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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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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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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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DUMMY

 “상원수.”


 을파소의 군막에 들어온 부관이 팔을 직각으로 굽히고, 주먹의 엄지 면을 심장에 대어 경례한다.


 붉은 군복을 규정대로 갖춰 입은 부관의 얼굴엔 전투의 흔적이 가득하다. 멀끔히 정돈되어 있으나, 얼굴 곳곳에 새겨진 흉터는 숨길 수 없다.


 지도와 서류를 번갈아 가며 둘러보던 을파소가 그에게 손짓한다.


 “모두 집결했나?”


 “예. 인근의 병력은 모두 집결했습니다. 남은 일부도 집결지인 남양 은수포까지의 행군 도중 합류하겠다고 전달해왔습니다.”


 “좋군. 예상한 것 이상의 동원 성과야. 지휘소로 이동하지.”


 군막을 나서는 을파소를 부관이 뒤따른다. 만난 지 2주가 겨우 돼가는 사이지만, 은근히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특히나 묘하게 과묵한 점이 있다는 점이.





 “진중 상황은.. 괜찮아보이는군.”


 을파소가 이동하는 도중 주변을 둘러본다,


 황도 인근에 드넓게 펼쳐진 벌판은 색색의 군기와 군막으로 빼곡하다.


 원정을 준비하는 병사들은 군막 근처에 모여들어 제각기 긴 여정을 떠날 채비에 바쁘다.


 몇몇은 외투에 솜과 가죽을 누비고 있고, 몇몇은 푹신한 덧신을 몇켤레씩 배낭에 매달고 있다.


 “나쁘진 않습니다. 늘 일어나는 정도의 다툼도 없더군요. 남군과 여군을 섞어서 배치했는데도 밤일하는 소리 하나 안 들린 건 더 좋고요.”


 말과는 달리, 병영을 둘러보는 부관의 표정엔 만족감이 드러나 있다.


 한평생을 징집병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온 그의 입장에선, 이렇게 질서가 잡힌 병영은 몇 없던 일이다.


 “아무래도 폐하의 정예병이 합류한 게 큰듯합니다. 역시 ‘황제의 분노’랄까요. 알아서 병영의 규율을 잡고 있습니다.”


 ‘황제의 분노’는 제국의 최정예들로, 1천의 병력으로 3천을 상대할 수 있는 병사들이다.


 재능있는 10살 무렵의 아이가 징집되어, 10년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은 정도의 훈련과 교육, 세뇌를 거쳐 황제의 무기로 제련된다.


 그들의 상징인 불타는 무쇠 장갑이 새겨진 양손검과 장총, 흉갑과 완갑은 황제의 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오로지 귀족들이 주축이 된 ‘장손 기사단’만이 그들의 위명에 비할 수 있다.





 “급속 행군을 한다면 일정을 1주일은 단축할 수 있소. 이번 전쟁의 승패는 시간에 있지 않소.”


 “그렇다고 해도 강줄기를 벗어나서 행군하자는 건 위험이 지나치오. 하나씩 경유지를 거쳐 가야만 하오.”


 “그 경유지가 그대의 영지여도 그리 말할 건가요? 행군 도중에 영지에 가해지는 충격은 어떤지 잘 알만한 사람이.”


 “방금 뭐라고..”


 지휘소 안은 이미 행군계획을 논하는 지휘관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신분 자체가 남들 위에 서는 영주거나 귀족인 만큼, 쉽사리 다른 자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살면서 겪은 전투와 전쟁에서 생겨난 나름의 신념 역시 고집을 더한다.


 “수고가 많소.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모양이군.”


 “상원수 각하 오셨습니까.”


 을파소의 인사에 군막의 모두가 그에게 경례한다. 다만, 부관만큼의 예를 차리진 않는다.


 계략에 능하기 때문에 원정군의 상원수로 임명되었으나, 군무에 하나도 경험이 없는 그를 15만 대군의 총지휘관으로 삼는다는 점이 군공을 착실히 쌓은 귀족들에겐 아니꼽게 여겨졌다.


 “오셨습니까. 시일이 급박해 먼저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그중 필두가 부원수로 임명된 해릉공 석준이다. 귀족들의 정치적 요구로 임명된 자로, 행정 등의 실무엔 무능하나 정치적 감각은 좋다고 평판이 난 인물이다.


 “..알겠소.”


 상석 근처에서 비릿한 미소를 짓는 그를, 을파소는 아무런 말 없이 넘어간다.


 “해릉공, 상원수께 좀 더 예를 갖추시오. 이곳은 남작회의장이 아니오. 엄연히 지휘 체계가 잡힌 곳이란 말이오.”


