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각하. 하룬 부족의 전사들이 전멸했습니다. 습격에 참여했던 자 중, 단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훈련장에서 병사들의 훈련 상태를 확인하던 레흐에게 비보가 날아든다.
출진 직전의 마지막 점검이었던 만큼,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목소리를 잔뜩 깔고 속삭인다.
아무리 동맹에 가까운 세력이라 하더라도, 1천이나 되는 병사가 괴멸했다는 소식은 사기를 떨어트릴 것이 자명하다.
“..알겠소. 포타첸 국경 인근에서의 후방 교란은 불가능해졌군.”
레흐가 애써 평정을 유지한 표정을 드러내 보인다. 머리는 여전히 냉정을 유지한다. 그러나, 심장이 터질 듯 괴롭다.
사랑하는 이 땅의 형제자매들이 침략자의 손에 죽은 것에 심장이 송곳으로 찔리는 듯 아프다. 예상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죽음은 죽음이다.
단독행동을 하지 못하게 강압적으로라도 제지해야 했으나, 영토를 침범한 데에 대한 복수를 갈망하는 그들의 적개심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함께 전략을 의논한 정우나 부관 역시 경고했었다. 아랑왕과 같은 유능한 지휘관에겐 잔재주는 통하지 않고,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북상하는 제국군이 15만. 르브셰를 향하는 아랑왕군이 8만. 우리에겐 10만뿐이군. 그마저도 당장 기동할 수 있는 병력은 3만뿐이고.”
레흐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훈련의 소음에 묻혀, 그의 말은 주변에 퍼지지 않는다.
공격전에 대부분의 병력을 투사할 수 있는 제국군과 아랑왕군과는 다르게, 공화국군은 더 적은 숫자로 방어전을 수행해야 하는 입장이다.
성과 도시, 요새 등의 요충지에 병력을 분산해 배치한 탓에, 주도권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정우, 귀하의 무운을 비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건 귀하의 계책뿐이오.”
레흐가 응원의 혼잣말을 읊조린다. 정확히는 정우가 아닌, 자신을 향한 응원에 가깝다.
단 하나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건 자신을 향한.
“뛰어라! 뛰어! 전속력으로 뛰라고!”
대열의 가장 바깥 측에서 말을 달리는 정우가 기병대를 재촉한다. 2천의 기수가 말에 박차를 가해 전속력으로 내달린다.
하나같이 흉갑조차 챙겨입지 않아, 최대한 경무장을 취했다. 그에 반해 말의 덩치는 중기병의 말과 비슷할 정도다.
지축을 울리는 기수들의 얼굴엔 비장함이 감돈다. 절대로 실패할 수 없다는 비장함이.
그들 앞에는 거대한 규모의 수송대가 있다. 500에 달하는 수레가 15만의 대군이 먹을 식량을 운송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대열이 눈 덮인 초원들 가로지르는 모습은, 어딘가 경외심이 들 정도로 장대한 광경을 연출한다.
호위하는 병력마저 ‘황제의 분노’가 포함된 2만에 달해, 보통의 전력이라면 공격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대열이다.
보통의 전력이라면 말이다.
“적의 기습이다! 나팔을 불어라!”
돌격해오는 기병대를 발견한 경계병이 동료들에게 고함친다. 초원의 야트막한 능선 뒤편에서 돌격하는 통에, 반응이 늦어버렸다.
하나 그 역시 정예병인 듯, 취약한 상황에 급습당했음에도 대응할 수단을 빠르게 생각해냈다.
부우..!
그러나, 나팔 소리는 끝까지 뻗어나가지 못했다. 정우가 쏜 탄환이 나팔수의 머리를 꿰뚫었다.
“일제 사격! 일제 사격!”
장전해둔 예비 총으로 바꿔 쥔 정우가 사격 명령을 내린다. 거리는 약 100보에, 호위병들이 아직 방어 진형을 갖추기 전이다. 최적의 순간이 왔다.
“일제 사격! 일제 사격!”
