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다시 말해봐라. 지금 2만 대군이 5천에 대패했다는 거냐? 그것도 ‘적암백’이 지휘하는 정예군이?”
소름 끼칠 정도의 침묵이 깔린 군막 안. ‘사자공’ 안덕이 무릎 꿇은 건흥의 부관에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선 분노가 드러나나 그 내면엔 당혹감이 담겨있다. 어떻게 생각해도 패배할 전력이 아니었다.
정예 중에서도 정예인 2만과 5천이 격돌했다. 상대 역시 정예병이었다 해도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전력비.
심지어 기병 전력에서 밀릴 것을 우려해 안정적인 보병전이 특기인 건흥을 호송대의 대장으로 선택했다.
“...”
“...”
군막 안의 지휘관들 역시 도무지 이해와 납득이 가지 않는 듯 잔뜩 찌푸린 얼굴로 침묵을 유지했다.
보고 받은 전술부터 전과까지 상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호송대도 지키지 못했고, 6천의 병사도 잃고 말았습니다. 죽여주십시오.”
고개를 숙인 부관이 침통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망한 병사만 3천에 중상이 3천. 경상자는 4천에 달했다.
살아남은 병사 중 일부는 ‘까마귀’ ‘악귀’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싸울 의지를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부상자를 후송할 병력까지 합한다면 적어도 1만 5천에 가까운 병력이 증발해버렸다.
보급품 역시 완전히 불타버려 수중에 남은 식량은 기껏해야 사흘 치. 아끼고 아껴야 1주일을 간신히 버티는 수준이다.
거점 마련을 위한 공성에 나서기엔 너무나도 부족한 양이다.
이걸로 원래 계획이던 ‘양면 전선을 통한 압박’은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제국의 군법이 패장을 처벌하지 않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해도 전쟁 계획 자체가 틀어진 패배엔 ‘책임자’가 필요하다.
“귀관을 처형하기엔 때가 이르다. 아군은 아직 적의 전술과 그 방향성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네.”
군막의 싸늘한 침묵이 을파소의 진중한 목소리에 깨졌다. 그의 언동에선 별다른 동요나 충격을 찾아볼 수 없다.
담대한 모습에 은연중 그를 무시하던 지휘관들까지 숨을 삼켰다.
“귀관은 습격대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살아남았네. 전투의 과정 역시 끝까지 지켜보았지. 어떻게든 피해를 수습해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귀환하기도 했고.”
부관 역시 충격에 빠져 천천히 고개를 든다. 을파소의 대답은 그의 예상과는 훨씬 떨어져 있었다.
“귀관에게 습격대의 전력 분석 임무를 맡기겠다. 확고한 대응책이 나올 때까진 죽을 생각은 하지 말도록. 허하지 않겠다.”
이미 처형은 각오했다. 적어도 일반병까지의 강등 처분 정도는 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임무가 내려졌다.
부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황제와 상원수를 향한 충심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울지 말게. 우는 것은 모든 임무가 끝난 뒤에 해도 충분하니. 믿고 있겠네. 함께 폐하의 은덕을 갚아 나가세.”
을파소가 부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운다. 근엄하면서도 따스함이 배어 나오는 그의 미소에 처형하자는 의견을 내던 자들마저도 입을 다물었다.
“..예! 상원수!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장작옥좌를 위하여! 만고에 빛나시는 황제 폐하를 위하여!”
부관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경례한다. 지휘관들 역시 분위기에 감화된 듯 나직이 그의 말을 되뇐다.
“허면 귀공들은 각자 의견을 내보시오. 이제 어쩌면 좋겠소.”
부관이 물러가고 5분여, 군막에 이전과는 다른 적막이 깔렸다.
혼란은 진정되었다. 논리적인 생각 역시 돌아왔다. 하나 그 논리적인 생각 끝에 도달한 ‘답’은 그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단 카르파티아와 올레스니카의 국경까지 군을 물려야 합니다. 그곳에서 보급로와 계획을 다시 정비하고 다시 한번 양면전선 구축에 나서야 합니다.”
