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하! 결국 누더기공 그자가 한낱 노예로 전락했군. 지배하기 위해서 태어난 자가 다른 자들을 섬기지 못해 안달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어. 그렇지 않으냐, 루카스?”
갑주를 갖추고 말 위에 탄 ‘아랑왕’ 안나가, 옆에서 나란히 말을 달리는 아들에게 말을 건넨다. 말이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눈 패이는 소리가 울린다.
흉갑과 견갑 위에 새겨진 늑대 머리 장식 위로, 흐릿하게 서리가 앉았다. 초원의 겨울은 길고 혹독하다. 봄에 들어선 지금도 새벽녘엔 서리가 앉을 정도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위대해지도록 이끄는 것은 귀족의 숙명이자 책무인데, 그것을 버리다니 무책임하기까지 하군요.”
루카스 역시 그의 긴 금발을 쓸어 넘기며 어머니의 의견에 동조한다.
열다섯 무렵부터 안나를 따라 전장을 누빈 그의 얼굴에선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다. 안나의 젊은 시절이 그대로 나타나는, ‘젊은 늑대’ 그대로의 모습이다.
안나는 우수한 스승과 교육 외에는 아무런 특혜도 그에게 제공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랬듯, 고난과 역경을 통해 아들이 성장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시동과 종자 과정부터 차근차근 기틀을 닦은 그의 무력과 통솔력은 또래의 범주를 한참 벗어났다.
안나의 대전사마저 그에게 승리를 따내는 것에 애먹을 정도의 무력과, 2000명의 군사를 빈틈없이 통솔할 수 있는 통솔력을 갖추었다.
“어머님, 부디 선봉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어머님께 건방진 ‘통령’의 머리를 바치겠습니다.”
안나가 젊었을 적 보이던 패기와 자신감마저 쏙 빼닮았다. 그런 만큼, 안나의 마음속에 자부심과 불안감이 동시에 피어난다.
처음엔 어미의 품속을 벗어날 줄 모르던 아이가, 이렇게도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누굴 닮아서 저리도 잘생겼는지 모를 정도로.
그런 아들인 만큼, 저 아이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당하는 것은 반드시 막고 싶다. 성을 지키는 남편 역시 ‘아들을 잘 지켜달라’라고 신신당부했다.
“..생각해보마. 그것보다, 마음과 몸이 너무 들뜨게 두지 말거라. 감각이 무뎌진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직 ‘르브셰’까진 3시간은 더 걸린다. 생각을 가다듬거라.”
늑대공이 선택한 전략은 국경 너머의 가장 큰 도시인 르브셰를 점거한 뒤, 그곳을 거점 삼아 인근의 통제력을 확보하는 것이 1단계다.
확고한 기반을 다져둔 뒤, 제국군과 공화국군이 충돌하여 전력을 소비한 뒤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도 충분하다.
제국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아랑왕군은 배후에 포타첸이라는 든든한 본거지가 버티고 있다. 먼저 전투에 나서야만 하는 쪽은 제국군이다.
“예. 어머님. 그럼, 그동안 공성 전략을 검토하고 있겠..”
“습격입니다, 전하! 후방이 물어뜯기고 있습니다!”
루카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급보를 알리는 전령의 말이 그의 말을 끊었다.
“적어도 1천은 되는 숫자입니다! 지금 당장 지원이 필요합니다!”
공화국의 편에 선 초원의 부족들이 진군하는 대열의 후방을 기습했다.
“끄아아악!”
“아아아악!”
1천명의 경기병이 흩뿌리는 화살과 총탄의 비가 거침없이 보병 대열을 강타한다. 대부분 장창병이나 총병인 점이 반격에 발목을 잡는다.
장창과 총병의 탄약은 마차에 실려 운반 중이고, 그들이 가진 무장이라곤 짧은 검 한 자루와 조그만 방패가 전부다.
조금의 화력이라면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나, 일사불란이 쏟아지는 화망을 견디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마차 뒤로 숨어! 이 멍청이들아! 마차 뒤로 숨으라고!”
부사관들이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다독여 방어를 시도해보지만, 이미 무너진 전열과 사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흐트러져 이리저리 달려 나가는 병사들은 서로를 밀치거나 끌어당기기 바쁘고, 몇몇 ‘감’이 좋은 병사들 정도가 시신을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기지를 보인다.
