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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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작품등록일 :
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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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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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113 (최초의 공화국 7)

DUMMY

“본군을 지켜야만 한다! 이대론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아!”


 우익의 별동대를 이끌던 부관이 악에 받친 외침을 내지른다. 애처롭게 전장을 둘러보는 그의 시선에서 당혹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히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던 본군이 거대한 폭발에 휩쓸려 붕괴해버렸다.


 모두 단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쉽사리 평정을 찾긴 쉽지 않다.


 “적 기병대가 나뉘었습니다! 절반이 본군을 향하고 있습니다!”


 “절반은 아군 기병대를 향합니다! 이대론 얼마 안 가 충돌할 겁니다!”


 대열을 이끌던 부사관들이 다급히 보고한다. 그들 역시 한껏 당황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대열의 발걸음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기껏 기병대와 보병대의 간격을 맞춰 마련한 ‘안전지대’는 갈수록 사라져간다.


 적 보병대는 다시금 하나로 뭉쳐지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빌어먹을!”


 부관이 이를 악물며 생각에 잠긴다. 그가 판단을 위해 쓰는 시간은 곧 전투의 승패가 갈리는 시간이다. 조급함이 그의 마음에 불을 지른다.


 “본군을 구원한다! 빨리 움직여라! 어떻게든 적 기병대를 저지해야만 한다! 기병대에겐 추격을 중지하고 살아남는 데 집중하라 전해라!”


 그가 발걸음을 돌려 아군 기병대로부터 멀어져간다. 패배감과 무력감이 심장을 움켜쥔다.


 무언가 움직임을 취할 때마다, 바로 그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대응이 튀어나온다. 여전히 전력상 우위임에도 적에 대한 공포가 자라난다.





 “저놈들을 막아내야 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창벽을 만들어! 어서!”


 유나의 신호를 받은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적 경기병에 습격당해 와해된 1개 부대를 제외하곤 모두 집결해, 1천 800명의 병사가 대열을 이뤘다.


 집결한 병사들 역시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나, 동료들이 외치던 구호에 용기를 되찾았다.


 “..제기랄. 나 벌써 후회할 것 같아. 아깐 신나서 외쳤는데.”


 “나도 그래. 생각이 통했네.”


 대열 앞에서 사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가 옆의 동료에게 속삭인다. 아무리 ‘결의’를 되찾았다 한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측에서 다가오는 병사가 5천. 좌측에서 다가오는 병사가 3천. 그들의 숫자는 적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하다.


 “도망칠까?”


 “그러고 싶은데, 너 같은 멍청이들을 두고 갈 수가 없네.”


 말을 주고받던 병사들이 씩 웃는다. 두려움이 그들을 삼킬지언정, 싸워야만 하는 이유가 그들에게 끊임없이 용기와 고결함을 불어넣는다.





 “저들을 베어라! 대장기까지 길을 열어라!”


 “초원을 위하여! 공화국을 위하여! 모조리 짓밟아버려!”


 폭파된 본군 진영에 다다른 정우의 기병대가 혼란에 삼켜진 병사들을 쓸어낸다.


 권총이 불을 뿜고 기병도가 피로 목을 축인다. 적의 시신에서 탈취한 기병창이 무방비한 병사들을 꿰뚫는다.


 빠르게 진입해 검은 잿가루 안개 속을 휘젓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생명을 거두는 사신처럼 보인다.


 “거슬리니까 비켜. 너희 상대할 시간 따위 없어.”


 그중에서도 정우의 무용은 양 떼 사이로 들어온 사자와 같다. 그가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하나의 생명이 사라진다.


 무표정하게 살육을 반복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어떤 이라도, 피가 얼어붙는 공포를 느낀다.


 “커헉!”


 “..내 팔이..사라졌어..”


 무기조차 놓친 병사들이 많은 본군은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병사들이 더 많았다.


 “여기로 모이..아악!”


 “쿨럭! 빌어..먹을..”


 몇몇은 그나마 저항을 해보지만, 조직화하지 않은 움직임은 맥없이 스러져간다. 순식간에 1천이 넘는 병사가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기다려라. ‘까마귀’가 네 심장을 쪼아내러 가고 있으니.”


 대장기를 본 정우가 나직이 읊조린다. 거리는 해봐야 50보. 찰나의 순간 안에, 이번 싸움의 결판이 날 것이다.





 “쏴! 조금만 버티면 돼!”


 유나가 병사들을 독려하며 적에게 사격을 가한다. 수중에 남은 탄약은 고작해야 3발. 병사들 역시 상황은 비슷한지 초조한 눈빛을 하고 있다.


