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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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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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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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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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DUMMY

 “북부의 칼마르부터 남부의 아라비까지, 서부의 갈리아부터 동부의 류리키아까지, 모두 대대적인 공화파 탄압에 나섰습니다. 이전까지 없던 규모였습니다.”


 그니즈카 성 지하의 가장 깊숙한 방에 레흐와 검은 팔, 정우가 모였다. 올레스니카가 어려웠던 시기, 끔찍한 범죄자들을 가두었던 곳이다.


 지금은 핏자국이나 핏물에 녹슨 음습한 도구들만이 이전의 목적을 기억한다.


 레흐의 아버지가 공작이 된 이후로, ‘선’을 넘는 것에 대한 경계로서 남겨둔 곳이다.


 “서쪽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건 모두 그것 때문입니다. 추방당했거나, 체포될 위험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이죠.” 저희 모두 이곳을 집결지로 정했습니다. 그나마 저희를 잡아 죽이진 않을 듯해서요.”


 그림자가 드리운 구석에서 정우가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관찰한다.


 “왕실이나 영주, 귀족들 사이의 분쟁 같은 건 뒤로 미룬 채로, 한 뜻이 되어서 저희를 탄압하더군요. 그것도 한날한시에 서로 짠 것처럼 말입니다.”


 검은 팔이 걷어 올린 팔뚝을 주무른다. 그의 이름대로, 그의 손부터 팔꿈치까지 모조리 검게 물들어있다.


 “평화롭게 참정권을 요구하던 운동가들이 모조리 잡혀들어갔습니다. 삼부회를 요구하던 정치가들 역시 모조리 가택연금에 처했고요.”


 “최근 편지에 답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 때문이었군.”


 “예. 저희와 함께 공화운동에 참여한 소수의 귀족이나 성직자들, 사업가들까지 잡히거나 추방당했습니다.”


 “끔찍하군.”


 “분노한 동지들이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니 근위대까지 출동했죠.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감정이 북받친 검은 팔이 말을 멈춘다. 그의 눈엔 눈물이 조금 고여있다.


 “무고한 피가요.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 그리도 잘못입니까? 폭군의 지배에서,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나려 하는 게 죽을 잘못입니까?!”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기 위해 숨을 크게 삼킨 그가 일갈한다.





 “그렇지 않소. 모든 이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소. 모든 이는 축복받고 태어나오. 그 누구도, 설령 상제라 할지라도 다른 이의 삶과 운명을 구속할 수 없소.”


 레흐의 단호한 말에 검은 팔의 눈이 커진다. 먼 곳의 영주가 이렇게나 강경한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귀하는 옳은 일을 한 거요. 불의와 폭압에 대한 저항은 사람의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가장 무거운 의무요.”


 레흐의 말엔 어떠한 기만도, 위선도 섞이지 않았다. 그 자신이 자유를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만큼, 그의 의지는 반석과 같이 단단하다.


 “압제자들과 그 수하들은 귀하에게 이리 말하겠지. ‘감히 국가의 질서를 훼손하지 마라.’, ‘너의 길은 옳지 않다.’ 아니, 옳지 않은 건 그들이오.”


 크게 뜬 검은 팔의 눈은 줄어들 줄을 모른다. 검은 팔의 뇌리에, 어째서 레흐가 ‘은빛 샛별’이라 불리는지 알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구성원들의 의지가 곧 국가의, 공동체의 의지요. 왕과 영주, 신하들 따위, 그저 대리인에 지나지 않소. 오히려 국가를 위해 가장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이지.”


 바닥을 기는 쥐들조차 어두움을 느낄 만한 감옥이지만, 검은 팔과 정우 모두 어떠한 빛이 레흐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에게 희망을,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란 확신을 주는 빛이.


 “내가 듣기론, 갈리아엔 2천만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소. 귀하가 곧 갈리아요. 2천만분의 1만큼 갈리아란 말이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모든 이가 형제애로서 일어설 수 있도록 귀하의 의무를 다한 거요.”


 검은 팔의 뺨에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 그동안 핍박받던 자신들을 이렇게까지 이해해 준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귀하가 맞서지 않고 도주했다면 실망했을 거요.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소. 설령 온 세상이 귀하의 길이 잘못되었다고 말해도 꿋꿋이 지켜나가시오. 귀하의 마음은, 영혼은 오로지 귀하의 것이오.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하도록 두지 마시오.”





