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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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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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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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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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DUMMY

 “동방의 외신이 늑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늑대공께 폐하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 내방하였나이다. 앞으로 나와 폐하의 명을 받드소서.”


 전령의 바로 뒤를 이어 화려한 예복을 갖춰 입은 사절이 회의장으로 들어온다. 구석구석에 금빛 자수가 새겨져 있고, 귀한 비단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황제의 위엄이 형상화된 듯한 그의 모습에 늑대공을 제외한 모두가 압도된다.


 평소 제국을 저무는 해, 늙어빠진 호랑이라 조롱하던 영주들은 다시 한번 제국의 위세를 깨닫게 되었다.





 “...”


 경악에 압도되어 침묵에 잠긴 회의장을 ‘늑대공’ 안나가 가로지른다.


 어째서 이런 시기에 동방의 황제가 늑대공에게 사절을 보낸단 말인가.


 거기에 사절의 행동도 의심스럽다. 마치 늑대공이 황제의 신하로 들어간 듯한 행동을 하지 않는가.


 대등한 관계였다면, ‘폐하의 명’이라는 말을 쓴다거나, ‘명을 받들라’ 같은 말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포타첸의 공작, 늑대무리의 지배자, 징벌의 채찍, 바르츠키 가문의 안나가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부디 하명하시옵소서.”


 이어진 안나의 행동은 회의장을 더더욱 충격으로 몰아갔다. 그 강대한 세력을 가진 늑대공이 황제의 사절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누구에게도 무릎 꿇을 것 같지 않던 늑대공이 황제의 신하가 되었다. 그것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회의에 참석한 영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절과 안나를 계속해서 두리번거린다.





 “최근, 무도한 반역자들이 짐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노라. 짐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려 하였으나, 그들은 짐의 자비를 거부했도다.”


 천천히 칙서를 읽어나가는 사절의 목소리는 사원의 종소리처럼 균일하다. 주변의 모두가 조그만 소리 하나도 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여, 짐은 어린 백성들을 지키기 위하여 반역자들을 토벌하였노라. 하나, 몇몇 간교한 뱀들이 짐의 장수들을 속이고 우롱하여 올레스니카로 도주하였노라.”


 온갖 외교적 수사로 덮여 있으나, 결국 공화파를 토벌하려 했으나 미처 놓친 자들이 생겼다는 이야기다.


 “상제의 대리인으로서, 짐은 천하에 정의를 세워야만 하노라. 무도한 무리를 제압하여 올레스니카의 백성들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해야만 하노라.”


 피난민들이 오히려 올레스니카에 번영을 가져다주는 것은 깔끔히 무시되었다. 황제에겐 명분이 생긴 것이 중요할 뿐이다.


 “늑대공은 그간 짐과 짐의 제국에 충성을 다했노라. 하여, 경에게 상장의 직위와 이막 아랑왕 작위를 내려 제국의 서쪽 변경을 편안케 하고자 한다.”


 안나가 비밀리에 충성맹세를 한 것은 1년이 갓 넘은 정도다. 그들 사이에 신뢰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이해관계만이 있을 뿐.


 “...”


 칙서를 끝까지 읽어내린 사절이 황제의 인장이 찍힌 금인을 무릎 꿇은 안나에게 건넨다. 이로써, 황명의 전달이 성립되었다.





 “소신 안나,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폐하의 의지가 소신의 뜻이요, 폐하의 영광이 곧 소신의 영광이나이다.”


 안나가 금인에 입을 맞춘 후 금인을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주변의 영주들은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에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너무나도 많은 정보가 한 번에 휘몰아치고 있다. 너무도 많은 ‘어째서?’가 떠오른다.


 어째서 안나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는가? 어째서 그것을 숨겼는가? 어째서 황제가 안나를 왕에 봉하면서까지 포섭하려 하는가?


 “망설임 없이 황명을 받들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그대도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주연을 준비할 테니, 편히 쉬다 가시오.”


