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112 (최초의 공화국 6)

쾅! 쾅! 쾅!
급조한 엄폐물 사이사이에서 일어난 폭발이 제국군의 진영 전체로 퍼져나간다.
진영 전체에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공기 중엔 잿가루가 흩날린다. 검은 흙먼지 기둥 여럿이 태양 빛마저 가릴 기세로 높이 솟는다.
귀청을 찢는 폭음이 병사들의 정신을, 의지를 파괴한다. 몰아치는 파편이 그들의 몸에 사정없이 들이친다.
멀리서 본다면, 초원 한 가운데에 붉고 검은 거대한 꽃이 핀 정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단, 그 꽃의 구성 요소들은 끔찍하기 그지없지만 말이다.
“...으으..어어..”
“..어..어마..아..아바...”
튼튼한 고층 건물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을 법한 폭발에 휩쓸린 제국군 진영은 처참한 상태다.
쓰러진 병사 몇몇이 입술을 달싹이며 짐승의 울음소리와도 비슷한 신음을 흘린다. 그들의 몸과 사지가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여 비틀거린다.
지옥의 고통에 난도질당한 그들의 비참한 영혼이, 공허한 눈동자 사이로 빛을 잃어간다.
폭심지에 가까워 목이 부러지거나 장기가 파열되어 즉사한 사람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축에 속했다. 적어도 그들은 고통은 겪지 않았으니.
파편에 온몸이 난자되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거나, 떨어져 나가는 육신과 흘러내리는 내장을 움켜쥐고 울부짖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운명이다.
그나마 경상에 그친 자들 역시 멍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 아무리 무수한 전장을 거친 그들이더라도, 이런 규모의 폭발은 처음 겪는 일이다.
손아귀의 힘이 풀려 무기를 땅에 떨구고, 핏덩이가 된 동료들이 고통에 신음하더라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날것 그대로의 폭력이, 파괴가 그들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설령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더라도, 영원히 일상으로 돌아갈 순 없으리라.
그들이 어느 곳을 보더라도 동료들의 시신이 그곳을 메울 것이다. 어떤 음악을 듣더라도 폭발음으로 들릴 것이다.
매일 밤 동료들의 망령이 그들을 괴롭힐 것이며, 씹어 삼키는 음식에선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적진, 아니, 조금 전까지 우리 본진이었던 곳이 폭발해버렸잖습니까!”
정우의 부관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정우에게 묻는다. 당혹감 탓인지 말고삐를 죈 손까지 떨리고 있다.
“진정해. 전부 계획대로니까. 설마 본진까지 넘겨주고서 전면전을 치를 줄 알았어?”
반면, 정우의 표정은 정원을 돌보는 정원사와 같이 평온하다. 인간적인 감정은 한쪽으로 물러서고, 냉철하고 교활한 맹수로서 움직인다.
전장의 냄새를 맡고, 변화하는 ‘바람’을 감지한다.
“계획이요?”
“그래. 어차피 저 물량을 상대로 본진을 지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발상이야. 물러났다 되찾는 것 역시 불가능하고.”
정우가 폭심지와 양익으로 전개한 적의 보병대, 추격 중인 기병대를 번갈아 둘러본다. 이미 그의 눈은 다음 ‘수’를 노리고 있다.
“그러니까, 이왕 버릴 거라면 먹음직한 ‘미끼’로 쓰는 게 좋지 않겠어?”
너무나도 상식 외의 발언에 부관이 충격에 숨을 삼킨다. 눈앞의 사람이 미치광이인지, 바보인지, 천재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사실, 챙겨온 상자엔 멀쩡한 보급품 같은 건 없었어. 전부 화약과 기름, 철 파편을 꽉꽉 눌러 담아서 시계를 개조한 시한장치를 달아뒀지.”
“..! 그럼, 시간이 틀어졌으면 아군 보병대가 전부 저곳에서 폭사하는 거였잖습니까?!"