 “..고맙습니다. 이곳으로 동지들을 인도한 게 지극히 정답이었군요.”


 눈물을 훔친 검은 팔이 레흐에게 고개를 숙인다. 함께 공화운동을 하던 자 중에서도 영주나 귀족, 성직자 같은 고위층이 있었지만, 이리도 확고한 이상을 품은 사람은 없었다.


 “아직 감사 인사는 하지 마시오. 아직 전부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한 것은 아니니. 말했다시피, 나는 이 땅을 섬기는 자에 지나지 않소. 여러분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이 땅의 사람들이어야만 하오.”


 “쫓아내지 않고 양식을 나눠주신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수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니까요.”


 이야기를 마친 검은 팔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근위병의 안내를 받아 방을 나선다.





“검은 팔 그자가 진실을 말하고 있었소?”


 문밖의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레흐가 고개를 돌려 정우에게 의견을 묻는다.


 그는 이상주의자일 뿐, 바보는 아니다. 인근의 포타첸이나 류리키아, 카르파티아, 실바니아 모두 올레스니카를 노리고 있다.


 주변의 모든 영주는 레흐의 조모인 아누쉬카 대부터 급격히 성장하는 올레스니카를 향한 경계심을 품고 있다.


 영지민들의 이탈이나 경제력의 이탈 등, 그들이 불만을 느낄 여지는 충분했다.


 몇번인가 이어진 군사적, 정치적 충돌 끝에 협정을 맺긴 했으나, 상황이 바뀌면 언제건 철회될 공허한 약속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의 이방인들을 쉽사리 받아들일 순 없다.


 나쁜 목적을 갖고 잠입한 자들인지부터, 저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주변국을 자극하지 않을지까지 생각해야 한다.





 “거짓을 말하는 낌새는 없었습니다. 주군. 다만.. 무언가 숨기는 게 있긴 하더군요. 격앙된 상황에서도 말을 고르는 게 보였습니다. 팔을 계속 쓸기도 했고요.”


 그림자에서 나온 정우가 레흐의 질문에 답한다. 오랜 시간 뒷골목에서 사선을 넘나든 정우다. 온 신경을 집중한다면 웬만한 거짓말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숨기고 있는 ‘그것’이 우리에게 해가 될 가능성은?”


 “확답할 순 없습니다. 그 자신에게 적의가 없다고 한들, 결과적으로 해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정우가 벽에 기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다. 그의 머릿속에서 수집한 정보들이 휘몰아치고, 충돌해 유의미한 정보로 정제된다.


 “최근 제국에서도 뭔가 꾸미는 기미가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이번 공화파 탄압과 무관할 거라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검은 팔이 숨기고 있는 걸 캐려 하는 일은 무의미하단 이야기인가.”


 “그렇습니다. 직접적인 적의가 없는 이상, 말에 불과한 자입니다. 수를 두는 자를 추적할 단서 이상은 되기 힘들겠죠.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알겠소. 그럼, 이번엔 올레스니카의 주요 사업가로서의 귀하의 의견을 묻겠소. 저들을 받아들였을 때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겠소?”


 레흐 역시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지켜야만 하는 백성들과 자유를 갈망해 쫒겨난 이들. 둘 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포기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식량 비축분이 9개월 치니, 흉년이나 한파가 들지만 않는다면 일단 먹일 수는 있을 겁니다. 식량 가격은 꽤 뛰겠지만요.”


 “그건 다행이군.”


 “문제는 머물 곳과 향후 저들의 생계 문제입니다. 검은 팔이 언급한 것만 해도 수만 단위에, 이쪽에서 피난민을 받아준다는 소식이 퍼지면 더 몰려오겠죠.”


 “대안은 없소?”


 “황무지가 된 브로지카를 재건하도록 한다거나, 광산과 작업장에 배치하는 방법이 있겠군요. 싸울 줄 아는 일부는 병사로 모집해도 좋을 겁니다. 여전히 충격은 심하겠지만요.”


 “정치적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하겠군. 보호를 선언하는 그 순간부터 공화파 영주가 아닌 이들과는 척지는 것이니.”


 레흐가 작은 한숨을 내쉰다. 그의 고민이 한숨에 섞여 나온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주군.”