 안나가 미소를 가장해 사절을 배웅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빛을 잃지 않은 미색에 잠시 숨을 삼키던 사절이 예를 올린다.





 “그럼, 회의로 돌아가 보도록 합시다. 침묵만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소.”


 안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상석으로 돌아와 이전처럼 다리를 꼬고 앉는다. 그녀의 존재감이 모두를 강력하게 짓누른다.


 “비엘체의 백작이 아랑왕 전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아랑왕 만세!”


 침묵을 깬 것은 앞으로의 거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목숨을 구걸하는 짐승의 것과도 비슷한, 어딘가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의 외침이었다.


 모여든 영주 가운데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자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들에게 부족했던 명분과 국력 모두, 조금 전까지 늑대공이었던 아랑왕이 채워줄 수 있다.


 황제의 명을 빌어 올레스니카를 침공할 수 있어 제국의 간섭은커녕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 국력 역시 군소 영주의 3배를 가볍게 넘어선다.


 지금 당장의 생존을 위협하는 저 누더기 공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새로운 주군을 모시는 것 정도는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명예와 자유 따위, 그들에겐 알 바 아니었다.


 거기에, 힘과 명분 모두를 갖춘 자에게 지금 무릎 꿇지 않는다면, 나중엔 더욱 과중한 조건의 충성맹세를 강요받을 것이 뻔하다.


 “크라슈프의 백작이 아랑왕 전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아랑왕 만세!”


 “루블라나의 남작이 아랑왕 전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아랑왕 만세!”


 자리에 모인 영주들이 모두 안나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채 5분이 되지 않았다.


 이미 주군이 있는 자들마저 일고의 고민조차 없이 서약을 갈아치웠다.





 “후우.. 돼지 같은 것들. 모여서 꿀꿀거리는 꼬락서니가 볼만했어. 뭐, 지금은 유용한 돼지들이지만. 언젠가 멱을 따버릴 때가 기대되는군.”


 안나가 개인 서재의 안락의자에 풀썩 걸터앉는다. 내뱉는 한숨에는 하루 간의 피로와 나약한 자들에 대한 경멸이 담겨 있다.


 온종일 소집권과 세금에 대한 이야기를 각 영주와 나누느라, 달이 거의 모습을 감출 때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주군. 하나씩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군요.”


 서재의 구석, 그림자 속에서 흐릿한 담배 연기가 올라온다. 온몸을 검은 망토와 두건으로 가린 탓에, 제대로 얼굴을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오로지 40대 초반의 건장한 남성이라는 것 정도만 파악할 수 있다.


 “너도 수고 많았다. ‘흑건’. 정확히 분위기가 달아오를 시점에 사절을 들여보내 줬어.”


 회의실에서와는 전혀 다른, 굉장히 편안한 모습을 보여준다. 극히 일부의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그녀의 의외의 면모다.


 1년쯤 전부터 포타첸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흑건’은 순식간에 안나의 측근으로 자리 잡아, 지금은 성안의 별실에서 거주하며 조언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걸로 주군께선 사막 너머 평원의 지배권을 얻으셨군요.”


 “왕 작위니, 지배권이니 하는 건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자갈만도 못한 물건이지. 그걸 통제할 힘과 권력이 없다면 말이야.”


 “주군께선 충분한 힘과 권력을 갖추고 계시지 않습니까. 새로 충성을 맹세한 자들의 병사들과 주군의 원래 병력과 합친다면, 적어도 7만의 대군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직 부족해. ‘광휘공’ 레흐 그자는 전쟁을 끔찍이도 하니까. 내 영지로 직접 쳐들어오진 않을 거란 이야기지. 공격전에서 확고한 승리를 거두려면.. 적어도 15만은 필요해.”


 그러나, 여전히 단독으로 올레스니카를 상대하기엔 부족하다.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나, 확고한 승리를 쟁취할 수도 없다.


