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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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DUMMY

 “각하. 올라오셔서 결과를 선포해주십시오.”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끌던 노인이 구석의 레흐를 부른다.


 레흐가 군중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가 주변의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일일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발걸음엔 어떠한 망설임도 없다.


 “올레스니카의 의지가 모였으니, 저 역시 응하겠습니다.”


 레흐가 단상에 올라 거치대에 걸린 검을 뽑아 든다. 새롭게 단조 된 검의 표면이 횃불의 빛을 받아 반짝인다.


 검의 검신엔 ‘stworzony w ludzkiej woli, nigdy nie zostanie złamany’, ‘사람의 의지로 탄생했으니, 결코 부러지지 않으리’ 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레흐가 검을 높이 들고 ‘검의 언덕’을 향해 힘껏 내리찍는다.


 공기를 가르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검들이 줄지어 꽂힌 ‘검의 언덕’에 새로운 검 한 자루가 박힌다.





 “새로운 서약이 맺어졌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공화파 인사들은 우리의 형제자매가 될 것이며, 함께 어깨를 맞대고 나아갈 것입니다.”


 선언이 끝나자마자, 군중 속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온다. 개중엔 강하게 반대를 주장하던 자도 있으나, 의지가 단결된 이상 끝까지 관철할 준비가 되어있다.


 “올레스니카에 영광을! 은빛 샛별에게 영광을!”


 “대초원의 카간이여! 말을 이끄는 자여!”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언성을 높이며 다투던 자들이, 어깨동무하며 술잔을 기울이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레흐는 스스로 모범이 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모범으로 이끄는 자’라고 정의했다. 그 겸손한 자세가 모두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런 건 처음 보오. 귀족부터 평민까지 한뜻이 되어 의지를 굳히다니.. 그것도 이방인들을 받아들여 주는 문제에 말이오.”


 “이것이 주군의 소망이오. 언젠가 공작령의 모든 일이 이곳 세나트에서 정해지는 것. 그리하여, 자신이 더는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을 바라고 계시오.”


 정우가 단상 위에서 주먹을 치켜들고 마음을 끌어모으는 레흐를 바라보며 답한다.


 시선엔 존경이 담겼고, 말에는 레흐의 꿈이 이뤄지는 걸 돕고 싶다는 열망이 느껴진다.


 “자, 갑시다. 그대의 동지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하지 않소.”


 정우가 검은 팔에게 손을 내민다. 그것을 바라보는 검은 팔의 눈에는, 앞날을 향한 희망이 가득 차 있다.


 ‘은빛 샛별’이 다시 한번 절망을 몰아냈다.





 ‘세나트’의 결정은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었다. 단 한 사람의 피난민도 빠트리지 않고 받아주는 대신, 그들만의 집단을 이루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당장 먹을 식량을 챙긴 피난민들은 가족 단위로, 고향 단위로 나뉘어 새로운 보금자리로 떠났다.


 마지막 남은 의심을 잠재우기 위한 타협책이자, 외부의 시선에서 피난민들을 조금이나마 숨기고자 한 안전책이기도 했다.


 세나트 이후로 올레스니카인들은 그들을 형제자매로 대했다. 세나트에 참석했던 대표들이 그들을 이끌었고,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단 2달 만에 피난민이었던 자들은 직공, 농부, 병사, 부족민이 되었다.





 “어디서 오셨소?”


 피셰 성벽 아래의 검문 구역, 성문 앞은 출입 허가를 기다리는 인파로 북적인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이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외양과 옷차림을 하고 있다. 하나같이 먼 곳에서 온 자들이다.


 “나 롬바르디에서 왔어요. 나 집 필요해요. 일도. 내 아이 배고파요. 나 힘 좋아요. 일 잘해요. 남편도 손재주 좋아요. 일 잘해요.”


 아이를 안은 여인이 남편의 손을 이끌고 검문소로 들어온다. 초췌한 그들의 모습에 검문하던 병사가 안쓰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오늘따라 더 많이 들어오는 것 같군. 들어가시오. 저기 가슴에 은색 표를 단 사람에게 말을 걸면 안내해 줄 거요.”


 올레스니카의 결정과 움직임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살 곳을 잃은 공화파 인사들과 그 가족들이 속속들이 피난처를 찾아왔다.


