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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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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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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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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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116 (까마귀 무리)

DUMMY

 “저들을 놓치지 마라! 심장에 공포를 새겨넣어라! 우리의 적들이 절망에 빠져 죽을 때까지!”


 달빛조차 찾기 어려운 밤. 초원을 달리는 ‘까마귀 무리’의 선두에서 정우가 명령을 내렸다.


 “까마귀들이 너희를 찾아왔다! 너희 살점을 포식해주마!”


 “죽음이 곧 너희의 행운일지니! 지금 내쉬는 그 숨이 곧 마지막 숨결이 될지니! 돌격! 돌격!”


 그의 ‘무리’가 명령에 맞춰 괴성에 가까운 전투함성을 내질렀다. 새카만 망토를 두르고 밤을 달리며 울부짖는 그들의 모습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으..으아아아!”


 “도망쳐! 녀석들이 왔어! 도망치라고!”


 초원을 달리는 까마귀의 무리가 마차 행렬을 덮쳤다. 정우가 이끄는 ‘까마귀’는 기병 150기. 작은 수송 마차 20대와 500의 병사로 맞서기엔 너무나도 큰 전력 차였다.


 “커..헉.”


 “아아악! 살려줘! 제발!”


 만약 이들이 제국의 정예병이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었을 것이다. 하나 이들은 모두 을파소가 카르파티아에서 고용한 비숙련 용병들이다.


 을파소는 그의 전략을 철저히 이행했다. 다시 한번 대규모 호송대를 편성할 여유는 없다는 판단하에 소규모 용병대가 잘게 갈라진 보급 행렬을 호위했다.


 이미 카르파티아까지 운송된 물자를 버릴 순 없으니 최소한 습격대의 시간과 시선을 끌어보자는 의도였다.


 그들을 고용하는 데 별다른 노력은 필요치 않았다. 어디에나 먹고살기 힘든 사람은 있으니 성공보수를 높게 부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죽어라. 침략자 쓰레기들아.”


 “네놈들이 먼저 쳐들어와 놓고선 자비를 비는 건가? 쓰레기들.”


 피가 초원의 풀을 붉게 물들인다. 자비를 비는 울음소리와 비명이 뒤섞여 휘몰아친다.


 까마귀들의 부리가 하나씩 붉게 물들어간다.





 “다 끝났습니다. 대장. 마차 8대는 불태웠고 12대는 확보했습니다.”


 불타는 마차를 뒤로한 채 도끼의 피를 닦던 정우에게 부관이 습격 결과를 보고한다. 두 사람 모두 붉은 피가 곳곳에 묻었다.


 “점점 ‘일’을 처리하는 속도가 빨라지는군. 포로는?”


 묻은 피를 꺼리는 기색은 없었다. 이미 살육에 익숙해져 버린 정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평범한 군인이던 부관마저 살육에 무감각해졌다.


 계속된 무차별 살육이 그의 감정을 조각냈다. 점점 눈앞의 적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눈에 담긴 생명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오면서 세봤는데 얼추 200은 됩니다. 마침 저기 오는군요. 이번에도 우리 피해는 없습니다. 다들 도망치기 바쁘더군요. 머저리들.”


 총을 든 병사의 인솔하에 만신창이가 된 포로들이 정우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온다. 


 피와 땀에 범벅이 된 그들의 모습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있던 빈약한 무장은 모조리 약탈당하거나 부서져 버렸다.


 무엇보다도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절망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그들 자신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얼추 예상하였다.


 “큭큭. 어쩜 저리 불운한지. 죽을 배짱조차 없어서는.”


 부관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일말의 자비심마저 그에게선 느껴지지 않았다. 광기는 그의 영혼을 손쉽게 장악했다.


 전장의 피비린내에 둘러싸인 이상, 정우가 뒤에서 조금만 밀어주면 되는 일일 뿐이었다.


 정우의 광기가 부관을 비롯한 ‘까마귀 무리’ 전체에 전염되는 것은 찰나의 시간으로도 충분했다.





 “제발 살려주십쇼! 나으리! 제발 살려주세요!”


