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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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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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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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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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DUMMY

 “더는 수송대의 움직임 없음. 남쪽의 투란에서도 별다른 소식 없음. 최소한의 정보망만 유지해두고 합류하겠음.”


 유나를 위해 소리 내 읽은 편지를 정우가 곧장 벽난로에 던져버렸다. 딱히 새어나갔을 때 곤란한 정보가 없다고 해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편지를 보낸 이는 강유. 정우의 심복인 ‘숨은 손’ 중 첩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다.


 정우의 부름에 즉시 제국군의 행렬에 따라붙은 그는 제국군의 동향을 속속들이 보고했다.


 ‘적암백’ 건흥과 다른 수송대의 정보를 물어다 준 것도 그였다.


 “그럼 이제 북쪽으로 떠날 수 있는 거지?”


 유나가 어딘가 안도한 듯한 한숨을 내뱉었다. 계속해서 원치 않는 고문을 집행하느라 마음고생이 많았던 그녀였다.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고문의 필요성이나 합리성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후방에 위험을 내버려 두고 남부를 떠날 순 없었다.


 북쪽으로 진군하는 제국군만 해도 13만에 국경 도시들을 공성 중인 아랑왕군이 8만이었다.


 그에 반해 올레스니카 남부의 병력은 최대한 긁어모아도 4만. 조금의 위협도 용납할 수 없는 전력비였다.





 하나 적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라 해도 그간 자행된 학살과 고문은 도를 넘은 것이었다.


 시신으로 만들어진 끔찍한 조형물과 고문당한 포로들이 온 초원에 내걸렸다.


 초원을 침범한 적군은 공포와 절망에 신음했다. 감히 마주할 수조차 없는 공포와 마주한 몇몇은 물자를 내버리고 도주하기까지 했다.


 고문당한 자들의 몰골과 말은 정우의 ‘까마귀 무리’의 악명을 드높였다. 산채로 잡혀 고문당하기보다 자결하는 것을 택하는 자들까지 있었을 정도로.


 수십번의 습격이 끝난 지금은 그 어떤 자도 감히 초원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초원에 부는 바람 소리는 고문당한 자들의 비명이요, 썩어가는 시신은 까마귀들이 찾아온다는 증표였다.


 정우의 광기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잠시 뒤로 물러서 있었을 뿐이었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말이다.


 결국 극단적인 수단이 필요한 때가 찾아오자 기꺼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광기는 병사들까지 전염되어 까마귀 무리는 아군조차 두려움을 느낄 집단이 되었다. 그들 몸에 달라붙은 피와 시신의 냄새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 하나하나가 정우와 비슷하게 고결함을 잃고 타락해갔다.


 동료와 고향 땅, 이상에 대한 사랑은 남았을지언정 사람 그 자체를 향한 사랑은 경멸과 증오로 바뀌어 버렸다.





 “레흐한테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유나가 물끄러미 정우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이라 해도 지나칠 정도로 잔혹한 방법을 택했다.


 설령 대규모 전면전 중인 적을 상대로 행한 잔혹함이라 해도 맹세와 대치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출발하기 전에도 ‘반드시 일을 성사시키고 와라.’라는 말도 들었고.”


 “그랬지. 넌 ‘백성들과 병사들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무슨 수단이건 사용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잖아. 병력 손실은 사망자 중상자 합쳐서 300명뿐이야. 물자도 백성들한테 손 안 벌리고 적에게서 약탈한 걸로 충당했고.”


 “적을 꼬챙이에 꿰어 버리는 것까진 생각 안 했을 걸. 그것도 산채로 그러는 건 더더욱.”


 “..뭐, 주군께는 잘 이야기 해봐야지.”


 정우가 얼굴을 가볍게 찌푸리곤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전장에서 보이는 광기와는 전혀 다른 수더분한 모습에 유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잘 말해줄게. 대신 병사들 단속은 잘 해야 할 거야. 지금도 너무 잔인하다고 말이 나오잖아. 계속 그랬다간 레흐가 좋게 보진 않겠지.”


 “그래. 그렇게 할게. 어차피 북쪽으로 올라간 뒤엔 전면전에 나서게 될 테니까. 여기서처럼 날뛸 필요도 없어질 거야.”


 말을 마친 정우가 벽에 걸어두었던 가죽 갑옷과 장비를 몸에 걸쳤다. 움직일 때가 되었다. 남부의 병사들을 규합해 북쪽으로 진군할 때가.