 정우의 예측대로, 처음 도착한 사람들의 배를 훌쩍 넘는 인파가 올레스니카를 향했다.


 대부분이 평민 출신이었으나, 대의를 위해 작위마저 포기한 몇몇 귀족이 가솔들을 이끌고 찾아오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올레스니카가 사람의 파도에 집어삼켜지는 것처럼 느낄 정도였다.





 “30년 넘게 신발을 팔았는데, 이렇게 장사가 잘된 적은 처음이야. 일손이랑 가죽이 부족할 지경이라니까.”


 “그러게나 말이오. 너도나도 양을 찾는 통에, 우리 부족도 팔아치울 가축이 부족할 지경이오.”


 피셰의 유명한 신발장이의 매장에서 장인과 유목민이 거래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이방인들을 경계하는 기류는 감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피난민이 찾아오길 은근히 바라는 눈치다.


 정우나 정착 반대파의 의견과는 달리, 이후의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오히려 올레스니카의 경제는 전례 없는 호황기를 맞이했다.


 바닥까지 끌어다 쓸 것을 각오했던 비축 식량은 오히려 이전보다 늘었고, 국고 역시 나날이 몸집을 불려 나갔다.


 지금은 성의 창고로 감당이 되지 않아 비는 공간을 억지로 개조해 사용하는 중이다.





 “이야, 일 잘하네. 에밀리오. 손재주가 좋다는 말은 들었어도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는데.”


 “별거 아니다. 고향에선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도 했다. 귀족 놈들 갑옷도 맞춰주고 했다.”


 브로지카의 야금 공장에서 노동자 두 명이 대화를 나눈다. 인근의 노동자들 역시 에밀리오의 솜씨를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다.


 그가 이 공장으로 온 이후로, 다른 이들의 기술 스승 노릇을 하고 있다. 공장의 생산성 역시 높은 수준으로 증가했다.





 피난민들의 주축을 이룬 것은 상공업자 계층으로, 높은 수준의 기술과 지식을 갖춘 자들이었다.


 즉, 자재와 일터만 제공된다면 영지의 경제력을 순식간에 늘릴 수 있는 집단이었다.


 구대륙 서부에서 가장 낙후된 경제력과 기술력을 갖춘 지역이었던 만큼, 이는 엄청난 장점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탄탄한 기반을 이미 갖춰 인력만이 빈 요소였던 올레스니카에는 더욱 큰 호재였다.


 정우와 예현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자금을 모조리 풀어 새로운 공장과 작업장을 지었고, 자재를 독점하다시피 사들였다.


 레흐와 자문회원들을 설득한 끝에 공작령의 자금까지 끌어온 것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처음엔 미쳤다며 손가락질하던 주변 세력들이었지만, 자국의 물자와 인력이 올레스니카로 빨려드는 것을 보자마자 그런 비웃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성공한 경제는 더 많은 공화파 인사들을 끌어들였고, 그들은 더욱 경제를 발전시키는 선순환이 일어났다.


 모두가 굶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겨울, 올레스니카의 부엌과 창고는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웠다.





 “지금 당장 올레스니카를 공격해야 하오! 이 말을 하는 지금도 빌어먹을 농노와 소작농들이 내 땅에서 탈주하고 있단 말이오!”


 “그놈들이 곡물과 가축을 미친 듯이 사가는 통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오. 당장 행동을 취해야만 하오.”


 “그 상인 연놈들도 하나씩 옮겨가더군. 제기랄. 자기들이 힘들 때 누가 뒤를 봐줬는지 기억도 못 하고.”


 올레스니카 북쪽에 위치한 포타첸 공작령. 금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대회의장의 안에서 영주들이 언성을 높인다.


 주군이 있는 영주부터 독립영주까지, 세력이 약한 가문부터 강대한 가문까지, 평소라면 한데 모일 일이 없는 이들이 ‘늑대공’ 안나의 소집에 응해 한자리에 모였다.


 늑대공의 영지는 그녀의 뛰어난 수완에 힘입어 큰 손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회의를 주선했다.


 의문을 느끼는 영주들이었지만, 자신들의 불만을 한데 모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무시해도 좋을 의문이었다.





 “빌어먹을 놈.. 그 귀족의 체통을 말아먹는, 누더기를 뒤집어쓴 놈 때문에 손해가 막심하오.”


