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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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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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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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6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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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DUMMY

 “..후우. 사방에서 우릴 노리고 있군.”


 레흐가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의 지도에 손끝을 댄다. 남쪽의 카르파티아, 그 너머의 투란까지 해역을 개방해 제국군의 이동을 관망하고 있다.


 서쪽의 실바니아, 북쪽의 류리키아 역시 아랑왕에게 암묵적인 지지를 보낸다.


 명목상으로나마 주군으로 섬기던 동방의 황제는 형제들을 베기 위해 진군한다.


 주요 세력 중, 레흐를 지지하는 세력은 단 하나도 없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이합집산을 반복하던 자들이, 이번만큼은 뜻을 모아 올레스니카를 지도에서 지우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최소 10만의 병력을 6만의 병사로 막아내야 한다. 너무나도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어떻게든 세력을 불려, 상대의 전쟁 의지를 조금이나마 줄여야 한다. 전쟁은 피할 수 없겠으나, 피해를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된다.





 “주군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에 도달하신 것 같습니다.”


 정우와 레흐가 서로의 시선을 맞춘다. 다른 국가, 세력이라면 생각지도 못한, 대격변에 가까운 해답을 떠올렸다.


 “공작령을 해체하고, 공화국을 건립하는 겁니다. 모든 영지와 영주를 철폐하고, 하나의 국가로 거듭나야 합니다. 천하의 유일한 공화국으로요.”


 레흐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인다.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휘몰아친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운명의 개척하는 곳. 그가 평생 바라마지 않던 이상향이다.


 그러나, 여러 미혹과 의심, 두려움이 그를 짓누른다. 아무리 고결하다 한들, 그 역시 한명의 사람이다.


 때론 거대한 위협에 대한 두려움도, 스스로에 대한 미혹과 의심도 들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백성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일단 공화국이 선포된다면, 대륙 전체에서 숨죽이던 공화파들이 이곳으로 모여들 겁니다.”


 반면, 정우는 실리적인 면을 들어 공화국 선포를 주장한다. 지금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주군의 꿈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이 땅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생기긴 했으나, 우선순위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이전처럼 지나칠 정도로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뿐, 그의 수단은 정도의 가장자리를 아슬아슬하게 달린다.


 “심각한 탄압을 받아 피난한 것만 20만 가까이 됐으니, 공화국 선포 이후론 적어도 60만은 이곳으로 향하겠죠.”


 정우가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 냉혹한 면이 드러나는 정우의 말에 미약한 반발심을 느낀 레흐였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는다.


 “개전까지 그래도 2달은 걸릴 테니.. 소식이 빨리 퍼지기만 하면 시간 내에 모두 도착할 겁니다.”


 그가 충성을 맹세한 것은 자신이지, 올레스니카가 아니다. 그가 자신만큼의 애정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힐난할 순 없다.





 “몇몇 공화파 영주들도 합류할 수도 있고요. 적어도 3만, 많게는 6만 병력은 차출할 수 있습니다.”


 “10만이라..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병력은 20만이 넘을 수도 있소. 여전히 2배가 넘는 차이요.”


 레흐가 마른침을 삼킨다. 20만. 그 압도적인 숫자가 마음을 무겁게 한다.


 “보급난을 이용하죠. 아무리 포타첸의 경제력 역시 막강하다 한들, 20만이 넘는 병사들에게 2년 넘도록 물자와 자금을 대는 건 불가능합니다.”


 “제국 역시 보급을 시도할 것 아니오.”


 “양면전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제국군의 기동을 포타첸을 향하도록 유도하면 됩니다.”





 “..귀하의 말을 믿겠소. 주변국이 침입할 가능성은 더는 없겠소?”


 레흐가 고개를 끄덕인다. 굳이 수단을 물어보진 않는다. 이미 전쟁에 돌입하는 것이 확정적인 이상, 인도적인 방법일 리는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까지 ‘도리’를 운운한다면 그건 이상주의자가 아닌 바보일 뿐이다.


 “공화국 선포에 타국이야 반발하겠지만.. 알게 뮙니까. 반발 이상의 행동은 없을 겁니다.”


 “공화파 탄압을 위해 잠시 모였을 뿐이라는 건가.”


 “예. 서로 뒤통수를 후려갈길 생각만 하고 있는데, 어떻게 병사를 움직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취해야 하는 길은 하나뿐이군.”


 “마음을 정하셨군요.”


 레흐와 정우가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인다. 둘 다 각자의 이유로 최선의 대안을 받아들였다.


 의심과 두려움 사이를 강철같은 의지가 관통한다.


 “그렇소. 만민을 위한, 만민에 의한, 만민의 국가를 세우는 거요. 도와주시겠소?”


 “도움을 요청하지 마시고, 명하십시오. 주군의 의지가 곧 제 의지이니. 뭐,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겠지만요. 고집 센 건 알아줘야 하는 분 아니십니까.”


 레흐가 정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곤 씩 웃는다. 형제가 없는 그였지만, ‘만약 형제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나저나, 주군께선 ‘그것’ 하나만큼은 끝까지 묻지 않으시더군요.”


 자문회를 소집하기 위해 회의장으로 향하는 레흐를 정우가 불러세운다. 그의 얼굴엔 어딘가 찬탄의 감정이 섞여 있다.


 “뭘 말이오? 나눌만한 이야기는 다 나눈 것 같소만.. 혹시 백성들의 충격 이야기라면, 괜찮을 거요. 강인한 사람들 아니오. 새로운 질서에 잘 적응할 거요.”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바쁘신 몸을 붙잡았습니다.”


