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114 (승전보)

삐이이익!
비명과도 비슷한 우는살 소리가 초원에 퍼진다. ‘일’을 모두 끝마친 정우가 우는살을 쏘아 올렸다.
언뜻 비참하게 들리는 그 소리는 정체를 아는 사람들에겐 희망의 뿔피리 소리처럼 들린다.
“우는살 소리다! ‘일’이 끝났어! 모두 튀어! 전력으로 튀라고!”
유나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외친다. 정말이지 끝내주는 순간에 신호를 보내줬다. 적과의 거리는 해봐야 50보.
조금만 더 좁혀졌다간 일제사격과 동시에 단병접전에 들어가는 거리였다.
이미 맞사격전을 치르며 많은 병사가 죽거나 다쳤다. 탄약 역시 모조리 바닥나, 사실상 쓸모없어진 총을 위협용으로 들고 있는 병사까지 있을 정도였다.
“놈들이 도주하려 한다! 절대로 도망치게 두지 마라! 전원! 착검, 발검하라! 돌격!”
부관이 허리춤의 검을 뽑으며 고함친다. 겉보기론 여전히 강고하나,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쑥대밭이 된 본군에 기병대가 침입했고, 직후 우는살로 신호를 보냈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단 하나다. ‘최중요 표적’을 확보, 내지는 제거했다는 것.
아직 물자를 나르던 수레가 잿더미가 되었음을 모르는 그임에도, 자신들의 완패라는 것은 직감할 수 있다.
부상병의 후송이나 재편성, 시신과 장비의 회수 등을 생각한다면 보급품을 상원수의 군대에 전달한다는 목표는 이미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에 지휘관까지 죽어버렸으니, 지금 당장 돌격한다 해도 병사들이 재집결할 ‘안전지대’를 만드는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순 없다.
하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소중한 부하들을, 형제자매들을, 동료들을 죽인 자들을 이대로 보내줄 수는 없다.
‘피의 값’을 받아내야만 한다.
“제국을 위하여! 장작옥좌를 위하여! 옥좌의 정당한 주인이신, 만고에 빛나시는 황제 폐하를 위하여!”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앞서간 이들의 명예를 위하여! 뒤따라갈 이들에게 모범이 되기 위하여!”
“죽여! 단 하나도 남기지 말고 죽여! 저놈들 목을 친우들에게 공양하겠어!”
병사들이 분노와 증오가 가득한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손마다 착검한 총과 검이 서슬 퍼런 빛을 발한다.
병사들 역시 부관과 같은 분노를 공유한다. 전장에 선 이상, 동료들이 죽을 거라는 것 정도는 ‘각오’했다.
슬퍼하고 아쉬워할지언정, 격한 분노에 휩쓸리진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전사였다면 말이다.
저들은 동료들을 불구덩이로 유인해 태워죽였다. 마치 사냥꾼이 들짐승을 덫에 몰아넣듯이.
상대가 명예로운 싸움을 할 생각이 없다면, 자신들도 상대를 짐승처럼 도륙 내야만 한다. 그것이 곧 ‘피의 값’이다.
“지금이야! 연막탄 던져! 앞줄부터 순서대로!”
펑! 펑! 펑!
유나의 명령에 따라 짙은 연막이 보병대 사이의 공간을 가득 메운다.
정우가 사냥꾼과 용병들이 사용하는 물건의 제조법을 가르쳐 준 덕분에, 초원의 삭풍에도 연막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내 등에 꼭 붙어서 뛰어! 뒤처지면 죽는다! 집에 돌아갈 때까지가 ‘일’이야!”
적들의 증오와 분노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나의 보병대는 싸울 의지를 전혀 내보이지 않는다.
“하! 꼴이 우습군. 아직도 내가 전면전을 치러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정우가 멀어진 두꺼운 연막 벽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린다. 아무리 분노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시야가 없는 곳에 무턱대고 들어가는 자살행위는 하지 않는다.
해소되지 못한 분노는 그들의 정신과 판단력을 조금씩 좀먹어갈 것이다. 정우의 계획대로 말이다.
“정말로 더 안 싸워도 되는 겁니까?”
퇴각하는 보병대의 엄호를 위해 합류한 부관이 정우에게 묻는다. 승리의 즐거움에 어느 정도 취해있음에도, 어느 한편으론 의문을 느끼고 있다.
엄호라곤 하지만, 사실상 퇴각 행렬의 후미를 천천히 따라가며 적 기병대의 접근을 감시하는 것에 가깝다.