 분명 성장하는 올레스니카에 대항할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을 터임에도, 영주들은 불만을 털어놓기 바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지의 발전이나 영지민들의 안녕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렇기에 그들 사이에 반목하는 일도 적다. 적당한 야합 상태를 유지하면서, 최소한의 군사력을 유지한다.


 ‘돼지들이 꿀꿀거리는 모습은 언제나 역겹군. 할 줄 아는 건 처먹는 것밖에 없는 연놈들이.’


 그런 그들의 모습에 경멸과 혐오를 느끼는 안나였지만, 드러내지 않고 침묵을 유지한다.


 가장 상석에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의 모습은 고고하기 그지없다. 몸에 달라붙는 회색 옷에는 곳곳에 불길한 늑대 문양이 새겨져 있다.


 40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그녀의 육체는 여전히 강건하다. 단단한 근육이 전신을 채우고 있고, 자세는 뿌리박은 거목처럼 흔들림 없다.


 전투의 흔적이 곳곳에 박힌 얼굴에선 사람을 휘어잡는 존재감과 위엄이 느껴진다. 눈가에 희미하게 새겨진 흉터에는 내면을 꿰뚫어 보는 통찰이 깃들었다.


 과거엔 엄청난 미인으로 유명했던 ‘늑대공’ 안나였으나, 전투와 통치의 여정은 그녀를 위대하고 강력한 지도자로 단조했다.





 그녀의 끝없는 권력을 향한, 재물을 향한 욕망은 영지인 포타첸을 강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욕심이 많을 뿐, 바보가 아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대가를 치러야 함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영지를 가꾸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았고,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에 성공했다.


 비록 번영의 결과가 일부 계층에만 돌아간다는 평이 있을지언정, 번영하고 있음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 해도 공격할 수가 없잖소. 명분도 없고..”


 분노에 차서 말을 내뱉던 영주가 말꼬리를 흐린다. 자존심이 차마 ‘국력이 약해 공격에 나서기 무리다.’ 라는 말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말은 진실이다. 명분 없이 공격하기엔 올레스니카는 명목상 제국령이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는다.


 확고한 명분이 없는 이상, 제국은 올레스니카를 보호해야만 한다.


 국력 역시 안나를 제외한다면, 이 자리에 모인 영주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합쳐도 5만이 채 되지 않는다.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거니와, 믿을만한 지휘관 또한 없다. 단합력마저 서로의 이권에 묶여 지리멸렬하다.


 그러니 ‘늑대공’ 안나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


 대회의장의 모든 영주가 안나를 힐끔거린다. 그들 모두 안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정확히는, ‘지금 당장 올레스니카를 공격하자. 내가 선봉에 서겠다.’ 라는 말을.


 “...”


 그러나, 안나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주군! 제국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제국 황제의 칙서를 가져왔다 합니다!”


 회의장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침묵이 깔린 회의장에 고성이 울린다. 그 ‘때’가 번개처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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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24.06.01 9 0 12쪽
117 붉은 손 - 116 (까마귀 무리) 24.05.30 8 0 11쪽
116 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24.05.28 6 0 12쪽
115 붉은 손 - 114 (승전보) 24.05.25 7 0 12쪽
114 붉은 손 - 113 (최초의 공화국 7) 24.05.22 5 0 11쪽
113 붉은 손 - 112 (최초의 공화국 6) 24.05.18 8 0 11쪽
112 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24.05.14 7 0 11쪽
111 붉은 손 - 110 (최초의 공화국 4) 24.05.11 8 0 11쪽
110 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24.05.04 8 0 11쪽
109 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24.04.30 9 0 12쪽
108 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24.04.26 11 0 11쪽
107 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24.04.24 9 0 11쪽
106 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24.04.20 10 0 11쪽
» 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24.04.19 11 0 11쪽
104 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24.04.16 12 0 11쪽
103 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24.04.10 14 0 11쪽
102 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24.03.31 14 0 11쪽
101 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24.03.28 13 0 11쪽
100 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24.03.22 14 0 11쪽
99 붉은 손 - 98 (막간의 이야기) 24.03.21 12 0 11쪽
98 붉은 손 - 97 (순혈당 - 6) 24.03.17 11 0 11쪽
97 붉은 손 - 96 (순혈당 - 5) 24.03.12 12 0 11쪽
96 붉은 손 - 95 (순혈당 - 4) 24.03.09 1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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