 적과의 거리 역시 200보가 채 되지 않는다. 적이 착검돌격을 걸어올 만한 거리는 약 50보. 늦어도 5분 안에는 상황이 끝나야 전멸을 피할 수 있다.


 ‘빨리 일 끝내고 튀라고..! 제기랄. 내가 어쩌다 저런 빌어먹을 놈하고 엮여서.’


 생각과는 다르게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미 마음을 내줘버린 사람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가사의할 정도로 힘이, 의지가 끓어오른다.


 ‘이번 일 끝나면 잔뜩 얻어먹고 욕해줄 거니까, 기다리고 있으라고.’





 “저기 있군. 3분 안에 돌아오지. 언제든 이탈할 수 있게 준비해둬.”


 정우가 도끼를 휘둘러 피를 털어내며 신호수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의 시선에 ‘적암백’ 건흥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어떻게든 병력을 추슬러 반격을 시도하려 하지만, 그 자신도 혼란에 삼켜졌다.


 건흥이 수송대 중군을 지휘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순간부터 기다리던, 절정의 순간이 찾아왔다.


 건조한 어조에선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다. 아직 ‘사냥’이 끝나지 않았다. 감정 따위가 끼어들어 일을 망치게 둘 순 없다.


 건흥과 정우 사이의 거리는 약 30보. 주변에 악을 쓰던 건흥과 정우의 시선이 교차한다.





 “날 지켜라! 날 지키라고!”


 건흥의 눈에 공포가 어린다.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이 그의 심장을 움켜쥔다. 한겨울의 서릿발이 그의 척추를 타고 내린다.


 눈에선 목숨을 구걸하는 눈물이 흘러나오고, 내쉬는 숨 하나하나가 소중히 느껴진다. 무거운 공기가 그의 폐를 가득 채운다.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도망가고자 하는 다리를 붙잡는다.


 온몸이 피로 물든 그의 모습은 전설과 신화 속의 악귀를, 나아가 죽음 그 자체를 마주하는 듯한 공포를 선사한다.


 피의 붉은 색 사이로 보이는 흉흉한 안광에선 마치 세상 그 자체를 저주하고 증오해야 나올 수 있을 법한, 끝 모를 증오가 흘러나온다.


 지금껏 여러 전장을 거쳐왔지만, 저렇게나 ‘순수한 살의’를 내뿜는 자는 없었다. 생물로서 본능적인 두려움이 온몸을 지배한다.


 “..으..으아아아!”


 “사..살려줘! 살려달라고!”


 “흐..흐아아아! 도망쳐!”


 병사들 역시 두려움에 압도되어 도주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전장의 참상을 지켜봐 온 정예병들 역시 저런 괴물 같은 공포를 마주하진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피가 묻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사람의 살점이나 내장이 튀면 피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저자에겐 그런 것이 없다. 동물을 도살하는 도살자보다도 사람에게 자비심을 느끼지 않는다.


 대적할 수 없다. 저기 있는 저 괴물에게서 달아나야 한다.





 “...”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건흥이 멍하니 돌진해오는 정우를 바라본다. 두려움 외에는 아무런 의문도, 감정도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완전히 망가졌나. 뭐, 상관없어. 난 네 ‘전리품’이 필요한 거니까.”


 건흥의 코앞까지 다가온 정우가 혼잣말을 내뱉으며 말에서 뛰어내린다.


 그의 손에 들린 송곳 형상의 단검 끝이 흉흉히 빛난다. 공중에 뜬 그가 건흥에게 비치던 태양 빛을 가리고, 건흥의 시야가 어둠에 잠긴다.


 “목숨, 받아 가마. 좋은 사냥이었다.”


 “끄아아아아악!”


 정우가 떨어지는 속도 그대로 건흥의 폐부에 칼날을 찔러넣는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건흥의 허리가 부러지고, 있을 수 없는 형태로 바닥에 쓰러진다.


 건흥은 즉사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말이다.


 “원래라면 말 위에서 바로 숨통을 끊었겠다만.. 유감이다. 네 고통에 전 ‘표정’이 필요해서. 너도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감수하는 인간이니, 내 사정은 이해하겠지?”


 바닥에 착지한 정우가 건흥의 몸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 몇번이고 난도질할 준비를 한다. 가장 큰 고통을 가하면서도, 빠르게 죽을 만한 곳을 찔러야 한다.


 “..크..크큭..! 그래. 이해한다..! 네.. 말처럼.. 나도.. 모든 수단을.. 썼으니. 잊고.. 있는 것.. 없나?”