적에게서 추격하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얼마 안 가 지은이 이끄는 습격대도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더는 전투의 위협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왜 그래야 하지? 이미 끝난 ‘사냥’이야. 보급품은 모조리 박살 나거나 약탈당했고..”
질문을 하는 이유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정우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안장 뒤에 달아놓은 것을 가리킨다.
“사냥의 ‘전리품’도 챙겼지.”
안장 뒤에는 절망과 고통에 절규하는 표정 그대로 굳어버린 ‘적암백’ 건흥의 머리가 매달려있다.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계획한 ‘사냥감’은 보급품의 파괴와 약탈, 지휘관의 ‘머리’였어. 병력의 숫자를 줄이는 게 아니라.”
“그래도 패잔병을 수습하지 못하게 견제하는 것이..”
부관이 정우의 낯빛을 살피며 말끝을 흐린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미치광이인 자다. 자연스럽게 말을 신중히 고르게 된다.
“짐승들도 새끼들 교육에 꽤 신경 쓴다는 거, 알고 있나? 먹이를 얻는 법이라든지, 나 같은 사냥꾼들을 피하는 법이라든지. 꽤 여럿을 가르치지.”
그러나, 정우는 여전히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지휘관의 권위를 헤칠 수 있는 행동임에도, 사냥꾼이 제자를 가르치듯 인내심을 보인다.
“그래서, 겁 없이 날뛰는 맹수들을 보면 대체로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어. ‘상대’가 어디까지 잔인하고 교활해질 수 있는지 배우지 못한 거지.”
“살아남은 적 병사들이 ‘부모’라는 겁니까?”
“그래. 적어도 3천은 상처를 입었을 거고, 우리가 본군에서 날뛰던 걸 목도한 자들도 있다.”
평온하게 말을 잇던 정우의 입가에 비릿한 비웃음이 떠오른다. 이를 위해 폭약의 양은 줄이고 파편의 양을 늘렸다.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서, 그들의 그림자 하나마다 ‘까마귀’가 도사리고 있음을 새기기 위하여.
죽은 시신보다는, 죽음보다 끔찍한 운명을 맞이한 이들의 고통이 다른 이들의 심장을 더욱 깊게 옭아맬 테니.
그들이 듣는 폭음마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뒤섞일 것이며, 눈을 감을 때마다 피를 뒤집어쓴 까마귀가 나타날 것이다.
“선생이 각하를 따라서 다행이군요.”
부관이 경외심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혹여라도 이런 자가 공화국의 적이 되었다면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를 상상하며 몸서리친다.
분명, 현세에 지옥을 불러오더라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그의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끝 모를 광기와 강철 같은 의지가 최악의 형태로 결합되어버렸다. 대화를 나누는 지금도 피를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 주군께도, 내게도 말이다. 잘못 찾은 ‘둥지’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정우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간다. 하나, 이전과 같은 비웃음이 아니다.
진심으로 자신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 사람의 꿈을 지키기로,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오명과 악업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의 미소다.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고!”
“흐..흐흑! 정말로...이겼어..”
“하..하.. 이제야 몸에 힘이 풀리네. 이렇게 지친 줄 몰랐어.”
집결지인 ‘스트라즈니코프’ 요새까지 무사히 퇴각한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몇몇은 탈진한 나머지 땅에 주저앉고, 몇몇은 흐느끼거나 함성을 지르며 서로를 얼싸안는다.
상자나 무기 등의 각종 전쟁 물자로 가득한 요새의 안마당이 사람의 온기로 가득찼다.
출격한 병력 중 100이 죽고 200이 중상을 입었다. 급소가 아닌 곳을 피탄당한 자는 1천에 이른다.
그러나, 그런 사실도 그들의 기쁨을 줄이진 못한다. 죽거나 다친 자들 모두, 소중한 고향을,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들의 죽음 앞에 단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
“결국엔 살아남았네. 우리 둘 다.”
성문 아래에서 마지막까지 정우를 기다리던 유나가 정우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든다.
그녀의 차분한 미소에서 안도감과 정우를 향한 애정이 묻어난다.
“아슬아슬한 계획이었는데, 네 덕분이야. 네가 보병대를 잘 이끌어줬어.”
정우가 말에서 내리며 유나와 손을 맞잡는다. 그 역시, 겉으론 쉽게 티 내지 않아도 유나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소중히 여기고 있다.