이걸로 확실해졌다. 눈앞의 사내는 미치광이다. 10점 만점에 12점짜리 미치광이다.
“뭐, 그렇게 놀란 얼굴 하지 말라고. 불가능을 이루려면 불가능한 수를 써야 하니까. 시간도 철저하게 계산해뒀고, 실제로 잘 진행됐잖아.”
정우가 아군 보병대를 향해 돌격하던 적 기병대를 바라본다.
잠시 차단당한 탓에 거리가 벌어졌지만, 전력으로 추격한다면 기동하는 보병대와 협공할 수 있다.
“다음 단계야. 기병대 절반을 끌고 가서, 적 기병대를 차단해. 이기지 못해도 좋으니까, 절대로 보병들을 향하지 못하게 해. 그동안 나는 폭파된 적 본군을 쓸어버린다. 출발해.”
“..예! 2대, 나를 따라라. 가자!”
태연하게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 통에, 부관이 반쯤 얼이 빠져 정우의 명령을 따른다.
그러나 한편으론 ‘확신’이 피어난다. 이대로만 간다면 승리를 거둘 수 있겠다는 ‘확신’이.
폭발이 일어나고 1분 뒤, 제국군 본군의 상태는 여전히 처참하다. 거대한 폭발이 8천의 본군 중 절반인 4천을 살상했다.
“..으으..”
“여기가..어디..”
“내가..왜..여기..”
그나마 전투를 수행할 수 있을 법한 상태인 4천명의 병사마저, 폭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멍하니 주변을 배회한다.
흩날리는 잿가루와 흙먼지가 시야를 방해하고, 마구잡이로 흩어진 파편들은 움직이는 병사들의 발을 사정없이 찌른다.
“..이게..어떻게..된..일이란..말이냐..”
‘적암백’ 건흥이 넋이 나간 채 쑥대밭이 된 진영을 둘러본다. 그 역시 얼굴엔 그을음이 잔뜩 묻었고, 몸 곳곳엔 자그만 파편이 박혀 피를 흘리고 있다.
그러나, ‘어째서?’라는 의문이 그의 고통을 차단한다.
분명 무적일 터인, 2만에 달하는 제국의 정예병이 고작 4천의 병사에게 어째서 패했는가?
어째서 상대는 계속해서 상식에서 벗어난 전술을 사용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안정과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조금의 피해를 감수하고서 정우의 습격을 무시했더라면, 선발대를 따라잡고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조금만 공명심을 억눌렀더라면, 기병대가 패배한 시점에서 손실을 각오하고 운송을 강행할 수 있었다.
피해를 줄이기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수를 뒀다면, 폭발에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 적의 경기병이 돌진한다! 어서 방진을 짜야 한다! 이대로라면 참살당한단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빠르게 정신을 차린 건흥이 돌격해오는 정우의 기병대를 발견했다.
“..아아..”
“...방진..방진을 짜야지..”
그가 목이 찢어져라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려보지만, 상태가 괜찮은 병사들조차 멍하니 무기를 허공에 휘적거리기 바쁘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그가 절규에 가까운, 공허한 명령을 내릴 때마다 검은 망토를 두른 정우가 가까워진다.
그가 말을 내달리는 모습은 마치 검은 바람이 초원을 휩쓰는 것처럼 보인다.
‘까마귀’가 쪼아낼 심장을 포착했다.
“폭발했다! 지금이야! 재집결 신호를 보내!”
사정없이 총을 속사하고 있던 유나가 기수에게 명령을 내린다. 유나의 명령에도 기수는 멍하니 폭발 현장을 바라본다.
갑작스러운 폭발은 아군의 사기마저 흐트러트렸다. 엄청난 폭발이었던 만큼, 다시금 그런 폭발이 이어지지 않을까 두려움이 그들 사이에 퍼진다.
그들 모두 얼마 전까진 농부나 잡일꾼 같은, ‘평범한’사람들이었다. 저렇게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폭발은 들어보지도, 겪어보지도 못했다.
