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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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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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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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DUMMY

 “엄호할 테니까 연습했던 대로 흩어져! 빨리! 늦는 녀석은 몸에 바람구멍이 날 거야!”


 유나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대열을 해체하는 병사들을 엄호한다.


 두 진영 사이의 거리는 약 500보. 제대로 된 명중률을 기대할 순 없다. 다만, 이어지는 총성은 적의 발을 느리게 만들기엔 충분하다.


 직접 키운 호위대 역시 그녀를 따라 탄환을 퍼붓지만, 30초에 1발을 쏘는 유나의 실력엔 미치지 못한다.


 “대열별로 모여라!”


 “움직여! 어서!”


 각 대열의 대장들이 깃발을 높게 들고 병사들을 모은다. 올라간 깃발은 10개. 150명의 병사가 빠르게 흩어져 작은 집단을 이룬다.


 10배는 되는 대군이 함성을 내지르며 진군한다. 자신들보다 훨씬 우월한 장비와 기량을 갖춘 적이 다가오고 있다.


 그들이 일시에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지축이 울리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갑옷과 무기들은 흡사 커다란 강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정우의 유격대에는 아직 사기가 흔들리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유나와 정우에 대한 신뢰와 중기병대를 격파한 고양감이 그들을 지탱한다.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란 근거 없는 희망 따위, 그들에겐 없다. 그저, 제 죽음이 헛되지 않으리란 확신을 가질 뿐이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싸울 이유는 충분하다.


 고향을, 고귀한 신념을, 무엇보다도 옆의 동료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있다.





 “뭐야? 왜 흩어지는 거야?”


 “우리도 쫓아가야 하나?”


 “아직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어. 일단 마지막 명령대로 진군한다.”


 방진전에 들어갈 것이라 생각한 제국군 보병대에 혼란이 퍼진다.


 적어도 3분 안에는 접전에 들어갈 것이라 생각해 장전해둔 총을 적을 향해 겨누고 있었고, 장창병들 역시 앞으로 창대를 내밀고 있었다.


 사기가 떨어질 법한 일은 아니나, 진격하는 발걸음을 잠시나마 늦추기엔 충분했다.





 “적들이 흩어집니다. 각하,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부관이 ‘적암백’ 건흥에게 지시를 요청한다. 그 역시 이런 전술은 처음 겪는 일이다.


 비슷한 일이라고 해봐야, 초급 장교 시절 도적들을 토벌할 때 유격전을 치른 것 정도다.


 1천이 넘는 규모로, 그것도 회전에 나설듯한 움직임을 보이다 갑자기 산병전을 진행한다는 전술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


 건흥 또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침묵을 지킨다. 오히려 충격은 그에게 더욱 크게 다가왔다.


 뼈대 있는 귀족 가문인 그는 처음부터 대규모 병력을 통한 소모전만을 경험해왔고, 그것에 익숙해졌다.


 지휘관으로 처음 이름을 알린 전투에서조차 수많은 피로 확실한 승리를 거둬, 전장인 바위 평원이 붉게 물들어 ‘적암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렇게 산병전 투성이인 전장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다. 그에게 있어 전장이란 화력과 무력의 힘 싸움 뿐인 곳이었다.





 “각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대로 전진합니까?”


 부관의 채근에 건흥이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익숙하지 않은 전장이라 한들, 그 역시 유능한 지휘관이다.


 짜증이나 당혹감 같은 사적인 감정은 일단 접어두고, 대안을 생각해내야만 한다.


 중기병대는 전멸, 경기병대는 적 경기병대의 시선을 돌리느라 바쁘다. 기동력의 우위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를 똑같이 흩어져서 추격한다면 깔끔하게 각개격파 당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모루와 망치’에서 ‘망치’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부대를 나눈다. 내 본군은 상대의 본진을 점령해 보급을 막는다. 귀관은 5천을 이끌고 적 경기병대를 차단하도록.”


 그렇다면 ‘망치’를 새롭게 얻거나, 상대의 ‘망치’를 못쓰게 만들면 된다.


 상대가 아무리 최대한 탄약을 챙겨서 물러섰다 한들, 갖고 있을 법한 탄약엔 한계가 있다.