 “집에 놓고 온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어요!”


 “아직 죽기 싫습니다..! 아직 죽기 싫어요..!”


 벌거벗겨진 포로들이 밧줄에 묶인 채 흐느끼며 목숨을 구걸했다. 무릎 꿇은 그들의 모습에선 의연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살려만 주시면 무슨 일이건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건!”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자가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기어와 정우의 발에 입을 맞춘다.


 그녀는 용병대의 대장으로 평소에도 겁이 많다 조롱당하던 자였다.


 “커헉! ..제발 살려주십쇼! 제발!”


 정우를 호위하던 병사들이 거칠게 발로 걷어참에도 그녀는 목숨 구걸을 멈추지 않는다. 이미 생존을 위한 갈망 외의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그만. 포로를 이리도 잔혹하게 구타하는 건 가혹하지 않나.”


 정우가 마치 아버지와 같은 자상한 어투와 표정으로 구타하던 병사들을 제지했다.


 포로들 모두 소문과는 다른 그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져 목숨 구걸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하나 병사들의 얼굴엔 묘한 비웃음이 떠오른다. 만약 포로들이 이 비웃음을 눈치챘다면, 그 의미를 알아챘다면 최소한의 인간성은 지킬 수 있었을 터였다.





 “너, 방금 뭐든지 한다 했느냐?”


 정우가 몸을 낮춰 용병대장의 고개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다정한 손길과 표정에 그녀의 긴장이 일순 풀어졌다.


 “예! 예! 뭐든지 하겠습니다! 남은 보급대 위치부터 병력 숫자까지 전부 말하겠습니다!”


 “그건 도움이 되겠구나. 자, 지도를 줄테니 표시해봐라.”


 정우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보여준다.


 “저기..철필 같은 건..?”


 “나는 네게 목숨을 약속했다. 이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한가?”


 정우가 나지막한 말과 함께 용병대장의 입을 가리켰다. 잠시 감을 잡지 못한 듯 망설이던 그녀였으나 이내 정우의 의도를 이해했다.


 용병대장이 가볍게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리곤 혓바닥에 피를 묻혀 보급대의 위치를 표시했다.


 “푸하하하!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년이 구차하게 구는 꼴좀 보라지!”


 “어이, X년아! 이 몸을 어머니라고 불러봐라!”


 인근의 병사들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 모욕을 퍼붓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잠깐의 수치일 뿐이다. 잠깐만 참으면 부하들과 함께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





 “고맙다. 습격에 큰 도움이 되겠어.”


 정우가 지도를 살펴보곤 턱을 쓸었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그럼..이제 저희를 살려주시는 겁니까?”


 용병대장이 눈물 어린 눈으로 정우를 바라봤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그녀의 심장을 어루만졌다.


 “그래. 살려주고말고. 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니.”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의 은혜는 저승에서도 갚겠습니다!”


 아들뻘인 정우에게 어르신이라고 불러대며 머리를 조아리는 그녀의 모습은 처량했다.


 “살날이 창창한데 벌써 저승 이야기를 꺼내서야 쓰나. 한데, 널 살려주기 전에 네가 해줘야만 하는 일이 있어.”


 “..무엇입니까? 뭐든 하겠습니다.”


 정우가 팔을 뻗어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다른 포로들을 가리켰다. 자애로운 표정과는 다르게 그의 손길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오늘 전과에 추가할 머리가 부족해서 말이야. 네가 좀 골라줘야겠어. 포로 중 절반을 선택해라.”


 정우의 말과 동시에 병사들 사이에선 나지막한 비웃음 소리가, 포로들 사이에선 울부짖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이 X새끼! 지옥에 떨어져라!”


 “크하하하! 더러운 침략자 쓰레기들을 그대로 돌려보내 줄 줄 알았나?!”


 “저..저는 고를 수 없습니다.. 제발..”


 용병대장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청했다. 하나 정우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뭐든지 한다고 했잖나. 거짓이었나? 그렇다면.. 유감스럽게도 난 저들 모두를 죽일 수밖에 없다. 약속을 어기는 지휘관이 될 순 없지 않나.”


