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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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작품등록일 :
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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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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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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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118 (르브셰 공성전 2)

DUMMY

 ‘르브셰’의 성벽 위 역시 바람 앞의 촛불인 상황은 다를 것이 없었다.


 곳곳에 사다리의 갈고리가 걸려 수많은 병사가 개미 떼처럼 성벽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망설이는 기미 따윈 없었다. 강력한 권위로 부하들과 병사들을 휘어잡는 만큼이나 보상을 내리는 것도 후한 안나였다.


 그녀의 휘하에선 그 어떤 전공도 무시되지 않았다. 지금 성벽을 오르고 있는 농노 징집병들마저도 성벽에 오르는 즉시 금편 1닢을 지급받기로 되어있었다.


 안나에게 있어 ‘탐욕’의 대상은 온 세상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반짝이는 금속 쪼가리 따위는 수단에 불과했다.


 세상 모든 것들을 그녀의 발아래 두기 위한 수단.


 “방패병 앞으로! 올라온 놈들은 꾸물거리지 말고 전열을 만들어! 어서! 총병의 화력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반드시 임시 거점을 지켜내야 한다!”


 성벽 위에 올라선 아랑왕군의 초급 장교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수비군에게 권총을 쏘며 병사들을 호령한다.


 몇몇 부대들은 이미 성벽을 끝까지 올라 전투에 나서기 시작했다. 소수의 병사로 시작된 파문은 점점 커져 순식간에 사다리와 사다리 사이의 공간을 채울 정도가 되었다.


 “탄약과 화살이 떨어진 녀석들은 돌이라도 던져라! 더 이상 기어 올라오게 했다간.. 커헉!”


 탄포를 물어뜯으며 병사들을 독려하던 수비군의 부사관이 가슴을 움켜잡으며 쓰러졌다.


 성벽 아래에선 2천에 달하는 숫자의 총병이 든든한 방패 뒤에서 끊임없이 화력을 퍼붓고 있었다.





 “쏴라! 빈 포부터 탄착군 조정! 일격에 맞추지 못해도 좋다! 저들의 포를 이곳에 묶어둬야 한다! 쉬지 말고 쏴라!”


 정복을 갖춰 입은 지휘관이 내뻗은 손에 맞춰 서문과 남문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대포들이 성벽을 향해 불을 뿜었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포탄이 성벽과 성벽 위의 병사들, 건축물들을 산산이 조각냈다.


 성벽의 포탑에 배치된 수비군의 대포들 역시 응사해보지만, 집중적으로 배치된 아랑왕군의 화력을 따라잡기엔 숫자가 부족했다.





 “..제기랄! 완전히 포위돼버렸나..”


 “탄약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단병접전에 나서겠습니다! 단병접전! 단병접전! 발검 및 착검 개시!”


 요충지인 성벽 위의 첨탑도 암담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든든한 화력을 기반으로 성벽 위의 등대로서 기능하던 첨탑은 성벽 위에 고립된 섬으로 전락했다.


 그동안 비축해놓은 맹화유나 석회 가루는 모조리 써버렸다. 물이나 기름, 쇳물을 끓일 장작은 진즉에 바닥났다. 수중에 있는 것이라곤 한 움큼의 검과 도끼 뿐이다.


 그 탓에 성문을 공격하던 공성추조차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맥없이 성문이 뚫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다리를 걷어 내! 어서!”


 “크윽..! 할 수가 없습니다! 적의 저항이 너무 거셉니다! 도저히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북문 성벽 위의 초급 장교가 머뭇거리는 병사를 거칠게 밀며 어떻게든 전세를 뒤집으려 한다.


 하나 처음부터 압도적인 전력에 꺾인 기세는 돌아오지 않았다. 싸우려는 의지 자체가 사라지진 않았으나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은 점점 꺼져갔다.


 “계단 위로 올라가! 성벽을 공격하는 동료들을 보조한다! 장창병 앞으로!”


 아래에선 성문을 돌파한 병사들이 하나씩 계단을 타고 올라오고, 위에선 시시각각 늘어나는 병사들이 압박해왔다.


 당장 사기가 바닥나 무기를 버리고 도주하지 않는 것만 해도 훌륭한 분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가옥은 무시해라! 그대로 광장을 향해 돌진한다!”


 선봉대가 열어젖힌 입구를 통해 늑대의 표식이 이곳저곳에 새겨진 갑옷을 입은 장수가 대검을 들고 돌진해 들어갔다.


 안나의 최정예인 ‘강철늑대’의 대장이었다.


 “우우우! 늑대의 시간이 찾아왔다!”


 “아우우우! 늑대 무리의 군주를 위하여!”


 ‘강철늑대’들이 늑대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그의 뒤를 따라 달린다. 그들의 갑옷에도 늑대의 표식이 흉흉한 빛을 발했다.