전형적인 오합지졸의 모습이나, 그들을 탓할 순 없다. 징집된 농노들이 당장 무리 지어 도망치지 않는 것만 해도 이미 그들의 한계를 다했다.
“목을 따라! 목을 따! 말발굽으로 짓밟아! 초원의 분노를 보여줘라!”
“칸을 위해! 카간을 위해! 부족의 영광을 위해!”
몇몇 기병들은 곡도와 창을 뽑아들고 대담한 돌격을 실시한다. 무너진 대열은 그들을 전혀 저지할 수 없다.
이리저리 내달리는 병사들이 하나씩 쓰러지고, 하얀 눈 위로 붉은 피가 칠해진다.
습격이 시작되고 단 10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써 300이 넘는 병력이 도륙당했다.
하나가 쓰러질 때마다, 화살과 탄약을 모두 소모한 기병 하나가 대열 안으로 들어와 살육을 시작한다.
“살려줘! 살려달라고!”
“..엄마..! 아빠..!”
쓰러지는 병사들이 외치는 단말마가 눈 덮인 초원 위로 메아리친다. 이미 패배의 순간이 눈앞에 와버렸다.
습격이 끝난 부족민들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약탈하고, 챙기지 못한 것은 불을 질러 철저히 파괴할 것이다.
“제기랄! 어쩐지 조용하다 싶더라니..! 어머님, 제 휘하 기사들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후방의 징집병들이 동요해 이탈할지도 모릅니다!”
루카스가 고삐를 강하게 죄곤 말머리를 뒤로 돌린다. 그의 움직임에 호응하듯 곳곳의 기사들이 대열을 빠져나온다.
이곳에 있는 본군은 약 2만. 나머지 병력은 진격로를 따라 흩어져서 진군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소탕전을 벌이기엔 부족한 병력이다.
단순한 습격에 패배하는 일은 없겠으나, 이탈한 징집병들로 인해 본군이 취약해지거나 전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다.
“아니, 갈 필요 없다.”
그러나, 안나가 루카스를 침착한 어투로 제지한다.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엔 당혹감의 흔적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다.
“저들 없이는 공성에 나설 수 없습니다! 보병 방진은 어쩌고요?! 전쟁은 머릿수로 하는 것 아닙니까!”
당황한 루카스가 어조를 높인다. 당혹감에 어쩔 줄 모르는 그를 본 안나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간다. 아직 많이 배워야만 하는 아이다.
“내가 그걸 모를 거라 생각하느냐? 난 네가 지샌 겨울보다 더 많은 전장을 누볐다. 네가 내 배 속에 있었을 때에도 적의 목을 베었단 말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굳이 티를 내지는 않는다. 대신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엄히 말한다.
“받아라. 내가 처음 고안한 전술이니, 아들인 네가 첫 신호를 보내는 것도 괜찮겠지. 아래에 사람이 없는 곳으로 쏴라.”
안나가 루카스에게 폭죽을 건넨다.
“해가 뜬 동안에는 폭죽의 빛이 보이지 않습..”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조급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표정을 한 루카스가 묻는다.
“묻지 말고 줄을 당겨라. 사령관 명령에 장수가 불복하게 되어있나?”
루카스의 물음을 안나가 도중에 끊어버린다.
그녀의 눈빛이 급격히 매서워진다. 말투 역시 조금이나마 나긋함이 느껴지던 것에서, 엄정한 사령관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예! 전하.”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에 루카스가 의문을 거두고 ‘명령’을 실행한다. 두려움이 아닌, 유능한 지휘관을 신뢰하는 부하로서의 신뢰가 그를 움직인다.
펑!
폭죽의 줄이 당겨지자마자, 굉음과 함께 하늘에 밝은 빛이 수놓아진다. 여느 폭죽과 똑같다.
“..!”
빛이 순식간에 사라지지 않고, 아주 먼 곳까지 타는 듯한 붉은 빛을 10초씩이나 내보였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늑대 무리’ 전술이다. 너도 내게 배웠으니 잘 알것 아니냐.”
‘늑대 무리’. 안나가 처음 전장에 나갔을 때 고안해, 지금껏 무수한 승리를 안겨다 준 전술이다.
소규모 부대로 쪼개져 전선 사이사이를 채우다, 적의 취약점이 발견되는 순간 번개같이 집결하여 적을 포위, 분쇄하는 것을 목표한다.