 자신과 같은 황제의 충신이자 제국 최고의 장군으로 알려진 사자공 안덕이 두 부원수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군권이나 군율이 흔들리는 상황은 아니다. 아직은 저 무례를 벌할 시간이 아니다. 아직은.





 “출정이다! 제국의 자랑스러운 아들딸들이여, 폐하의 영광을 서부에 보일 때가 되었다!”


 “예! 상원수. 북을 울려라! 뿔피리를 불어라! 깃발을 휘날려라!”


 을파소가 황제에게 하사받은 부월을 앞으로 뻗는다. 군권의 상징을 본 지휘관들이 각자의 부대에 진격 명령을 내린다.


 을파소를 비롯해 대다수의 지휘관은 갑옷을 입지 않았거나, 입었다 해도 흉갑과 허벅지받이, 완갑 정도만 착용했다.


 겉에 걸친 군복 외투와 어깨에 달린 견철이 없었다면, 전선에 나서는 자들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제국군은 풍부한 유황과 초석 광산을 기반으로 일찍부터 화약 무기를 사용해, 물량과 화력 중심의 전투 체계를 갖추었다.


 덕분에 서부 왕국들과는 달리 기병과 갑옷이 빠르게 비중을 줄여나갔고, 포병과 총을 든 보병이 중심이 되는 군대를 운용하고 있다.


 황제에게 부월을 하사받은 날, 을파소는 자신이 그리도 고대하던 순간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경애해 마지않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불태울 그 순간이.





 쿵. 쿵. 쿵.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5만 병사의 대열이 발을 맞춰 행군한다. 그들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약한 진동이 발치에 느껴질 정도다.


 “장관이군. 도시 하나 정도의 사람이 전진하는 모습이라니.”


 대열의 앞쪽에서 전진하던 장교가 뒤를 돌아보고는, 옆의 동료에게 말을 붙인다. 그간 1~2천의 병사들만 지휘해본 그녀로선 생애 처음 보는 대군이었다.


 “그러게. 작은 산 두세 개는 덮고도 남겠어.”


 황도 근처의 병력만 모아 출발했음에도, 벌써 5만의 병사가 모였다. 지금 소집된 병력만 모아도 웬만한 나라는 일거에 멸망시킬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적어도 배 이상은 불어날 그 대열이 올레스니카를 향하고 있다.





 “상황이 굉장히 좋지 않습니다. 주군. 이미 늑대공, 아니, 아랑왕의 아래로 근방의 영주들이 모조리 포섭되었습니다. 몇몇 중립 세력을 제외하면, 남은 건 주군의 직계 봉신들뿐입니다.”


 지도가 펼쳐진 탁자를 사이에 둔 채, 정우가 건너편의 레흐에게 상황을 정리해준다.


 그의 목소리와 얼굴빛은 평온하나, 그 이면엔 불안감이 숨겨져 있다.


 “심지어 류리키아나 실바니아의 소영주들까지 줄을 댔습니다.”


 “그들까지 포섭한 건가.. 전쟁 없이 넘어갈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레흐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만일 죽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기껍지는 않으나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일신의 죽음보다, 백성들이 흘릴 피와 눈물이 그의 심장을 옭아맨다. 전쟁은 외교의 실패요,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피하고 싶다.


 “예. 이미 전쟁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소금과 양식을 비축하고, 대장간을 24시간 가동한다거나, 철과 화약을 쓸어 담는다거나요 .”


 그러나, 주변 상황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선 전쟁의 ‘명분’인 피난민들을 내쳐야만 한다.


 그런 일은 결단코 레흐와 올레스니카인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미 형제자매가 된 이들을 어찌 내칠 수 있단 말인가.





 “뭐, 겉으론 수확이 많아서 소금이 필요하네, 농업과 공업 투자를 늘리네 하지만, 뻔한 거짓말이죠. 어디에도 ‘평화적’으로 사용된 조짐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우가 빈정대듯 말을 내뱉는다. 이미 황제의 명을 받아 상장의 직위와 왕작까지 받아놓은 마당에, 겉치레가 무슨 쓸모란 말인가.


 “그동안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적어도 7만, 많게는 9만까지도 동원할 수 있을 겁니다. 황제의 보증이 붙었으니 많은 쪽으로 생각하는 게 맞겠죠.”


 “제국까지 우릴 배신할 줄이야.. 내 생각이 짧았소. 미안하오.”


 “아닙니다. 주군의 계획은 옳았습니다. 그저 주변의 영주들이 탐욕에 절은 자들이었을 뿐이죠.”


 압도적인 경제력으로 주변국을 하나씩 경제동맹에 포섭한 뒤, 정치적인 통합까지 이뤄내어 하나 된 초원을 만드는 것이 장기 계획이었다.