 “아, 말하는 걸 잊어버릴 뻔했네. 약탈품 중에 고급 정장이 한 벌 있었어. 아마 유력자들한테 뿌릴 뇌물이었겠지. 네 몫으로 넘겨뒀으니까 챙겨놔.”


 유나가 잠시 내려놓았던 춘화집에 다시 들어 올렸다. 잠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자는 그녀 나름의 신호였다.


 “그건 왜? 팔아서 전쟁자금으로 써야지.”


 “갑옷 차림으로 현이랑 만날 작정이야? 다시 전선으로 넘어가면 얼굴 보기 힘들잖아. 제대로 차려입고 만나야지.”


 유나가 작은 한숨을 쉬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책장을 넘겼다.


 반면 정우는 고마움과 당황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할 말을 고르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그대로 침묵을 유지했더라면 그녀 쪽이 연장자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어후, 이 오라버니 가슴팍 좀 봐. 엉덩이도 끝내주네. 역시 홍도당 선생이야. 그림을 참 기가 막히게 그린다니까.”


 “적당히 좀 봐. 이젠 삭을 뼈도 없겠다. 네 부하들이 보면 어쩌려고.”


 “헹. 병사들도 다 보고 있네요. 내가 몰래 싸 온 걸 판 거지만.”


 유나가 조그맣게 혓바닥을 내밀고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참아왔던 장난기가 도진 그녀였다.





 “전쟁통에 어디서 구하나 했는데 너였냐?!”


 “아야야야! 이놈이 또 사람 잡네! 난 그냥 좋은 걸 나눈 것뿐이라고!”


 정우가 유나의 머리를 끌어안고 정수리에 주먹 돌리기를 먹여준다. 다만 상황과 다르게 둘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라 있다.


 “..고마워. 이것저것 전부 다.”


 정우의 손이 조금씩 느려지면서 그가 거의 하지 않는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서로를 담은 둘의 시선에는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담겨있다.


 설령 피를 나눈 가족이라 하더라도 이런 감정을 갖긴 힘들 것이다.


 “그럼 춘화집 좀 사다 줘. 이만큼 쌔끈한 걸로.”


 유나가 다시 한번 장난기로 눈을 반짝이곤 분위기를 깨버렸다. 정우의 눈앞에 갖다 댄 화집에는 굉장히 외설스러운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방금 한 말 취소. 안 고마워. 하나도 안 고마워.”


 “아야야야! 너 때문에 머리 더 안 좋아지면 어쩌려고 이래!”


 정우의 손에 다시 한번 힘이 들어간다. 아무래도 둘의 관계는 이런 가벼우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지속될 것 같다.


 유나 본인의 바람과는 다르게도 말이다.





 정우가 한창 병사들을 이끌고 보급대를 습격하던 동안 아랑왕군은 올레스니카 북부의 ‘르브셰’를 공격하고 있었다.


 도시를 포위한 병력은 4만. ‘아랑왕’ 안나가 직접 공성에 나섰다. 남은 병력은 남하해 도시와 도시, 성과 성 사이의 요충지에 자리 잡았다.


 도시를 지키는 병력은 채 5천이 되지 않았다. 도시의 시민들까지 방위에 협조했으나 압도적인 전력 차는 메워지지 않았다.


 북부에 배치된 5만의 병사가 방위를 위해 각지에 흩어진 결과 각 성의 방어력이 약해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포위 소식을 들은 레흐는 즉시 병력을 움직였다.


 당장 기동할 수 있는 병력과 각 성에서 출격한 병력은 약 4만. 아랑왕군의 별동대와 비슷한 숫자였다.


 그러나 도시를 지키려는 레흐의 시도는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다.


 아랑왕군의 부사령관인 ‘철혈백’ 에른스트가 지휘하는 병력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평생을 안나와 함께 전장을 누빈 인물인 만큼 그녀의 뛰어난 전략 전술을 흡수했다. 개인의 무력과 통솔력 역시 안나의 바로 아래 수준에 비할 정도였다.


 거기에 안나의 아들인 ‘젊은 늑대’ 루카스가 그의 돌격대장 역할을 맡아 호랑이의 등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기동전이 특기인 아랑왕군인 만큼 어떻게 하면 상대의 신속한 기동을 방해할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다른 성을 공격하는 척 위협적인 기동을 취했고 때로는 싸움을 거는 척하면서 물러나길 반복했다.