안덕의 침통한 음성이 어색한 침묵을 깼다. ‘사자공’이라 칭해질 정도로 용맹한 안덕이나 그의 용맹은 만용이 아니다.
불가능한 싸움에 나설 생각 따윈 없다. 당장 회군하는 데만 해도 1주일은 족히 걸린다. 서둘러야 한다.
“만약 여기서 전투에 나선다면 적어도 나흘은 굶주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사자공! 우리 군대를 뭐로 보는 거요?! 한 줌에 불과한 저들을 상대하는 데 나흘이나 걸릴 것 같소?!”
‘해릉공’ 석준이 안덕의 제안에 격노해 언성을 높였다. 이미 영지를 비우고 몇 달이 지났다.
어떤 모략이 영지 내부에 자라고 있을 지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조급함의 불을 질렀다.
거기에 황제 충성파인 안덕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싶다는 욕망이 더더욱 그를 부추겼다.
“귀공은 조금 전의 보고를 제대로 듣지 않았나 보군. 적암백의 호송대도 그리 생각하다 패배했소. 금방 끝낼 수 있다고,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해서.”
안덕이 팔짱을 끼고 석준을 노려봤다. 그의 시선에서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자의 노련함이 드러난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오. 이미 보급품 중 5할을 써버렸소. 이대론 길어야 2개월이오. 그 안에 역적 레흐를 토벌할 수 있느냔 말이오.”
안덕의 눈빛에 주춤거린 석준의 어조가 누그러졌다. 이전보다는 말에 논리가 생겼다.
“옳은 말씀이오. 하나 이대로 가면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자멸해버릴 거요. 정예병이건 징집병이건 굶주린 병사는 허수아비만도 못한 존재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시간은 시간이오! 이곳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소. 특히나 이런 대패를 당한 뒤라면 말이오.”
“빈손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적 없소. 반드시 보급이 끊어지기 전까지 역적 레흐를 손에 넣고야 말겠소. 다만 안정을 기하자는 거요. 이 전쟁은 결코 패배해선 안 되는 전쟁이오.”
안덕의 말에 석준이 을파소의 눈치를 잠시 살피곤 입을 열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보급 문제도 일부 해결할 수는 있소. 정찰병의 보고로는 아직 청야에 나서지 않은 마을이나 부족이 있다고 하오. 아마 청야의 선택권을 준 탓에 고향을 떠나길 거부한 자들이겠지.”
석준의 말이 흐르는 것과 동시에 지휘관들 사이에서 조그만 속삭임이 터져 나왔다. 그들 모두 석준이 무슨 말을 할 지 감을 잡았다.
비록 그 말이 씁쓸한 진실이더라도 말이다.
“그들을 약탈하며 기동하면 2달 치의 물자는 손에 넣을 수 있을 거요. 운이 좋다면 근처 성안에 틀어박힌 적을 끌어내어 회전에 나설 수도 있소.”
“그렇게만 되면 빈 성을 쉽게 점령할 수 있겠군요. 잘 하면 적의 기병대를 막을 거점까지 마련할 수 있겠어요. 좋습니다.”
“참으로 명안입니다. 해릉공. 병법에서도 적의 보급품은 20배의 가치라 하지 않았습니까.”
망설이던 지휘관들 사이에 동의하는 말이 퍼져나간다.
당초 그들의 목적은 전공을 세워 올레스니카에 가문의 영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최대한 약탈을 피하려 했다. 지배할 영지가 상해서야 전쟁에 나선 의미가 없어진다.
하나 전세가 이렇게 된 지금에선 ‘다음의 일’보단 이기는 것이 먼저다. 패배해선 잿더미가 된 토지조차 얻을 수 없게 된다.
“해릉공, 지금 미쳤소?! 이번 전쟁의 명분이자 목표는 ‘역적 레흐 토벌’이오! 잘못 약탈에 나섰다간 폐하의 서부 장악에 누가 된단 말이오!”