 이성적인 자들이었다면 적당히 통합된 초원의 고위층으로 만족하였을 테지만, 이미 지배하는 것에 중독된 자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거기에, 만약 피난민들을 쫓아낸다 한들 가짜 피난민들을 만들어 내서라도 명분을 쥐어짜 낼 것이다.


 이미 소문이 퍼진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제 잘못이 큽니다. 포타첸과 이곳 올레스니카를 두고 제국 고위층이 음모를 꾸미는 걸 미리 보고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차오르는 죄책감에 정우가 고개를 숙인다.


 ‘때’가 되면 언젠가 알려주겠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아직 다하지 못한, 내려놓지 못한 복수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루고 미뤄 자신의 ‘식구’들을 모두 불러 모아 공개적으로 조직의 해체를 발표하며 보고하자고 결심했다.


 레흐와 화해한 그날 밤, 편지를 조금 수정해 황도의 ‘식구’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러나, 남은 재산과 기반을 청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지난달에나 출발할 수 있었다.





 “괜찮소. 귀하도 구체적인 음모가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했잖소. 앞으로의 일에 집중합시다.”


 레흐가 정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위로한다. 그의 배려에 기운이 돌아오는 정우였으나, 여전히 죄책감이 마음을 찌른다.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넉넉히 6만이니.. 벌써부터 미약한 열세로군.”


 레흐가 지도를 내려다본다. 각자의 세력권과 지형이 표시된 지도 위에는, 1천 단위로 묶인 병력을 표현한 말이 점점이 서 있다.


 “숫자는 이쪽이 밀리나, 우린 더 많은 정예병을 갖췄습니다. 초원 부족들 역시 전반적으로 우릴 지지하고 있습니다. 적절한 방어전을 치르며 압박한다면, 인구와 경제력이 앞서는 우리가 더 우세합니다.”


 여전히 레흐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하다. 전투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일인지, 성인이 되자마자 깨달은 그다. 쉽사리 걱정을 놓아버릴 순 없다.


 “거기에 주군께선 뛰어난 지휘관이시잖습니까. 저 같은 특수전 요원까지 휘하에 있고요. 파괴하고 불 지르는 게 제 특기 아닙니까.”


 “어쩔 땐 나보다 귀하가 더 엇나간 농을 많이 던지는 것 같소.”


 농담 섞인 격려에 레흐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조금이나마 풀어진 분위기에 정우가 말을 잇는다.


 “제국 역시 움직이고 있습니다. 벌써 수만의 병력이 남하해 항구에 집결했다 합니다. 아마 바닷길을 이용해 이쪽으로 건너오려는 속셈이겠죠.”


 “..숨쉴 틈을 안 주는군. 설마 그쪽에까지 전쟁을 시도하진 않을 테니, 남쪽의 투란과 카르파티아와도 이미 협의를 끝냈나 보오.


 레흐의 얼굴에 잔뜩 드리운 그림자 사이로, 한 줄기의 결의가 비친다. 짧은 순간에 정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했다.


 “예, 주군. 우린 이미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번 일을 타개할 방안은 단 하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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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붉은 손 - 120 (르브셰 공성전 4) 24.06.18 5 0 12쪽
120 붉은 손 - 119 (르브셰 공성전 3) 24.06.08 7 0 11쪽
119 붉은 손 - 118 (르브셰 공성전 2) 24.06.04 7 0 12쪽
118 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24.06.01 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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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24.05.28 6 0 12쪽
115 붉은 손 - 114 (승전보) 24.05.25 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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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24.05.14 9 0 11쪽
111 붉은 손 - 110 (최초의 공화국 4) 24.05.11 8 0 11쪽
110 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24.05.04 8 0 11쪽
109 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24.04.30 9 0 12쪽
108 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24.04.26 11 0 11쪽
» 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24.04.24 9 0 11쪽
106 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24.04.20 11 0 11쪽
105 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24.04.19 11 0 11쪽
104 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24.04.16 13 0 11쪽
103 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24.04.10 14 0 11쪽
102 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24.03.31 14 0 11쪽
101 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24.03.28 13 0 11쪽
100 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24.03.22 14 0 11쪽
99 붉은 손 - 98 (막간의 이야기) 24.03.21 12 0 11쪽
98 붉은 손 - 97 (순혈당 - 6) 24.03.17 11 0 11쪽
97 붉은 손 - 96 (순혈당 - 5) 24.03.12 13 0 11쪽
96 붉은 손 - 95 (순혈당 - 4) 24.03.09 13 0 12쪽
95 붉은 손 - 94 (순혈당 - 3) 24.03.05 1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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