 점령한 본진의 상자나 마차, 수레를 이용해 임시 방어벽을 만든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이미 우익이 포위를 위해 옆으로 크게 벌어졌으니 그들을 데려가겠습니다. 적 경보병의 공격은 무시합니까?”


 “아군 경기병대와 근접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흩어지는 순간, 바로 신호를 줘 본군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부터 ‘정리’하도록 하겠다.”


 “제 별동대가 임시 방벽이 되어서 적의 기병대를 막아내고, 아군 기병대는 그대로 적 보병대에게 돌격. 알겠습니다.”


 “그래. 적의 전술을 그대로 쓰겠다는 거다. 하나씩 붕괴시키기만 한다면, 얼마 안 가 승리를 손에 거머쥘 수 있다.”


 그의 판단은 지극히 정석적이다. 단순히 수가 많다는 발상에 사로잡혀 무리한 진격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아군의 강점은 유지하면서, 빼앗긴 주도권을 되찾아오면 되는 것이다.


 “좌익에서 3천을 떼어 적 보병대를 추격도록 하겠다. 귀관의 기동이 더 편해지도록 말이야.”


 “‘미끼’입니까?”


 “희생 없이 승리를 쟁취할 순 없는 법이다. 뭐, 그래도 큰 피해는 입지 않을 거다. 다들 정예병인 이상,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만큼만 움직일 테니.”





 “흩어졌군. 계획대로야. ‘시간’이 안 맞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운이 좋아.”


 말을 달려 적 경기병대를 추격하던 정우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2천이나 되는 기병이 질주하며 나는 말발굽 소리가 넓게 메아리친다.


 다들 정신이 나갔냐며 놀랄 정도로 도박성이 짙은 계획이었지만, 위험 없이 ‘사냥’에서 성과를 거둘 순 없다. 그것이 제국군같이 위험한 사냥감이라면 더더욱.


 “무슨 ‘시간’ 말씀이십니까?”


 그의 옆에 나란히 말을 달리던 기수가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나름 정우의 부관 역할인 그도 구체적인 전투 계획은 전달받지 못했다.


 “보병대가 본진을 버리고 3분은 됐으니.. 이제 7분 뒤면 알게 될 거다. 일단 적 기병대 추격에 집중해. 아슬아슬하게 권총 사거리가 닿지 않는 거리로.”


 “정말로 싸움은 걸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우리가 저놈들보다 2배는 되는데요. 지금 싸움을 걸지 않으면 5분 안에는 보병대와 합류할 겁니다.”


 기수의 말에 정우가 미간을 찌푸린다. ‘목표’를 헷갈리는 동료는 그리 달갑지 않다.


 “저놈들을 쓸어내봤자 사상자나 포로만 좀 더 추가하고 끝날 거야. 저놈들이 버티기 시작하면 우린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니까.”


 “..!”


 정우의 말에 기수가 드디어 깨달았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내가 산속에서 맹수를 사냥하면서 배운 건데, 강한 놈들일수록 몸을 사려. 상대를 확실히 잡아낼 수 있다는 ‘확신’없이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지.”


 정우가 고개를 돌려 뒤에 따라붙은 적 별동대를 바라본다. 그래. 이대로 계속 쫓아와라. 저들이 다가올수록, 계획의 성공도 앞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런 놈들을 끌어낼 땐 ‘허상’을 보여줘야 해. 자기가 더 유리한 쪽에 있다는 허상을. 그래야 내 덫 안쪽으로 계속해서 밀어 넣을 수 있거든.”


 “적의 기병대가 ‘허상’이군요.”


 “맞아. 저 녀석들이 있어야 유의미한 승리가 가능하니까. 시간에 쫓기는 건 오히려 적 쪽이야. 우리가 아니라.”





 “상자를 쌓아! 마차랑 수레를 원형으로 둘러쳐!”


 “빨리 움직여! 늑장 부리면 총알이 날아온다고!”


 야트막한 언덕을 뒤에 끼고, 정우의 유격대가 놓고 간 물자를 사용해 제국군이 급조 거점을 구축한다.