숙련도가 낮은 징집병의 약점은 커다란 대열로 만들어 최대한 줄이면서, 전투에 익숙한 정예병의 움직임은 극대화하는 것을 노렸다.
“이런 규모에선 사용할 수 없는 전술이 아니잖습니까?”
안나의 말에 루카스가 경악을 숨기지 못한다. 7만의 대군이 정교한 기동을 취한다니,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다.
“그래. 불가능하지. 재빠른 기병이 각 대열의 선두에 서고, 발전된 신호법이 없다면 말이야.”
안나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대답에 루카스는 다시 한번 어머니의 전술적, 전략적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으레 대열의 중간에 위치하는 기병대가 대열의 선두에 서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 때문이었다.
대열을 분할해 행군 난도를 낮춤과 동시에, 기습해 들어오는 적을 격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우리가 ‘우두머리 늑대’입니까? 전하.”
“그래. 그래서 본군에 징집병 비중을 늘린 거다. 선두의 취약점을 보이기 위해서 말이다. 미끼를 보여야 물지 않겠느냐.”
경기병이 주축인 초원 부족들은 결국 대열과 대열 사이의 취약점을 공략하기 마련이다. 그편이 가장 합리적이고, 높은 전과를 노릴 수 있다.
“내가 설마 네게 깨달음을 줄 목적으로만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했느냐? 무의미한 죽음만큼 손해인 건 없다.”
“적 병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시간이었군요.”
“폭죽의 빛을 보았으니, 근처 대열의 선두에서 기병대가 출격할 거다. 금방 처리하겠지.”
“징집된 농노 1천과 숙련된 유목민 전사 1천을 맞바꾼다라. 굉장한 이득입니다.”
“패잔병 차단은 우리 쪽 기병대가 맡는다. 그러니 네게 가지 말라고 했다. 혹여라도 적이 탈출해 우리 전술이 새 나가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냉정하면서도 효과적인 전술이다. 안나의 적극적인 인구 육성책으로 징집할 농노는 포타첸에 차고 넘친다.
반면, 부족들에겐 전사 하나하나의 손실이 뼈아프다.
자신의 강점은 최대한 활용하면서, 단점은 철저히 숨긴다. 전쟁과 전투의 기본에 충실한 것이 그녀를 서부 왕국 제일의 지휘관으로 만들었다.
“..커..헉.”
“..빌어먹을..자식들..크흑!”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습격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본군을 지원하러 온 기병대에게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안나의 예측대로 습격자들이 폭죽의 빛을 확인했을 시점엔 지칠 대로 지쳐, 퇴각할 즘에는 대열에 돌진했을 때의 속도의 절반도 낼 수 없었다.
지친데다 숫자에서 밀리는 경기병과 쌩쌩하면서 숫자에서 앞서는 중기병. 어느 쪽이 승리할지는 명백했다.
“더러운 침략자 년. 네년에게 할 말은 없다. 어서 죽여라. 공화국의 통령이자 초원의 카간이 네년을 기필코 죽일 것이다.”
그리고, 부족을 이끌던 칸이 생포되어 안나의 앞으로 끌려왔다. 그의 얼굴엔 전투의 상흔이 가득하다.
“이게 어느 안전이라고! 예를 차려라!”
“됐다. 인사치레나 나눌 사이는 아니니. 그나저나, 정말로 아무 말도 안 할 건가?”
그를 잡아 온 장수가 칸을 무릎 꿇리지만, 안나가 부드러운 손길로 만류한다.
“없다! 구차하게 굴지 말고 죽여라!”
그의ㄴ 말이 끝나자마자, 안나가 차고 있던 검을 번개같이 뽑아 칸의 가슴을 꿰뚫는다. 주변의 그 누구도 반응하기 어려운 속도였다.
“커..헉.”
칸이 흰 눈밭 위로 쓰러지고, 그의 몸에서 온기가 사라져간다.
“유감이군. 물어보고 싶던 게 많았는데.”
안나가 검을 휘둘러 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다시 말 위에 오른다. 압도적인 존재감에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한다.
“다시 진군한다! 꾸물거리지 마라! 정복할 땅이 우릴 기다린다!”
안나의 명령이 차가운 공기를 뚫고 메아리친다. 온 초원을 피로 물들일 명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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