 묘하게 얼버무리는 듯한 정우에게, 레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이곤 방 밖으로 나간다.


 정우가 감탄을 느꼈던 이유는, 레흐가 ‘내 직위나 지위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흐는 타인을 섬기는 자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지키는 대상을 믿지 않는 타락’을 겪지도 않았다.


 진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믿고, 자신의 지위는 사람들의 심장에 희망의 불씨를 피우기 위한 땔감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투표가 마감되었습니다! 표를 집계하겠습니다. 참관인분들은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1달 뒤, 이전에 세나트가 열렸던 평원에 그 10배나 되는 사람이 모였다. 새로운 ‘공화국’의 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레흐는 21세 이상의 성인 모두가 참여하는 투표를 원했으나, 시일이 급박하다는 만류에 결국 선거인을 뽑는 간접 투표를 실시하기로 정했다.


 비록 전운이 고조되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공격해올 기미는 없다.


 아랑왕은 아직 동원과 훈련, 편제 정비를 끝내지 못했다.


 거기에 을파소는 마침 바다에 폭풍이 몰아쳐 출발이 지연된 상태다. 레흐를 포함한 올레스니카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레흐와 정우는 이 시간을 최대한 소중히 사용하기로 했다. 새로운 체제를 정착시킬 시간으로.


 레흐는 직접 전 올레스니카를 순회하며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처음엔 그들이 경애해 마지않는 공작이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에 만인이 눈물 흘렸다. 몇몇은 울다 지쳐 그 자리에서 쓰러질 정도였다.


 퇴위하려거든 자신을 베고 가라는 자들마저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레흐가 간곡한 부탁과 함께 내건 하나의 ‘조건’을 듣고는 반대를 철회했다.


 설득해야만 하는 건 백성들뿐만이 아니었다. ‘군주가 없는 국가’라는 개념은 공화파 인사들 사이에서도 주류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귀족과 군주의 영향력을 줄이고 평민의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길 바랐다. 그들 역시 레흐의 퇴위를 거부했으나, 결국 설득되었다.





 정우와 예현을 포함한 자문회 의원들과 세나트 의원들, 공화파 지식인들은 새로운 국가의 기본이 될 법안을 작성했다.


 그 법안의 첫머리는, ‘만인은 평등하며,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람으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였다.


 거기엔 신적인 존재와의 약속도, 지배권에 대한 약속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람과 사람 간의 약속만이 존재했다. 서로를 해치지 않고, 서로를 동등한 사람으로 존중하겠다는 약속이.


 사람이 약속을 나누기 시작한 지 수천 년, 드디어 유일하면서도 확고한 하나의 법이 바로 섰다.


 새로 건립된 국가의 이름은 ‘볼노시치’ 공화국으로 정해졌다. 이것만큼은 레흐의 의견이 강하게 들어갔다.


 ‘볼노시치’는 옛 올레스니카 말로 ‘자유’라는 뜻으로,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의지를 다 하길 바라는 레흐의 염원이 담겼다.





 “집계가 끝났습니다. 당선인을 발표하겠습니다.”


 단상 위의 참관인이 웅성거리던 천막의 분위기를 단번에 가라앉힌다.


 “각.. 아니, 카쉬파의 아들 레흐가 볼노시치 공화국의 1대 통령에 당선됐음을 선언합니다!”


 레흐가 한숨을 쉬며 단상에 오른다.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으나, 바라지는 않았다.


 그가 공화국 창건을 위해 내건 ‘조건’은, 자신이 통령 후보로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지도자라는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나 싶었다. 될 수만 있다면 용병과 같은 신분으로 참전해 전쟁 이후 모두 털어버리고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애원하는 듯한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보이는 저들의 안녕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자유가 소중한 만큼, 자신 역시 저들의 자유를 지켜줘야만 한다. 폭군의 압제에 맞서서 말이다.





 “볼노시치의 1대 통령으로서, 향후 5년간 공화국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합니다.”


 레흐가 ‘검의 언덕’에 새로운 검 한 자루를 더 꽂아 넣는다. 서약에서 해방되자마자, 새로운 서약이 그 자리를 채웠다.


 5년만 참는다면 이 이후론 그가 했던 모든 서약이 사라지는 것이 그에겐 그나마 위안이다.


 ‘지도자’로서의 레흐와 ‘사람’으로서의 레흐가 이토록 충돌한 적은 성인이 된 이후론 처음이었다.


 “통령은 만인의 시종일지니, 설령 제 파멸이 기다린다 해도 공화국을 섬기겠습니다. 이 검에 제 맹세를 바칩니다.”


 “통령 만세! 공화국 만세!”


 “사슬을 부수는 자, 만세!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을 사람들을 위하여!”


 “자유여! 평등이여!”


 천막 안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축복의 말을 외치고, 그 소리에 바깥의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레흐와 그의 이상을 칭송한다.


 이날 레흐는 ‘해방자’, ‘희망을 주는 자’ 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봐요! 저기가 볼노시치예요! 도착했어요!”


 “드디어.. 자유다.”


 “억압받고 사느니, 자유인으로 죽겠어.”


 정우가 상인 겸 요원들을 이용해 공화국 수립 이전에 선제적으로 소문을 퍼트린 결과, 서부 왕국의 공화파란 공화파들은 모두 올레스니카로 향했다.


 몇몇 도주 노예, 농노들이나 죽지 못해 살아가던 사람들까지 움직인 덕택에, 몇몇 도시들은 사람이 줄은 것이 확실히 체감이 될 정도였다.





 그렇게 손 위에 올라간 단검 같은 평형을 유지한 지 2달여, 공화국군과 아랑왕군, 제국 원정군이 격돌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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