그의 명령을 들은 기수가 깃발을 휘둘러 기수들에게 신호를 전달한다.
직선으로 내달리는 거대한 말 위의 기수들이 나란히 총구를 겨누는 모습은, 숙련되지 않은 병사들이라면 즉시 도주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압감을 내보인다.
“쏴라! 쏴!”
“공화국을 위하여! 초원의 카간을 위하여!”
부족 기수들과 농경 기수들이 뒤섞인 기병대가 일시에 화망을 투사한다. 납탄의 폭풍이 호위대를 덮친다.
탄환이 매섭게 호위대를 덮쳐, 수많은 병사가 피를 흘리며 거꾸러진다.
“커헉! 황제 폐하께서 죽음을 명하지 않으셨나니, 쓰러질 수 없다! 형제자매들이여, 일어서라!”
“크..흑! 물러서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물자를 본대에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상대 역시 강인한 전투 의지를 갖춘 정예다. 수천발의 탄환이 그들의 대열을 꿰뚫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매캐한 폭연 사이로 ‘황제의 분노’ 대원들이 가장 먼저 장총을 짚고 일어섰다. 피로 물든 그들의 육체조차 의지를 꺾지 못했다.
“..반격 준비! 반격 준비!”
“총을 장전해! 장창 앞으로! 방진을 짜!”
하급 지휘관들과 부사관들 역시 총탄에 관통당한 자들이 수두룩함에도, 할 수 있는 최선의, 그동안 수없이 연습해온 대응을 망설임 없이 취한다.
“장창 앞으로! 장창 앞으로!”
명령에 따라 순식간에 모여든 장창병들이 순식간에 창벽을 만들어낸다. 만약 그 안으로 사과를 던진다 해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밀도다.
“포기하지 마라! 경무장한 적들이다! 장전만 완료되면 즉시 제압할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을 지휘하는 지휘관 역시 제국에서 끈질긴 전술로 유명한 ‘적암백’ 건흥이다.
단순한 일제사격 한두 번으로 충격을 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기병대 대기! 총병의 일제사격 이후 적들을 추격한다!”
건흥의 명령은 매우 정석적이고 깔끔하다. 상대의 전력은 근처의 성에서 끝까지 긁어모아야 3만, 현실적으론 1만이 안 될 것이다.
패배할 위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격해온 상대의 전력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물량의 이점을 살려 위협 그 자체를 분쇄해야 한다.
총기병의 일제사격 기회는 많아야 2번. 그 2번의 사격을 견디고, 일거에 몰아쳐 적의 주력을 격파할 속셈이다.
“..! 움직임이 변했어. 계획대로야.”
기병대가 분위기를 바꿔 돌진을 준비하는 것이 정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이다. 아직은 최고의 시점이 아니다. ‘때’를 기다려야 한다.
“장전 완료! 장전 완료!”
창벽 뒤에서 병사들의 외침이 크게 울린다. 탄약 배분부터 장전까지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사격 준비! 사격 준비! ‘황제의 분노’여, 제국의 아들딸들이여! 저들에게 폐하와 제국의 분노를 쏟아내라!”
건흥의 명령에 맞춰 총병들이 창벽 안으로 파고든다. 장창병들 역시 일사불란이 움직여 그들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
“지금이다! 후퇴! 말머리를 돌려라! 집결지의 깃발을 올려라!”
‘때’가 왔다. 정석적인 전략의 의표를 찌를 ‘때’가.
정우의 명령에 나란히 달리던 신호수가 커다란 우는살을 하늘로 쏘아 올린다.
화살이 울부짖는 날카로운 소리가 초원에 울리고, 언덕 너머로 깃발이 높게 선다.
“뛰어! 뛰어! 안 뛰는 녀석은 벌집이 될 거다!”
두발째 사격을 퍼붓던 기병들 모두가 정우의 명령에 말머리를 돌린다.
아슬아슬하게 상대가 반격을 시작하기 직전에, 장전해둔 2정의 권총을 모두 비울 수 있었다.