“너, 진짜 나쁜 새끼야. 그건 알지? 어휴, 어쩌다 내가 이런 놈이랑 엮여서 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하는지.”
순간 얼굴이 달아오른 유나가 고개를 돌리고, 즐거움과 부끄러움, 약간의 원망이 섞인 푸념을 늘어놓는다.
“무슨 소리야? 저번부터 그러더니, 이쯤 되면 무슨 뜻인지 알려줘도 되지 않아?”
“알려주기 싫네요. 특히나 너 같은 놈한테는.”
토라진 듯한 얼굴을 한 유나가 맞잡은 손을 풀고, 맞은편 손으로 손을 쓰다듬는다. 전투 도중보다도 상기된 얼굴에선 열기마저 느껴질 정도다.
“크흠, 그것보다, 적당히 피만 좀 닦고.. 아, 저기가 좋겠네. 저기 위로 올라가.”
유나가 헛기침하며 정우에게 수건을 넘겨주고, 주변을 둘러보다 안마당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 상자가 높게 쌓인 곳을 가리킨다.
“저긴 왜?”
“몰라서 물어? 모처럼 이겼으니까 지휘관이 연설 한 번 정도는 해줘야지.”
“그거, 꼭 해야 하는 거야? 어차피 그런 거 없이도 싸워야 하는 건 똑같잖아.”
“그냥 말하면 들어. 내가 너한테 해되는 일 시킨 적 있어? 난 술이나 가지러 갈 테니까, 내려오면 한잔하자고.”
유나가 정우의 등을 안마당으로 떠밀고, 등을 돌려 창고를 향한다. 그 모습을 정우가 어딘가 어색하다는 표정으로 뺨을 긁적이며 바라본다.
“이것 참, 언니한테 더 물러지셨어요. 대장. 못 본 사이에 여러모로 많이 변하셨군요.”
뒤이어 들어온 지은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건넨다.
“시끄러워.”
어찌 보면 그 다운 대답하곤, 정우 역시 걸음을 옮긴다.
“저기 봐! ‘까마귀’가 상자 위에 올라갔어!”
“뭔가 할 말이 있나 봐.”
상자 위에 올라선 정우를 본 병사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퍼진다. 불가능을 이뤄낸 정우를 향해 병사들이 경외심이 담긴 시선을 보낸다.
“오늘, 우리는 제국군이라는 거대한 ‘사냥감’을 크게 몰아세웠소. 저들의 수레는 부서지고, 보급품은 불타올랐지. 제국군은 나흘은 굶주려야 할 거요.”
정우의 말이 시작되자, 웅성거림이 잦아든다. 병사들 사이에 조용한 고양감이 스며든다.
“우린 제국군의 목을 쥔 교살자의 손이요, 그들의 최악의 악몽이오. 그들은 우리로 인해 굶주리고, 괴로움에 울부짖게 될 거요.”
레흐와 같이 ‘희망’을 불어넣는 연설은 정우에겐 불가능하다. ‘정의’는 그와는 수천 리는 떨어진 단어니.
“이대로 하나씩 하나씩, 우리는 제국의 숨통을 죄어갈 거요. 우릴 향한 증오로 눈이 어두워질 때까지, 우릴 향한 공포로 밤을 지새울 때까지.”
그러니 그가 가장 잘 ‘이해’하는 부분을 말해준다. 상대가 느끼는 공포를, 절망을, 고통을.
“누가 나와 함께 하겠소?! 누가 나와 함께 공화국의, 통령의, 나의 주군의 적에게 끔찍한 절망을 선사하겠소?! 누가 나와 함께 저들의 심장을 쪼아내겠소?!”
정우가 품속의 단검을 뽑아 들어 높이 치켜든다. 본능적인 행동이었으나,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레흐와는 다른 방식의 압도적인 정우의 존재감이 병사들에게 용기와 결의를, 분노와 광기를 불어넣는다.
“내가 함께하겠소! 까마귀를 위하여! 그의 무리를 위하여! 공화국을 위하여!”
“저들의 피가 초원에 강을 이룰 때까지! 칼날이 붉게 물들 때까지! 공화국을 위하여!”
“제국군에게 죽음을! 공화국의 적에게 죽음을! 공화국을 위하여!”
터져 나온 외침은 점점 커져, 하나의 거대한 파도를 이루었다. 그들의 눈에 점점 ‘살의’가 차오르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적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날, ‘까마귀 무리’가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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