사이사이를 늘리며, 놀리듯 정우에게 묻는다.


 유나가 술집을 대절해 정우와 레흐를 화해시킨 이후, 유나는 그 좋아하던 술과 달콤한 간식까지 줄였다.


 저축하는 데 1년은 족히 걸리는, 10닢이 넘는 금편을 하룻밤 만에 태워버린 덕분에 금전적으로 굉장히 쪼들리는 상황이다.


 “어후, 얄미워라. ..알았어. 사줄게. 은편 네 닢 안에서.”


 정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곤 고개를 끄덕인다. 말과는 달리, 어쩔 수 없다는 눈빛 사이로 애정과 고마움이 보인다.


 ‘더러운 일’을 그만두고 농장을 꾸리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는지 알고 있는 정우다.


 심적으로, 물질적으로 유나가 얼마나 큰 희생을 했는지 충분히 헤아리고 있다.





 “유후! 사줄 거면서 왜 튕기고 그래. 서운하게.”


 유나가 깍지 끼고 있던 손을 펴곤 정우의 어깨에 건다. 아니, 걸려고 했다.


 그녀의 작은 키 탓에, 정우가 등을 굽혀주지 않으면 어깨동무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유나님한테 뭐 빚진 거라도 있어? 지금 장사도 잘되고 있어서 돈이 궁할 일은 없을 텐데.”


 예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정우를 바라본다.


 “6달 전부터 갑자기 유나님한테 유독 약하잖아. 떼쓰는 것도 잘 받아주고.”


 마음에 드는 점이라 굳이 입에 올리진 않지만, 6달 전보다 사람이 대단히 부드럽고 다정해졌다.


 이전의 다정함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예전에는 상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다정함이었다면, 지금은 상대의 감정과 의지를 최대한 존중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헤헤, 그런 셈이지. 돈으론 못 갚는 걸 빚졌거든. 다 갚으려면.. 평생은 걸릴걸.”


 유나가 예현에게 씩 웃어 보인다. 장난기 어린 미소 뒤에는 진심이 담겨있다.


 술집에서의 일은 예현에게 알려주지 않은, 둘만의 비밀로 남겨두고 싶다는 진심이.


 그동안 둘이서 쌓아온 기억은 피투성이인 것들 뿐이다. 하나쯤은, 찬장에 숨겨둔 과자 같은 추억이 있어도 괜찮겠지.





 “..하아. 둘 다, 사람 궁금하게 하는 재주가 있어요. 나 심술 날 것 같아.”


 예현이 가볍게 한숨을 쉬곤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추궁하진 않는다.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안 그래도 황소고집인 정우다. 쉽게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진 않는다. 그것도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라면 더더욱.


 정우를 향한 유나의 마음은 예현 역시 잘 알고 있다. 적어도 정우에게 해가 될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리라 확신할 수 있다.


 연인으로서 다른 여인과 단둘만의 비밀을 만드는 것은 탐탁지 않지만, 언제나 소중한 연인의 등을 지켜주는 사람이다.


 정우가 유나를 여자로서 대하는 기미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돌려받을 일 없는 짝사랑의 추억 정도는 양보해줘도 괜찮다.





 “..들어가게 해주시오! 제발! 이곳이 유일한 희망이란 말이오! 남편과 아이라도 들여보내 주시오!”


 “우리 다 죽는다고!”


 “안 열어주면 힘으로라도 밀고 들어가야 되오!”


 “지금 3일째 굶었다고요!”


 서로에게 악담을 가장한 농담을 퍼붓는 정우와 유나, 그런 둘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던 예현의 뒤로 커다란 고함이 들린다.


 “뭔가 일이 터진 것 같은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껏 풀려있던 유나와 정우의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외침에 담겨 있는 절박함을 감지했다.


 반면, 현의 어깨는 두려움에 흔들린다. 아무리 ‘뒷골목’에 가까운 일을 하고 있다고 한들, 그녀의 본질은 평범하고 선량한 소시민이다.


 사람이 고통에 신음하는 건 그녀에겐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가봐야겠지? ‘까마귀’나 ‘전쟁매’가 이런 데

빠질 순 없잖아.”


 정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와 유나 모두 몸에 긴장을 불어넣으며 무장의 위치를 다시 한번 상기한다.


 “현이 넌 상관으로 돌아가 있어.”


 “..나도 남을래. 혹시 모르잖아.”


 떨리는 어깨를 움켜잡은 예현이 간신히 입을 연다. 사랑하는 연인과 소중한 친구를 위험한 일에 내버려 두고 갈 수 없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니까 돌아가라는 거야. 일이 잘못 돌아갔을 때, 네가 미리 가서 물자를 정리해둬야 빨리 지원받을 수 있어.”


 정우가 두려움에 떠는 예현을 품속에 끌어안고,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의 말은 예현의 안전을 확보할 구실을 만든 것에 가깝다. 이미 상관의 물자는 언제든 필요한 곳에 배분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다.


 예전의 정우라면 ‘돌아가 있는 게 안심된다.’, ‘지키기 어렵다.’ 같은 직설적인 말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몸 성히 돌아갈 테니까.”