 무언가 확실한 한 수가 없다면, 분명 레흐와 안나 모두의 파멸로 이어질 것임을 안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안나가 대규모 전면전이라는 선택지를 골랐다. 웬만한 확신으론 하지 않을 결정이다. 아무리 충성을 맹세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대규모 전면전을 할 수 있는 확신을 황제가 선사했기에 충성을 맹세했다고 하는 것이 현실을 반영한다.





 “약속한 건 언제쯤 도착하지?”


 “이미 모든 소집과 편성을 마치고, 출발 직전에 칙서를 내렸을 테니.. 2달 안쪽으로 걸릴 겁니다. 한겨울 직전쯤에는 도착하겠죠.”


 “내가 황명을 거부할 우려는 넘겨버렸단 건가?”


 안나가 등받이에 눕혔던 등을 똑바로 펴곤 흑건과 눈을 맞춘다.


 “실제로 거부하지 않으셨잖습니까.”


 “...”


 흑건이 미묘하게 말꼬리를 흐린다. 안나가 잠시 침묵을 유지하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려보지만, 서재에는 바람 소리만이 감돈다.


 “황제가 내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이만 나가봐.”


 긴장되었던 분위기는 안나가 다시 한번 등받이에 기대는 것으로 풀어졌다.


 “예. 주군. 좋은 밤 되시길.”


 흑건이 등을 돌려 서재를 나선다. 그가 문고리를 잡을 때쯤, 등 뒤에서 위압과 매력 둘 모두를 갖춘 목소리가 울린다.


 “난 네가 마음에 들어. ‘나신’. 배짱도 두둑하고, 머리도 잘 돌아가지. 내게 마냥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내가 후회할 만한 짓을 하지 않게 도와줬으면 좋겠어.”


 “..예. 주군.”





 “황제 폐하 납시오!”


 “황제 폐하 만세! 장작옥좌의 주인께 영광 있으라!”


 “황제 폐하 만세! 만인에게 사랑받으시는 폐하께 경애를 바치나이다!”


 안나가 아랑왕으로 봉해지기 3달 전, 황궁의 정전인 용과전 안.


 대가문의 수장들과 내각 인사들, 몇몇 남작의회 의원들이 정전에 드는 황제를 향해 만세를 부른다.


 몇몇은 진심으로, 몇몇은 불충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 그리고, 거의 대다수는 주변에 휩쓸려서.





 “지난날 안타까운 ‘과오’가 발생하여 역당의 일부가 서쪽으로 도주하고 말았소. 그들을 토벌해야만 하오. 천명을 받아 군주가 된 몸으로, 어찌 역적들을 내버려 둘 수 있겠소.”


 물론, 그 ‘과오’는 을파소와 황제의 계략이다. 일부러 토벌의 명분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공화파 탄압을 수행했던 가문의 힘을 약하게 만들기 위한.


 용과전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의 눈치를 살핀다. 그러진 않을 것이나, 만에 하나 나올 반대의견이나 조짐을 찾는다.


 그들 중 진심으로 ‘역적 토벌’의 명분을 믿는 자는 극소수다. 이미 대가문 등 관련자들의 물밑 교섭을 마친 지 오래다. 동의를 구하는 황제의 행동은 요식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 ‘태은의 공작’ 을파소를 원정군의 상원수로 임명해 서방을 안정케 하겠소. 경은 앞으로 나와 명을 받드시오.”


 “예, 폐하! 소신 을파소, 폐하의 부름에 답하나이다!”


 황제의 부름에 을파소가 옥좌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다. 분명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그의 목소리엔 강건한 젊은이조차 압도하는 기백이 깃들어있다.


 “신남의 전사 부족들부터, 신북의 유목민들까지, 제국의 모든 정예병을 소집하시오. ‘황제의 분노’를 데려가도 좋소. 서방에 제국의 정의를 실현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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