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119 (르브셰 공성전 3)

“..제기랄! 벌써 방벽을 세웠군. 화력으로 돌파한다! 척탄병 앞으로!”
대장의 명령에 따라 강철늑대의 대열이 달리는 일사불란이 움직여 뒷줄의 척탄병들이 나올 공간을 만들어냈다.
소총병들 또한 별다른 명령 없이도 총을 꺼내 척탄병들을 엄호할 태세를 갖췄다.
당황한 기색 따윈 없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경우의 수 중 하나일 뿐이었다.
“쏴! 목과 어깨를 노려! 유탄을 못 던지게 해야 해!”
탕! 탕! 탕!
방벽 위에 늘어선 총구 중 하나가 불을 뿜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수십발의 총성이 이어졌다.
“꺼져라! 침략자들아! 꺼지라고!”
손이 비는 사람들은 5척 남짓한 방벽 너머로 빈 총의 장전을 돕거나 돌을 던지는 등의 항전을 이어갔다.
여전히 두려움이 그들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하나 그 두려움이 망설임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어째서 싸워야만 하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불태워야 하는지 모든 마음을 다해 이해하고 있었다.
“아악!”
“크윽! 얀! 정신 차려!”
탄환에 피격당한 유탄병들의 육체를 꿰뚫었다. 하나나 둘은 그대로 거꾸러졌으나 남은 자들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돌진했다.
“..이딴 고통으론 날 멈출 수 없어! 절대로!”
“늑대무리의 군주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진 않겠다!”
강철늑대 사이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고통아 그들의 전의를 더욱 들끓게 했다.
그들에게도 싸워야만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이웃들이 있었다.
고향의 생계와 명예가 그들의 어깨에 짊어져 있었다. 패배나 후퇴는 용납되지 않는다. 반드시 승리해 전우와 어깨를 맞대고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유탄 투척! 유탄 투척! 길을 열겠다!”
“후폭풍이랑 파편이 날아올 거다! 엄폐해! 망치병와 도끼병 대기!”
척탄병이 유탄을 던지곤 인근의 벽에 몸을 숨겼다. 전투에 몰두하던 강철늑대들 역시 대장의 명령에 맞춰 빠르게 인근의 잔해나 건물에 몸을 숨겼다.
쿵! 쿵!
“뭐지? 왜 소리가 이렇게 작아?
그러나, 그들이 예상하던 만큼의 폭음과 폭압이 퍼지는 일은 없었다. 의문에 찬 병사들이 엄폐물 뒤로 고개를 힐끔거렸다.
“미친 것들..! 이정도로 독종일 줄이야.”
“의지만큼은 우리 이상이야. ..생각보다 어려워질 수도 있겠어.”
가장 앞에서 유탄을 던졌던 병사들이 조용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광경이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방벽이 커다란 손상 없이 여전히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정도로는 그들을 이 정도로 당황하게 할 순 없었다.
유탄이 있었던 곳에 ‘사람이었던 것’의 잔해가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었다. 붉은 피가 유탄의 폭발 반경 그대로 흩뿌려져 있었다.
방벽에 묻은 핏자국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속삭였다.
“몸으로 ‘덮어’버렸군.”
척탄병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방벽 위에서 누군가가 몸을 내던져 유탄의 폭발을 막아냈다. 동료들을 위해서. 함께 싸우는 이웃들을 위해서.
보통 사람이라면 차마 하지 못할 희생에 몸서리치는 강철늑대들이었으나 한편으론 ‘경의’가 그들 마음 한 쪽에 자리 잡았다.
지금껏 상대를 패잔병, 궁지에 몰린 쥐, 한낱 시민병이라 조롱하던 그들이었다.
하나 그들조차도 보여주기 어려운 투지와 희생을 보여주는 모습이 상대를 진정한 ‘적’으로 대하게 했다.
“..망치병 전진! 도끼병 전진! 총병과 장창병은 철거작업을 엄호해라! 직접 방벽을 깨부순다! 적을 얕보지 마라!”
상황을 파악한 대장이 신속히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에 병사들이 엄폐물을 벗어나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갔다.
추가로 유탄을 던지는 일은 시간만 끌 뿐이었다. 처절한 희생 이후에도 전의를 잃지 않는 모습에선 같은 시도가 무의미함이 드러났다.
결연한 의지가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다. 가치 있는 적이다. 어중간한 투지론 쉽사리 꺾을 수 없다.
쿵! 쿵!
망치와 도끼 소리가 ‘르브셰’의 거리에 메아리쳤다. 방벽을 허무는 병사들 사이로 탄환과 창날이 날아들었으나 그들 역시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누군가 쓰러지면 옆 사람이 도끼와 망치를 이어받아 방벽을 공격했다.
저항군 역시 총병의 엄호사격에 수없이 쓰러져갔다. 총구가 한번 불을 뿜을 때마다 하나의 생명이 꺼져갔다.
의지와 의지, 강철과 강철, 생명과 생명이 서로 부딫혀 깨져가는 모습은 어딘가 애처로우면서도 사람 내면의 긍지를 일깨우는 모습이 있었다.
“제기랄! 방벽이 무너지겠어! 모두 이곳으로 모여!”
그들의 분전에 방벽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틈 사이로 흉흉하면서도 어딘가 고결한 눈들이 반짝였다.
우지끈!
통로 개척에 나서고 3분여, 방벽에 성인 4명이 오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이 뚫렸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나 서로의 얼굴이 보이는 서리에서 서로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들에겐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으리라.
“뚫렸다! 대검병 앞으로! 망치병과 도끼병은 좌우를 보조하면서 통로를 넓혀라!”
“조금만 더 밀어내면 후속 부대가 들어올 수 있다! 더 밀어내라!”