 바쁘게 수레와 마차를 분해해 판자로 만드는 병사가 있나 하면, 판자와 상자를 이용해 가벽을 지어내는 병사도 있다.


 8천이 넘는 병력이 몸을 숨길만한 공간을 만들기엔 턱없이 부족한 물자였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엄폐물이 완성되었다.


 “빌어먹을. 10년씩 복무하면서 이번만큼 난장판인 적은 처음이야.”


 “동감이다. 이번에도 대검으로 멱을 따거나 총으로 머리통에 구멍을 뚫다 보면, 나나 전투나 둘 중 하난 끝날 줄 알았는데.”


 가벽의 조그만 총안으로 적을 감시하며, ‘황제의 분노’ 대원 두 명이 투정 어린 대화를 나눈다.


 황제의 근위대이자 최정예라는 자부심이 강한 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자신들이 제대로 쓰이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싸우면 싸울수록 수렁에 빠지는 것 같다. 느낌이 이상해.”


 “여기 이 통 옮길 때도 그 소리 하더만. 무겁니 어쩌니.”


 “그거야 정말로 보기보다 훨씬 무거웠으니까. 분명 뭔가 다른 게 들어있다니까.”


 “그래봐야 보급품이지. 헛소리할 시간 있으면 다가오는 연놈들 머리통이나 하나 더 날려버려.”


 동료의 푸념 섞인 투정을 뒤로하고, 총안에 가까이 있던 대원이 총을 거치하고 주변을 감시한다.


 “..그래. 뭐, 지금 와서 이야기해봐야 별 의미 없기도 하고.”





 “추격당하는 부대를 엄호해야 돼! 발사!”


 유나의 호령에 맞춰 그녀가 직접 이끌던 150명의 병사가 3천의 추격대를 향해 일제사격을 가한다.


 총성이 한번 울리고, 뒤따라서 주변의 부대 또한 추격대에 사격을 가한다.


 그러나, 추격대의 기세는 꺾이지 않는다.


 거리가 멀어 제대로 피해를 주지 못한데다, 경험이 쌓인 병사들은 오히려 최소한 1분은 방해 없이 적을 추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장, 탄약이 5발밖에 안 남았어요. 이대로 더 쐈다간 저놈들이 우리한테 가까이 붙었을 때 쏠 총알도 없을 거라고요.”


 유나의 부관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보고를 올린다. 그의 말대로, 엄청난 화력을 퍼부어 주도권을 가져온 대가는 상당히 컸다.


 인근의 성에서 출병하며 준비해온 보급품은 거의 다 써버렸고, 보급품이 준비된 본진은 적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괜찮아. 남겨둘 총알은 3발이면 충분해. 그전까진 우리 전력이 상하게 두지 않는 게 우선이야.”


 탕!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방아쇠를 당긴다. 200보 거리의 적 병사가 힘없이 쓰러진다.


 “그러니까 아끼지 말고 쏴.”


 유나가 입으로 탄포를 찢으며 답한다. 그녀에게선 표적에 대한 집중 외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보급품은 전부 다 버리고 온 거예요? 조금은 챙길 시간이 있었는데.”


 “5분쯤 뒤면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꼬치꼬치 캐물을 시간에 총이나 한 발 더 쏘라고. 바보야.”






 “됐다! 우리 보병대가 적 기병대를 차단했다!”


 별동대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5분여, 멀리서 기병대의 기동을 지켜보던 건흥이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정우가 이끄는 기병대가 별동대가 세운 ‘벽’에 막혀, 커다란 ‘안전지대’가 생겼다.


 적어도 300이 넘는 적 보병이 방진과 기병 사이에 갇혔다. 저 병력부터 하나씩 분쇄해나가면 적은 삽시간에 붕괴할 것이다.


 “때가 됐다!”


 건흥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명령을 내리기 위해 앞으로 나선다. 그의 표정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 기병대가 적 기병대를 떨쳐냈다! 전군, 앞으로 진군한다! 적 보병의 시선을..”


 쾅! 쾅! 쾅!


 그러나, 그의 명령은 갑자기 들려온 거대한 폭발음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전투의 승기를,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폭발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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