 정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댔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나. 나도 네 선택이 어려운 것을 안다. 우리 같은 지휘관이 하는 일은 언제나 목숨의 경중을 재야 하는 일이니.”


 용병대장의 귓가에 궤변이 울린다. 울음에 들썩이면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자신의 선택은 교묘히 감추면서 언뜻 듣기에 공감해주는 듯 들리는 말이었다. 하나 그 속은 악의로 가득 차 있다.


 “네가 그동안 하던 일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살 사람을 살리고 죽을 사람을 죽이는 것.”


 “...”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용병대장이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넋이 나간 듯한 그녀의 눈 아래로 눈물길이 새겨졌다.


 “그래. 손가락질 몇번이면 너도, 절반의 부하도 온전히 살아나갈 수 있다.”


 용병대장의 절망에 물든 얼굴과 광기와 결의에 찬 정우의 얼굴이 기묘한 대비를 이뤘다.





 “잘했다. 금방 하지 않나.”


 “...”


 백 명의 희생자가 결정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넋이 나간 용병대장은 정우의 말에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선택된 자들을 바닥에 묶어라. 혀를 깨물지 못하게 재갈을 물리고.”


 하나 이어지는 말은 그런 그녀의 정신마저도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분명 제가 선택한 자들을 살려주는 게..!”


 “아니, 난 분명 ‘고르라고’ 했다. 살릴 녀석을 고르라고 한 게 아니라. 네가 고른 건 ‘처형인’이다. 2분의 1형을 집행할.”


 정우가 끔찍한 절망과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부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꼬챙이’양은 충분한가?”


 “예. 공교롭게도 딱 100개로군요.”


 “가져와라. ‘깃발’을 세워야지.”





 “으아아악! 아아아악!”


 초원에 포로들의 비명이 메아리친다. 재갈을 물고 있음에도 비명이 터져 나올 정도의 고통이 그들의 몸과 정신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정우는 용병대장이 선택하지 않은 포로들이 반대편을 산채로 꼬챙이에 꿰도록 했다.


 처음엔 동료였던 자들을 죽이길 망설이던 그들이었다.


 하나 정우의 ‘저들도 너희 죽음을 못 본 척 하려 했다.’라는 충동질이 그들의 한 줌뿐이던 동료애를 산산이 조각냈다.


 “이 X새끼! 너도 날 죽이려고 했을 거잖아!”


 “죽어! 이 X새끼야!”


 지금은 살아남은 자들 모두 한뜻이 되어 광기에 물들어버렸다.





 “..허억..허억.. 이제 저흰 살려주시는 겁니까?”


 가장 앞서 많은 동료를 꼬챙이에 꿰어버린 포로가 안도감과 절망, 공포와 희망이 뒤섞인 얼굴로 물었다.


 그의 뒤론 100여명에 이르는 사람이 꼬챙이에 꿰어져 ‘인간 깃발’이 되어있었다.


 “그래. 살려줘야지.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까. 마차를 1대 가져가라. 살아남은 ‘용사’들을 빈손으로 보낼 순 없지.”


 정우가 손가락으로 마차 한 대를 가리켰다. 포로들이 공포와 광기에 몸서리치며 주변을 둘러보며 마차를 향한다.


 “자, 돌아가라. 가서 우리의 ‘자비로움’을 널리 퍼트려라. 올레스니카의 까마귀 무리의 자비를.”


 정우의 말을 시작으로 주변의 병사들 모두 그들에게 음산한 비웃음을 흘린다.


 이 비웃음 소리는 한밤의 까마귀 울음소리가 되어 포로들을 무덤에 묻히는 그날까지 괴롭힐 것이다.


 설령 괴로움에 눈을 뽑아버린다 해도 끔찍한 참상은 그들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매일 밤 죄책감과 수치심이 그들의 잠자리를 찾아갈 것이며 공포가 어두운 구석에서 눈을 번득일 것이다.


 그리하여 광기와 공포에 삼켜진 그들은 적에게 공포를 흩뿌릴 것이다. 다신 레흐의 올레스니카를 넘보지 못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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