방벽에 뚫린 구멍 사이로 무수한 무기와 사람이 충돌했다. 대장의 외침에 강철늑대들은 대검과 장창을 앞세워 앞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다.
저항군은 그에 맞서 급조한 방패나 창으로 저항해보려 했으나 창벽 사이로 침투한 대검병의 칼날에 창대가 하나씩 부러져갔다.
갑주를 제대로 갖춰 입은 정예병이 상대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끄아아악! 내 팔이! ..절대로 못 비킨다! 절대로! 내 시체를 밟고 가라고!”
그러나 그들의 투지는 여전히 꺾이지 않았다. 팔이 잘려 나간 상처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끼를 휘둘렀다.
“크흑! 아아아악!”
죽음이 가까움을 느낀 자들은 전력을 다해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갑옷 사이로 드러난 살갗을 물어뜯고 힘이 풀려가는 손아귀로 눈구멍을 쑤셨다.
“돌파했다! 후속 부대 진입! 빨리! 일격에 몰아쳐야 한다!”
강철늑대의 대장이 광장의 한 가운데서 외쳤다. 저항군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장비와 경험의 격차는 메울 수 없었다.
시청의 계단까지 밀린 그들은 폭풍 속의 촛불만큼이나 위태로웠다.
아무리 강인한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현실을 초월한 결과는 내놓을 수 없기 마련이다. 설령 그 의지가 눈부시도록 아름답더라도 말이다.
“저기 대장이다! 저자를 잡아라!”
‘검은 팔’을 발견한 대장이 표적을 가리키며 부하들에게 고함쳤다.
“전진! 대열을 만들어!”
그 소리를 들은 강철늑대들이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대열을 이뤄 검은 팔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도망가시오. 검은 팔. 우리가 시간을 끌겠소. 아무리 늙어빠진 몸이라 해도 그대가 빠져나갈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거요.”
검은 팔의 옆에 선 시장이 속삭였다. 어깨를 맞대고 죽음을 결의한 모두의 의지는 절망에 빠져있던 그의 마음마저 건져내었다.
‘사람’으로서 고결한 최후를 맞을 수 있도록.
“그럴 수 없습니다. 제 세 치 혀가 이들을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이들과 함께 죽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책임’입니다.”
“후회하시오?”
시장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모든 고뇌를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은 자의 미소였다.
“조금은요.”
검은 팔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시시각각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그의 마음엔 어떤 동요도 일지 않았다.
“마지막 진격에 나서죠. 저들이 절대로 우릴 잊을 수 없도록. 우리의 이상에 부끄럽지 않은 죽음이 되도록.”
말을 마친 검은 팔이 총을 거꾸로 들곤 둔기처럼 내리칠 기세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탄약은 이미 떨어진 지 오래였다.
“공화국을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먼저 떠나간 이들을 위하여!”
“우리의 이상을 위하여! 영광을! 영광을! 영광을!”
그들의 뒤를 다른 저항군이 함성을 내지르며 뒤따랐다. 손에 들린 것이라곤 벽돌이나 몽둥이가 전부였다.
한 줌밖에 안 되는 그들의 숨은 끊어질 듯 가쁘고 시야는 흐릿했다.
그러나 그들의 최후는 그곳에 있던 모두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다. 평생토록 잊지 못할 영웅의 돌격으로.
“아랑왕께서 납신다! 길을 열어라!”
“아랑왕께 승리를! 포타첸에 승리를!”
완전히 점령된 광장에 도열한 병사들 사이로 장군의 명령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 외침에 병사들이 일거에 양옆으로 흩어지며 구호를 외쳤다.
세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이 모였음에도 안나의 존재감은 모두를 압도했다. 근처의 병사들이 무심코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이들인가? 광장에서 끝없이 항전했다는 자들이.”
“예. 강철늑대를 2백이나 쓰러트렸습니다.”
병사들 틈을 헤치고 나타난 안나가 무릎 꿇려진 포로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뒤에서 대기하던 부관이 즉시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부관의 시선에선 믿기 어려운 전과에 미심쩍어하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광장의 저항군은 필사의 항전 끝에 단 10명을 제외하곤 모두 사망했다.
살아남은 자들마저도 잠시 기절한 탓에 미처 죽을 때까지 싸우지 못해서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죽여라! 아니면 날 풀어줘라! 당장 네년의 목을 물어뜯어 줄 테니!”
“당장 무기를 들어라! 네년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내 몸이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네년을 죽이겠다!”
안나 뒤편의 수천 병사들을 보고도 식지 않는 그들의 투지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들의 육체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온 몸에 베이고 찢긴 상처가 가득했고 지친 근육은 머리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런 상태까지 몰렸음에도 안나의 목을 노려보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들의 모습을 병사들이 숨죽여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느 안전이라고! 포로면 포로답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란 말이다!”
포로들 뒤편에 서 있던 병사가 그들을 강하게 바닥에 짓눌렀다.
그의 행동에 안나의 뒤편에 줄지어 있던 강철늑대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치 있는 적에게 저런 대우는 가당치 않다. 설령 무례를 저지른 포로라 한들 그것을 벌할 권리는 전투에 나선 자신들과 주군에게만 존재한다.
“아니, 되었다. 예를 차릴 만한 상황이 아니니. 일으켜 줘라.”
안나가 손을 뻗어 병사들을 제지했다. 부드러우나 단호한 그녀의 손길에 병사들이 순식간에 자세를 고쳐잡았다.
“경의를 표한다. 너희는 그간 내가 싸워온 어떤 적보다도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안나가 포로들을 향해 가볍게 경례했다. 그 광경에 근처의 모두가 얼어붙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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