지휘관들의 의견에 안덕이 경악하며 반대를 표했다. 황제의 충신으로서도 좋은 군인으로서도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방안이었다.
“상원수! 망언을 당장 군율로 다스려 주십시오! 제가 직접 집행하겠습니다!”
안덕이 당장이라도 뽑아 들 기세로 칼자루에 손을 올린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소?! 승리하기 위해선 그 방안이 최선이잖소! 폐하의 충신을 자처하는 귀공이라면 승리를 가장 앞에 둬야 하는 것 아니오?!”
이에 질세라 석준이 다시 목소리를 높여 반론했다. 다른 지휘관들 역시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안덕을 바라보았다.
“황명을 따르지 않는 승리에 가치는 없소! 자기 좋을 때만 따르는 충심에 무슨 의미가 있소!?”
안덕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칼자루를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사자공, 공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나 폐하께 승리를 안겨드리는 것이 장수된 자의 본분 아닙니까.”
“바깥의 병사들을 생각하세요. 사자공. 저들을 살려서 돌아가야 하잖아요.”
보다 못한 지휘관들 역시 한마디씩 거든다. 안덕의 의견에 찬동하는 일부가 있으나 분위기에 눌려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
“아니, 이 자들이..!”
“그만! 그만하시오. 결정을 내릴 테니.”
다툼이 정점을 달리던 그때, 탁자 위 지도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을파소가 고함을 내질렀다.
일견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였으나 실상은 지휘관들의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면밀히 정보를 분석하는 중이었다.
“예. 상원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안덕이 명령에 따라 물러나 을파소의 뒤편에 자리 잡았다. 달아올랐던 군막의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는다.
“해릉공의 안을 채택하겠소. 후퇴하는 일은 없을 거요.”
을파소가 천천히 말을 잇는다. 분명 도박수에 가까운 결단임에도 일말의 망설임도 그를 속박하지 않는다.
“들었소? 사자공. 상원수께서도 내 말이 맞다고 하시지 않소.”
석준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안덕을 바라보았다.
“하오나 상원수! 너무나 위험한..”
안덕은 비웃음에도 개의치 않고 을파소를 말리려 했으나 을파소 본인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다만, 지금 당장 적과 격돌하거나 공성에 나서진 않겠소. 기동 목표는 단 하나. 아랑왕군의 본진이오.”
전혀 예상외의 말에 안덕과 석준을 비롯해 모든 지휘관이 멍하니 을파소를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비상계획을 발동하겠소. 귀공들에겐 비밀로 하고 1달 정도 사용할 물자를 사막길 방면에 미리 대기시켜 두었소.”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을 뒤로하고 을파소가 탁자 아래에서 말을 추가로 꺼내 배치했다.
“적 습격대의 기량을 보건대 카르파티아 방면에서의 보급은 향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소. 적어도 1달 안에는 어렵겠지. 그렇다면 앞으로 나아가야 하오.”
군막 안에 다시 한번 침묵이 감돈다. 어느새 군막 안의 모두가 을파소의 말을 경청하게 되었다.
“보급받을 물자와 아랑왕군의 지원을 합친다면 3달은 버틸 수 있겠지. 그 뒤 피셰로 진격해 역적 레흐를 손에 넣으면 되는 거요.”
지휘관들은 놀란 감정을 숨기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분명 군무 경험이 없는 자일 터인데, 어찌 이런 대전략을 취할 수 있단 말인가.
“방향이 정해졌으니 각자가 맡은 군영으로 돌아가시오. 서두르시오. 늦어도 1주일 안에 ‘늑대’와 마주해야 하니. 강행군이 될 거요.”
“예! 상원수!”
군막이 지휘관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순식간에 그 오만한 지휘관들을 휘어잡았다. 비록 오래가진 않겠으나 이런 일이 쌓인다면 충분히 군대 전체를 장악할 수 있으리라.
“해릉공에겐 특명이 있소. 최고의 ‘포석’이 될 특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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