거기에, 본군을 제외하고서도 여전히 상대는 아군보다 훨씬 많다. 전진하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만 해도 이미 충분한 용기를 보인다고 해도 좋은 정도다.
짝!
“빨리 재집결 신호 보내라고! 애들 다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유나가 기수의 뺨을 거칠게 후려치곤 주변을 돌아본다. 대다수 병사 역시 기수와 같은 상태다.
“지금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다 죽는다니까! 네 동료가, 형제자매들이 죽는다고! 정신 차려!”
그녀의 목에서 거친 함성에 가까운 일갈이 터져 나온다. 이들이 죽는 것도, 정우가 죽는 것도 보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선 최대한 가능성이 높은 계획에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한다.
정우가 적 본군에 돌입해 ‘목표’를 달성하는 동안, 우회한 적의 양익을 차단해 진입로와 탈출로를 지켜내야만 한다.
여기서 멈춰버렸다간 돌입하는 정우의 기병대가 고립되어 전멸해버리고, 그 여파는 아군 전체에게 미쳐 모두가 위험해진다.
경보병 1천 500명과 장창병 500명으로 적 중보병 8천을 막아내야만 한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이라고, 죽으려고 작정했냐고 물을 전력 차이다.
하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더라도 모두를 위해서 저들에게 ‘목숨’을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목숨’의 무게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짓누른다. 그들 하나하나가 함께 불을 쬐고, 농담을 주고받던 사람들이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적을 죽이는 것과 동료들에게 목숨을 걸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그들의 멍한 표정 하나하나가 자신을 탓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무거운 중압감에 그녀가 입술을 강하게 깨물고, 한줄기 핏방울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너희가 지금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모르겠어. 싸우고 싶은지, 지금 당장 도망치고 싶어질 정도로 두려운지.”
병사들을 돌아보던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연다. 작은 속삭임 같은 그녀의 목소리에 병사들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시선을 그녀에게 향한다.
생명의 ‘무게’를 진심으로 이해한 그녀의 말은 그 어떤 외침보다도 강하게 병사들의 마음을 울린다.
“난 머리 쓰는 건 영 못하니까.”
고개를 들고 씩 웃어 보이는 그녀의 미소엔 어딘가 쓸쓸하면서도, 결의를 다진 자의 ‘힘’이 엿보인다.
“그래도, 내 마음 정도는 알고 있어. 내가 어떻게 되건, 난 내 친구를 위해서 싸울 거라는 거. 친구와 함께 손을 잡고 집에 돌아가겠다는 거.”
그녀가 땅을 향해 늘어트린 총을 제대로 집고, 다시금 적을 향해 돌아본다.
전장의 바람이 쓸어 넘긴 그녀의 머리칼을 정오의 태양이 밝게 비춘다. 땀과 먼지에 잔뜩 절은 모습임에도, 신화 속의 영웅과 같이 빛나고 있다.
그녀에게서 레흐와는 다른 형태의 ‘빛’이 스며 나온다. 어딘가 친근하면서도, 어깨를 맞대고 함께 걷고 싶은 그런 빛이.
“소중한 사람을 위하여.”
유나가 나직이 속삭이곤 홀로 적진을 향해 뛰쳐나간다. 들릴 듯 말듯 한 그녀의 목소리가 모두의 마음에 울려 퍼진다.
“소중한 사람을 위하여.”
처음엔 유나와 비슷한 나직한 속삭임이었다. 가장 겁이 많다고 조롱당하던 겁쟁이가 유나를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하여!”
“소중한 사람들을 위하여!”
“친우들을, 가족들을,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그 파문은 점점 넓어져, 이윽고 거대한 외침이 되었다. 높이 나는 ‘전쟁매’의 뒤를 따라 돌진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눈이 부시면서도 애절하다.
인간성이란 인간성은 모조리 파괴하는 전장에 기적이 꽃피었다. 덧없으나 고귀하고, 없는 것이 좋으나 있어야만 하는 기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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