 번쩍거리는 대검과 중갑으로 무장한 500명의 병사가 달려 나가는 모습은 거대한 철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듯했다.


 “적들이 모여서 저항을 시작하기 전에 지휘체계를 무너트려야 한다! 더 빨리 뛰어라!”


 ‘강철늑대’의 대장이 부하들을 독려하며 더욱 속도를 붙였다. 평소에도 이런 상황을 대비해 극도의 체력훈련을 반복하는 그의 부대다.





 “더러운 침략자 연놈들! 꺼져라! 꺼지라고!”


 그들이 달리는 도중에 건물의 창문들 사이로 부엌칼이나 냄비 같은 온갖 잡동사니가 날아들었다. 도시의 거리는 돌과 철이 울리는 소리와 저주의 말로 가득 찼다.


 “저것들이..!”


 질주하던 병사들 사이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몇몇 병사들은 공격자를 찾아 눈을 번뜩였다.


 “무시해라! 별것 아닌 위협이다! 시간을 끌 만한 일이 아니란 말이다!”


 도시의 무기란 무기는 수비군과 시민군의 손에 넘어갔다. 예비 병력 역시 일부 요충지를 제외하곤 모두 성벽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건물 밖으로 나와서 길을 막는 것만 아니라면 웬만한 방해는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이 합리적이다.


 갑옷까지 든든하게 차려입은 참이다. 식칼이나 냄비 같은 것들을 던져 봐야 잘 맞지도 않을뿐더러 맞아도 별다른 이상은 없다.


 아랑왕께서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말고 광장을 향해 내달려라.’라고.





 시청 앞 광장. 상인들의 가판대나 수레, 근처에서 마구잡이로 긁어온 가구로 만들어진 방벽 뒤로 200여명 가까운 병사들과 시민들이 모여있다.


 번영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마구잡이로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들만이 지금의 상황을 말해준다.


 지금도 몇몇 병사나 용감한 시민들이 주변을 돌며 인력을 모으고 있으나 촉박한 시간과 헤집어진 도로가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이 이상 병력이 모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손에 반죽 밀대를 든 중년 여인이 방벽 사이로 난 작은 창문 너머를 바라보곤 작게 속삭였다.


 사십 평생 해본 싸움이라곤 젊었을 적 거나하게 취해 술집에서 패싸움이 붙었을 때가 전부인 사람이었다.


 ‘무기’를 든 그녀의 팔이 격하게 흔들리는 데서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이 전해졌다.


 “몰라. 나도 겁난다고.”


 옆에 서 있던 그녀의 이웃이자 친구가 짜증 섞인 투로 혀를 찼다. 부들거리는 그의 어깨가 두려움을 숨기기 위한 짜증임을 보여준다.


 거리에 감도는 적막 사이로 전투의 비명과 철이 울리는 소리가 메아리쳐 그들의 용기를 조금씩 무너트려 갔다.


 “...”


 그런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야만 하는 병사들은 방벽 위의 발판에서 멍한 눈으로 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전투의 열기가 그들의 시야를 좁혀버렸다. 시민을 지키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 지켜야만 하는 존재들이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는지를 놓치고 있었다.





 “시장님. 얼마 안 가 이곳으로 병사들이 들이닥칠 겁니다. 다들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나서서 저들을 진정시켜 주십시오.”


 시청의 계단에 걸터앉은 시장의 어깨에 ‘검은 팔’이 손을 올리며 말을 걸었다.


 새롭게 정착한 이주민들을 돕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참에 전쟁이 터져 이곳에서 전투 준비와 항전을 돕고 있었다.


 “..내가 저들에게 뭘 해줄 수 있겠소. 적은 우리를 파도처럼 덮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많소. 나는 늙어빠진 노인에 지나지 않고.”


 시장이 멍한 눈으로 검은 팔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속삭임에선 이미 패배했다는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패배했소. 성문은 부서졌고 성벽은 적의 손에 들어갔소. 이런 상황에선 항복도 받아주지 않겠지. 이제 남은 것은 죽음뿐이오.”


 그가 꼭 쥐고 있던 시장의 금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 아래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금인을 적셨다.


 “300년 역사의 도시가 오늘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죄송합니다. 선조들이시여. 통령이시여. 못난 늙은이가 끝내 도시를 망쳐버렸습니다.”


 떨어지는 눈물이 점점 늘어 손을 적셨다. 말소리는 점점 흐느낌에 가까워져 알아듣기 힘들어졌다.





 “..알겠습니다.”


 검은 팔이 그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곤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누가 그를 탓할 수 있겠는가. 전쟁과 유혈은 모든 이의 정신을 파괴한다.


 아무리 지도자라 한들 한 명의 인간이다. 70을 넘긴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지금껏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모두! 이곳을 봐주시오! 검은 팔이 할 말이 있소!”