 여기에 호시탐탐 후위를 노리는 루카스의 재빠른 기동이 합쳐져 레흐의 군대는 하루에 채 30리를 진군하지 못했다.


 병력 부족과 오지 않는 지원군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도시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기동전에 특화된 아랑왕군에게 공성 무기가 부족한 탓이었다.


 그리고, 포위당하고 나흘째 되는 날 오후 무렵에 한계점이 찾아왔다.





 쿵! 쿵!


 공성추가 거칠게 성문을 때렸다. 그 충격에 성문에 달라붙어 버티던 병사들이 뒤로 밀려났다.


 “..크윽!”


 “5명 더 붙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 내야만 한다!”


 “5명 더! 빨리!”


 병사들과 함께 넘어진 대장이 고함을 내지르며 다시 한번 성벽에 붙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한 몸이 되어 성벽을 단단히 지지한다.


 “끄으으으..!”


 “버텨야 해! 절대로!”


 “벽 안쪽엔 우리 가족들이 있잖아!”


 쿵! 쿵!


 병사들의 간절한 외침에도 공성추가 성문을 두드리는 충격은 멈추지 않았다. 충격이 이어질 때마다 병사들이 쓰러져나갔다.


 쿵!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습니다! 성문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공성추가 성문을 때리는 소리 사이를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가로지른다.


 “그래도 버텨야만..!”


 우지끈!


 대장의 말은 미처 이어지지 못했다. 계속된 충격을 이기지 못한 성문에 파열음과 함께 커다란 균열이 생겨버렸다.





 “공성추 후퇴!”


 우렁찬 고함이 들리자마자 성문을 꿰뚫은 공성추가 빠져나갔다.


 “산탄총 사격 개시! 성문 너머의 적을 쓸어버려라! 중보병대 대기! 일제 사격 후 단번에 들이닥친다!”


 그 사이를 대기하고 있던 총병들의 산탄총이 빼곡히 채운다. 총열이 원형의 구멍을 따라 모인 모습은 흡사 검은 꽃다발처럼 보인다.


 “..엄폐, 방패 뒤로 엄..!”


 생사를 가르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수비군에게 제대로 대응할 시간은 없었다.


 탕! 탕! 탕! 탕!


 탄환의 폭풍이 무방비한 병사들을 향해 들이쳤다. 각각의 파편이 병사들의 살갗을, 혈관을, 근육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커헉.”


“끄..윽.”


 병사들은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성벽을 사수하던 백명의 병사 중 절반이 피 웅덩이를 만들어 쓰러졌다.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 하던 성문은 지키는 자도 없이 완전히 비어버렸다. 너덜너덜해진 성문 사이로 흐르는 바람이 도시가 맞이할 운명을 흐느끼며 애도한다.


 “성문이 뚫렸다! 진격! 진격! 성안으로 진격해라!”


 “앞으로! 앞으로!”


 “와아아아! 아랑왕 전하를 위하여!”


 부서진 성문을 박차고 장검과 갑주로 무장한 병사들이 번개처럼 들이닥친다. 그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하나의 생명이 꺼져간다.





 “전하! 북문이 뚫렸습니다! 함락이 코앞입니다! 역시 전하의 군재는 비길 자가 없습니다! 아랑왕 만세!”


 전황을 지켜보던 안나의 장수 중 하나가 감격에 찬 소리로 주군을 칭송했다. 다른 장수들도 그를 따라 경외감으로 가득 찬 눈으로 안나를 바라봤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서문과 남문에 각각 2천을 더 투입해라. 적의 시선을 끌어 북문 주공을 보조한다. 동문은 일시 후퇴. 활로를 열어줘 사기를 꺾는다. 패잔병 추격 준비도 해두도록.”


 “예, 전하! 즉시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전령! 전령을 불러와라!”


 장군들이 부산스레 명령을 수행하는 중에도 안나의 시선은 성벽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성벽과 성벽 너머의 ‘상대’를 보고 있었다.


 “순조롭군. 네가 선사할 수 있는 시련은 겨우 이것뿐인가? 공화국의 통령이여. 좀 더 가치 있는 상대일 거라 기대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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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붉은 손 - 121 (초원의 음모) 24.06.20 20 0 11쪽
121 붉은 손 - 120 (르브셰 공성전 4) 24.06.18 2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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