 건흥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비웃음을 흘린다. 마지막으로 단 한가지의 승리를 쟁취하고 싶다는 그의 오기가, 죽음과 마주한 때에 발휘된다.


 “보급 수레 말인가?”


 “그래.. 쿨럭! 네놈이..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이미.. 선발대와.. 합류했을.. 거다. 목적은.. 달성했다.”


 자신이 패배해도 바뀐 것은 없다.


 물자를 전달받은 상원수의 군대가 초원을 불바다로 만들고, 감히 ‘통령’이니, ‘공화국’이니 지껄이던 자들을 모조리 처형할 것이다.


 “내게 배속된 병력은 5천이야. 그리고, 이 전장에 있는 병사는 4천이고.”


 정우가 무미건조하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한다. 반면, 건흥의 얼굴은 마귀와 마주한 자처럼 절망에 물들어간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끝끝내 모든 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절망감이 그의 정신을 산산이 조각낸다.


 “너라면 이게 무슨 소린지 알겠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절망에 빠진 그의 귓가에 정우가 속삭인다. 그의 칼날이 조금씩 건흥의 목덜미를 파고든다.


 흘러내리는 피가, 정우의 손을 붉게 물들인다.





 “챙길 수 있는 건 모조리 챙겨! 못 챙기는 건 모조리 불태워!”


 정우의 심복인 지은이 기병대에게 거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린다. 그녀의 명령에 맞춰, 각 대열을 이끄는 대장들이 신속히 흩어진다.


 정우가 명령한 시간은 단 5분. 5분 동안 최대한 보급품과 호송대를 파괴하고, 즉시 약탈품을 챙겨 퇴각지점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었다.


 언뜻 보기엔 짧은 시간이나, 오로지 일격 이탈과 습격만을 위해 훈련한 병사들에겐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다.


 제국군 수송대의 본군이 정우의 ‘본진’이었던 것을 점령한 직후, 1천의 기병대가 수송대 행렬을 습격했다.


 그들의 손에는 유탄과 권총, 기병도 하나만이 쥐어졌다. 그 이상의 무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순수한 ‘파괴’와 ‘약탈’이었으니.


 최소한의 비숙련 병사들만 남은 호위 대열은 유탄과 총탄 세례에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귀중한 식량과 탄약, 무기를 운반하던 수레는 모조리 불타버렸고, 간신히 남은 몇몇조차 습격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화염에 휩싸인 행렬의 모습은 거대한 불의 강이 초원에 생긴 것처럼 보일 정도다.


 10만 병사가 2주는 넉넉히 버틸 식량과 탄약, 무장은 모조리 잿더미가 되었다. 기병대에게 전달될 예정이었던 군마들은 모조리 약탈당하거나 죽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전쟁의 방향을 크게 비틀었다. 제국군에게 몹시도 불리한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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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붉은 손 - 121 (초원의 음모) 24.06.20 4 0 11쪽
121 붉은 손 - 120 (르브셰 공성전 4) 24.06.18 5 0 12쪽
120 붉은 손 - 119 (르브셰 공성전 3) 24.06.08 7 0 11쪽
119 붉은 손 - 118 (르브셰 공성전 2) 24.06.04 7 0 12쪽
118 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24.06.01 9 0 12쪽
117 붉은 손 - 116 (까마귀 무리) 24.05.30 8 0 11쪽
116 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24.05.28 6 0 12쪽
115 붉은 손 - 114 (승전보) 24.05.25 7 0 12쪽
» 붉은 손 - 113 (최초의 공화국 7) 24.05.22 6 0 11쪽
113 붉은 손 - 112 (최초의 공화국 6) 24.05.18 8 0 11쪽
112 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24.05.14 9 0 11쪽
111 붉은 손 - 110 (최초의 공화국 4) 24.05.11 8 0 11쪽
110 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24.05.04 8 0 11쪽
109 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24.04.30 9 0 12쪽
108 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24.04.26 11 0 11쪽
107 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24.04.24 9 0 11쪽
106 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24.04.20 11 0 11쪽
105 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24.04.19 11 0 11쪽
104 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24.04.16 13 0 11쪽
103 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24.04.10 14 0 11쪽
102 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24.03.31 14 0 11쪽
101 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24.03.28 13 0 11쪽
100 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24.03.22 14 0 11쪽
99 붉은 손 - 98 (막간의 이야기) 24.03.21 12 0 11쪽
98 붉은 손 - 97 (순혈당 - 6) 24.03.17 11 0 11쪽
97 붉은 손 - 96 (순혈당 - 5) 24.03.12 13 0 11쪽
96 붉은 손 - 95 (순혈당 - 4) 24.03.09 1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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