 ‘검은 팔’이 그의 검게 물든 팔을 들어 올려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그들 모두 절망이나 공포, 패배감에 물들어 멍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고맙소. 지금 여러분을 부른 것은 내 마음을 고백하기 위해서요.”


 검은 팔이 숨을 삼킨다. 그 자신도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려야만 했다.


 “나는 두렵소. 저들이 내 친우들을 죽이는 것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의 대군을 맞아 싸우는 것이. 내 눈앞에서 여러분이 목숨을 잃는 것이.”


 검은 팔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 모두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렵소.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 소중한 이들과 보내지 못한 시간이 너무나도 많소.”


 필사적으로 입 밖에 내지 않으려 노력하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소. 설령 겁쟁이라 조롱당하더라도 말이오.”


 검은 팔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고 있었으나 실상은 그 자리의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여러분들도 그리 느낄 것이라 생각하오. 나의 얕은 식견으로도 여러분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소.”


 그간 누구보다도 용맹하게 싸우던 검은 팔이었다. 그가 이렇게나 두려움을 느낄 정도라면 다른 이들은 얼마나 두려울 것이란 말인가.







 “하나 나는 싸우겠소.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설령 1천 대 1의 싸움이 될지라도. 이곳이 나의 이름 없는 무덤이 될지라도.”


 검은 팔이 등에 메고 있던 총을 높이 들어 보였다. 구름 사이로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낸 태양이 그를 환하게 비춘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벌어낸 시간은 친우들이 안전히 살아갈 시간이 될 것이오. 영광스러운 공화국의 군대가 무도한 침략자들을 몰아낼 시간이 될 것이오. 오늘 우리가 쓰러트린 병사들은 다신 우리 가족을 해치지 못할 것이오. 우리가 저들에게 보이는 투지만큼 저들의 전의가 깎여나갈 것이오.”


 절망 속에서 결의와 각오가 단조 되어 간다. 용기와 투지의 불꽃이 다시 한번 살아나기 시작한다.


 “나와 함께 싸우시겠소? 나와 함께 최후의 저항에 나서시겠소? 결정은 여러분의 몫이오.”





 “싸우자! 싸우자! 우리 몸에서 숨결이 빠져나가는 그때까지!”


 “내가 오늘 여기서 죽더라도 하나라도 더 길동무 삼아주겠어. 반드시.”


 “저들에게 죽음을! 공화국의 모든 이들을 위하여!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


 짧은 침묵 직후에 쩌렁쩌렁한 외침이 방벽 안을 가득 메웠다. 그들 사이에 감돌던 공포의 불쾌한 냄새가 모조리 날아갔다.


 도망친다 해도 아무도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도망칠만한 합리적인 이유도 수십, 수백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굳게 섰다.


 전장의 기적이 일어났다. 단 몇 마디의 말로 평범한 농부와 주부, 상인들이 신화 속의 영웅들이 되었다.


 진정으로 공포를 정복한 이들만이 내보일 수 있는 고결함과 품위가 그들에게서 묻어나온다.


 설령 영웅 그 자체를 묘사한 조각상이라 한들 먼지와 눈물, 땀으로 얼룩진 그들의 모습보다는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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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붉은 손 - 124 (초원의 회전 2) 24.06.29 5 0 11쪽
124 붉은 손 - 123 (초원의 회전 1) 24.06.25 5 0 12쪽
123 붉은 손 - 122 (대회전의 전조) 24.06.22 6 0 11쪽
122 붉은 손 - 121 (초원의 음모) 24.06.20 6 0 11쪽
121 붉은 손 - 120 (르브셰 공성전 4) 24.06.18 7 0 12쪽
120 붉은 손 - 119 (르브셰 공성전 3) 24.06.08 7 0 11쪽
» 붉은 손 - 118 (르브셰 공성전 2) 24.06.04 8 0 12쪽
118 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24.06.01 9 0 12쪽
117 붉은 손 - 116 (까마귀 무리) 24.05.30 9 0 11쪽
116 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24.05.28 7 0 12쪽
115 붉은 손 - 114 (승전보) 24.05.25 8 0 12쪽
114 붉은 손 - 113 (최초의 공화국 7) 24.05.22 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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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24.05.14 10 0 11쪽
111 붉은 손 - 110 (최초의 공화국 4) 24.05.11 10 0 11쪽
110 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24.05.04 9 0 11쪽
109 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24.04.30 12 0 12쪽
108 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24.04.26 12 0 11쪽
107 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24.04.24 13 0 11쪽
106 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24.04.20 12 0 11쪽
105 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24.04.19 13 0 11쪽
104 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24.04.16 16 0 11쪽
103 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24.04.10 17 0 11쪽
102 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24.03.31 17 0 11쪽
101 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24.03.28 16 0 11쪽
100 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24.03.22 15 0 11쪽
99 붉은 손 - 98 (막간의 이야기) 24.03.21 13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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