 말을 마친 정우가 예현에게 가볍게 입을 맞춘다. 예현이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잠시 입에 손끝을 갖다 댄다. 마치 두근거림의 잔향을 느끼듯.


 “..알았어. 약속 지켜야 해. 안 그러면 나 진심으로 화낼 거야.”


 얼굴이 발그레해진 예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상관을 향해 달려 나간다.


 “새끼, 많이 늘었네. 이제 누님 현지지도는 필요 없겠다.”


 “뭐라는 거야. 내가 연상인데. 그리고 처음부터 네 지도 같은 건 필요 없었거든.”


 장난기가 가득한 말과는 다르게, 성벽을 향해 달려가는 둘의 결의와 각오는 세공하기 전의 금강석만큼이나 단단하다.





 “꽤 소란스러운데, 무슨 일이오?”


 “‘까마귀’, ‘전쟁매’! 곤란한 때에 잘 와주셨습니다. 주군께도 전령을 보내두었습니다만, 근처에 자문회 일원이 있다는 게 안심됩니다. ”


 성벽 수문장이 정우와 유나를 맞이한다. 마흔 즈음의 그의 얼굴엔 당혹감에서 나온 땀이 가득 맺혀있다.


 “서쪽에서 대규모 난민이 밀려온다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드나드는 상인들과 이야기를 나눠서 일부는 알고 있소. 서쪽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더군.”


 “아, 나도 병사들이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 소문으론 무슨 사람으로 된 파도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던데.”


 셋이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성벽 밖의 소요는 점점 더 격화되고 있다.


 병사들이 몸을 바쳐 막아내곤 있지만, 그에 맞서 미는 힘도 강해진다.


 평소 레흐의 인본주의적인 이상을 몸에 각인한 병사들이어서 무기를 뽑진 않지만, 그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참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행렬의 가장 선두인 것 같습니다. 대충 세봤는데, 적어도 천은 넘어요.”


 수문장이 엄지로 뒤편의 성문을 가리킨다. 열린 쪽문 사이로 울부짖는 군중이 보인다.





 “신원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자들이 일천이라.. 쉽게 들였다간 큰일이 나겠어. 알겠소. 내가 주군께서 오실 때까지 시간을 끌어보지. 내 상관에 사람을 보내서, 을형 비축품을 수레 2개만큼 가져와 달라 전하시오.”


 “예. 그리하죠. 한데, 뭔가 계획이라도 있으십니까?”


 “뭐, 일단 이야기나 좀 해보는 거요. 어려운 것 없지. 유나, 병사들 통제 좀 부탁해.”


 “맡겨만 두셔. 이 누님 말은 다 듣는다니까? 길을 열어라! 까마귀와 전쟁매가 왔다!”





 “전쟁매의 목소리다!”


 “얼른 길을 터! 구멍은 만들지 말고!”


 유나의 외침에 병사들이 일사불란이 움직인다.


 평소 헤실거리는 모습이 강하고, 실제로도 쉬는 시간엔 병사들에게 자주 장난을 치는 유나지만, 병사들을 훈련하는 방식은 거칠고 확고하기 그지없다.


 “내가 이 행렬의 지도자요. ‘검은 팔’이라고 부르시오.”


 행렬의 가장 앞에 서 있는, 30 즈음의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입을 연다. 오랜 여정에 지쳐 꾀죄죄한 모습이나, 그 안에 담긴 지성과 의지를 감추진 못한다.


 “각하의 첩보장인 ‘까마귀’ 정우요. 갈리아에서 왔소?”


 금발과 녹색 눈 등, 전형적인 갈리아인의 특징을 알아본 정우가 검은 팔에게 묻는다. 제국어에서도 강한 갈리아 억양이 드러난다.


 “그렇소. 부당한 박해를 받아 안식처를 찾아왔소. 이곳의 공작이 자비롭다는 소문을 들어서.”


 “..흐음.”


 썩 만족스럽지 않은 답변에 정우가 턱을 쓴다.


 박해의 이유도, 무리의 전체적인 규모도, 어떤 자들에게 쫓기고 있는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수레가 도착했습니다!”


 성의 쪽문이 열리고, 줄줄이 상자를 든 인부들이 들어온다.


 맨 앞에서 상자를 나르던 여인이 정우에게 쪽지를 건넨다. 쪽지엔 예현의 걱정 섞인 말과 함께 정확한 수량을 표기한 글이 적혀있다.


 “을형 비축품 30개.. 적어도 이틀 치는 되겠군.”


 “무슨 말이오?”


 정우의 혼잣말에 검은 팔이 의문을 표한다. 근심이 섞인 그의 시선엔 미묘한 경계심이 섞여 있다.


 “식량이오. 그대들을 들일 수는 없소만, 주군과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식사 정도는 제공할 수 있지. 내 개인 회사가 제공하는 것이니 빚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소.”


 “말할 데 없이 고맙소. 우리가 얼마나 굶었는지, 그쪽은 상상도 못 할 거요.”


 “말은 아끼고, 일단 식사부터 하시오. 내일부턴 좋건 싫건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해야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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