 “‘세나트’를 소집하겠소. 이번 일은 나 혼자 결정하기엔 사안이 너무나도 중대하오. 밖에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이곳에서 모두 끝마쳤으니, 이번엔 우리가 섬기는 이들의 말을 들어봅시다.”





 “당연히 받아줘야 하지 않소! 폭군에 쫓겨 온 자들을 어찌 내친단 말이오?!”


 “그럼 당신네 도시에서 전부 받아들일 거예요? 아닐 텐데요.”


 “이미 그들 중 몇몇이 우리 부족과 충돌했다.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대가 없이 넘어갈 순 없어.”


 피셰 인근의 너른 초원에 쳐진 거대한 천막 안에서 고성이 오간다. 각 직능과 지역, 부족을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피난민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접이식 탁자와 의자로 가득 찬 천막 안은 단출하기 그지없으나, 가운데 설치된 단상이 시선을 붙잡는다.


 단상 위에는 5척 길이 대검이 거치대에 걸려있고, 그 옆엔 무수한 검이 꽂힌 점토 더미가 상자에 담겨있다. 꽂힌 검의 손잡이마다, 작은 책자가 매달려 있다.





 “이곳은..”


 천막의 가장 구석에서 토론을 지켜보던 검은 팔이 질문한다. 그의 눈엔 어떠한, 경외심에 가까운 감정이 깃들어있다.


 “‘세나트’요. 공작형 전체의 의지가 통합되어야만 할 때, 주군께서 소집하시는 의회지. 대표들은 각각의 공동체의 투표로 선출되오.”


 그의 질문에 정우가 답한다. 레흐는 논의를 경청할 뿐, 천막에 들어온 이후로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공작께선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겁니까?”


 “주군께선 어떠한 권한도 갖지 않으시오. 오로지 결과 선언만 하실 뿐이지. 이곳에서 결정된 일은 주군께서도 반드시 이행하셔야만 하오.”


 단상 위를 가리킨 정우가 말을 잇는다.


 “저 검 무더기는 ‘검의 언덕’이라 하오. 저게 왜 이런 곳에 있는지는.. 뭐,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요.”





 회의는 점점 더 가열되어 가고, 오가는 목소리가 많아진다.


 그러나, 주제를 벗어난 말은 단 하나도 없다. 모두가 진심으로 모두의 미래를 위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어떤 이는 피난민들을 위해 희생할 수 없음을, 어떤 이는 사람 된 도리를 설파한다.


 어떤 이는 피난민들이 불러올 피해를, 어떤 이는 피난민들이 불러올 이익을 주장한다.


 태양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달이 차가운 빛을 발하기 시작할 무렵, 회의의 결과가 나왔다.


 예상외의 결과에 검은 팔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그런 그의 어깨를 레흐가 힘껏 안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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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붉은 손 - 118 (르브셰 공성전 2) 24.06.04 7 0 12쪽
118 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24.06.01 9 0 12쪽
117 붉은 손 - 116 (까마귀 무리) 24.05.30 8 0 11쪽
116 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24.05.28 6 0 12쪽
115 붉은 손 - 114 (승전보) 24.05.25 7 0 12쪽
114 붉은 손 - 113 (최초의 공화국 7) 24.05.22 5 0 11쪽
113 붉은 손 - 112 (최초의 공화국 6) 24.05.18 8 0 11쪽
112 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24.05.14 9 0 11쪽
111 붉은 손 - 110 (최초의 공화국 4) 24.05.11 8 0 11쪽
110 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24.05.04 8 0 11쪽
109 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24.04.30 9 0 12쪽
108 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24.04.26 11 0 11쪽
107 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24.04.24 9 0 11쪽
106 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24.04.20 11 0 11쪽
105 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24.04.19 11 0 11쪽
» 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24.04.16 13 0 11쪽
103 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24.04.10 14 0 11쪽
102 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24.03.31 14 0 11쪽
101 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24.03.28 13 0 11쪽
100 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24.03.22 14 0 11쪽
99 붉은 손 - 98 (막간의 이야기) 24.03.21 12 0 11쪽
98 붉은 손 - 97 (순혈당 - 6) 24.03.17 11 0 11쪽
97 붉은 손 - 96 (순혈당 - 5) 24.03.12 13 0 11쪽
96 붉은 손 - 95 (순혈당 - 4) 24.03.09 13 0 12쪽
95 붉은 손 - 94 (순혈당 - 3) 24.03.05 1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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