상대와의 거리는 해봐야 50보. 이 거리에서 집중 사격을 그대로 얻어맞았다간 그대로 몰살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피하기 위해 정우는 휘하 기병들에게 가속과 선회 훈련을 강조했다.
어차피 빠르게 돌진해 총탄을 비우는 것이 다인 전술이다. 조준 훈련에 쓰는 시간은 무의미하다.
처음부터 정면으로 붙어줄 생각 따위, 그에겐 없었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적하며 진을 빼듯, 천천히 상대의 숨통을 조이면 될 일이다.
“쏴라! 화망을 만들어라! 폐하께 반역하는 무뢰배들을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탕! 탕!
사격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우레와 같은 총성이 초원에 메아리친다.
모두가 ‘황제의 분노’의 장총으로 무장한 것은 아니지만, 화력을 숭상하는 제국군인 만큼 일반 병사들의 화력 역시 타국을 가볍게 앞선다.
“커헉!”
“아악! 팔이!”
발사된 탄환이 기병대의 대열을 꿰뚫는다. 몇몇은 급소를 맞아 즉사했고, 일부는 총탄에 맞은 부위를 부여잡고 말을 달린다.
즉시 회피기동에 들어갔음에도 사상자가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용맹이 총탄을 막아주는 일 따위는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법이다.
“..쿨럭! 아무래도..난..여기..까진 것 같다.. 즐거웠다.. 멍청아.”
“제기랄, 밀로! 카탸! 죽지 마!”
같은 빵을 쪼개 먹던 동료들의 죽음에 병사들의 마음이 흔들린다. 아무리 죽음을 ‘각오’했다 하더라도 직접 마주할 때의 충격은 다르기 마련이다.
“멈추지 마! 멈추는 순간 죽는다! 동료들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 생각인가?!”
그러나,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우의 일갈이 그들의 정신을 돌려놓았다. 그래, 함께 이 땅을 지키기로 동료들과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몫까지 살아나가야만 한다. 그들의 몫까지 힘써 이 땅 위의 사람들을 지켜내야만 한다.
여기서 죽어버렸다간 마음속의, 기억 속의 동료마저 죽어버린다.
“장창병 전진! 총병 대열 바꿔! 저들을 압박한다!”
건흥의 명령에 병사들이 일사불란이 공격형 진형으로 대열을 재구축한다.
수레를 호위하던 병력이 하나도 빠짐없이 진형에 합류해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한다.
“장창병 전진! 창벽 앞으로!”
“1, 2열 후퇴! 3, 4열 전진!”
철저한 규율 아래 발맞춰 전신하는 그들의 모습에선 사람의 단결력이 얼마나 강력해질 수 있는지가 보인다.
그들 역시 몇몇 동료를 잃었고, 이번 침공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 옆에 선 동료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그들을 움직인다. 그동안 한솥밥을 먹은 형제자매를 잃고 싶지 않다는 갈망이 모든 것을 앞지른다.
결국 그들 역시, 전쟁이란 불행한 비극의, 뒤틀린 광기의 피해자들이다.
“중기병 돌격! 경기병대는 언덕의 좌우를 차단해라! 패잔병이란 패잔병은 모조리 추격해라!”
모여든 1천 500기의 기병이 건흥의 신호에 맞춰 공격을 개시한다. 이번에도 정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중갑과 기병창을 갖춘 중기병들이 적 기병대를 분쇄하고, 보병대는 앞으로 나가 아직 보이지 않는 적 보병대를 견제한다.
갑옷 없이 기병도와 권총 한 자루씩만 휴대하는 경기병들은 패잔병의 추격을 맡아 재기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빈틈없으면서도, 확실한 전술이다.
기병 전력이 상대에 비해 열세라는 약점 정도는 우월한 훈련도와 전의, 물량으로 충분히 감추고도 남는다.
“지금이다! 보병대 사격 개시! 돌진을 차단해!”
아니,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 기병대를 추격하던 중기병대가 언덕 능선을 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언덕 너머에 숨겨져 있던 2천 보병대의 일제사격이 제국군 중기병대를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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