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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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작품등록일 :
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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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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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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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122 (대회전의 전조)

DUMMY

 “분명 합리적인 제안이긴 합니다. 통령의 병력은 해봐야 4만이 넘지 않습니다. 남부의 병력이 도착하려면 적어도 1주일은 걸릴 겁니다.”


 ‘철혈백’ 에른스트가 탁자 위의 지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짧게 정돈한 머리에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한 그의 모습은 여전히 당당하면서도 차분하다.


 시간은 그를 쇠락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루 위의 강철을 내리치는 망치처럼 그를 강하게 단조해 냈다.


 젊은 시절의 열정과 패기는 이성과 합쳐져 단단한 강철 검이 되었고, 그동안 흘린 피는 그 강철 검을 담금질했다.


 잘 손질된 검은 갑주가 그의 날카로우면서도 단단한 인상을 더했다. 마치 검이 인간이 된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은 인상이었다.


 “그럼 7만과 4만의 싸움이 되는군요. 충분히 회전을 걸어볼 만한 전력 차이 아닙니까? 우리의 힘이라면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어머님께 레흐 그자의 목을 전리품으로 바칠 수 있겠지요.”


 루카스가 긴 금발을 쓸어올리곤 지도 위에 올라간 말을 움직였다. 젊은 시절의 안나의 얼굴이 그대로 나타난 수려한 용모와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그에게선 어떤 망설임이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젊은 늑대’인 그였다.


 뜨거운 열정과 욕망이 그에게 끝없는 노력과 정진이라는 선물을 선사했으나 성급함과 오만이라는 족쇄 역시 달아놓았다.


 루카스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에른스트가 젊은 시절을 떠올리곤 입꼬리를 올렸다. 어릴 적부터 루카스를 지켜봐 오며 많은 것을 가르친 그다.


 그에게 있어 루카스는 존경해 마지않은 주군의 아들이자 왕국의 후계자이기 이전에 ‘소중한 조카’같은 존재였다. 그의 딸 역시 루카스와 막역한 사이로 전장에 나서는 루카스를 잘 부탁한다고까지 말했었다.


 그러니 더더욱 전투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아직 젊은 왕자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성급해선 안 됩니다. 왕자님. 우리의 전력을 깎아내기 위한 제국군의 술책일지도 모릅니다.”


 에른스트가 나직이, 그러나 확고하게 루카스가 놓친 점을 지적했다.


 “제국은 명목상 우리의 주군 아닙니까? 동맹의 전력을 깎아내서 무슨 이점이 있는 겁니까?”


 루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표했다. 그동안 사령관이나 작은 공동체의 행정관 등의 경험만을 쌓은 그였기에 대국을 보는 능력이 미숙함은 어쩔 수 없었다.


 “아마도 제국은 올레스니카와 포타첸이 전쟁에 힘을 소모한 틈을 타 양쪽 모두를 점거하길 노릴 겁니다.”


 “..이해했습니다. 한데, 그러면 어째서 어머님께선 제국의 신하로 들어가신 겁니까? 왜 덫에 가까운 전쟁을 시작하신 거죠?”


 루카스는 경험이 부족할 뿐 총명하다. 잠시 턱에 손을 올리고 골똘히 생각하자마자 에른스트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제국의 속셈과 전하의 목적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제국을 등에 업지 않고는 올레스니카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제국 역시 우리 도움 없이 올레스니카를 정복하는 것이 불가능하고요.”


 에른스트가 천천히 손가락으로 지도의 지점들을 가리켰다. 하나같이 제국이 장악한다면 대륙 서부에 영구적인 거점을 마련할 수 있는 곳들이었다.


 “제국은 최선의 경우에도 한치라도 더 많은 땅을 요구할 겁니다. 최악의 경우엔 전력을 소진한 우리가 제국에 종속될지도 모르지요.”


 “협조를 부탁해놓고 정작 자신들은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르브셰를 장악한다는 목적을 이미 달성했습니다. 더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제국군이 남쪽에서 시선을 끄는 동안 우린 천천히 피셰 공략에 나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히 레흐의 신병도 우리 손에 들어오겠죠.”


 에른스트가 향후의 진격계획을 지도의 말을 움직여 보여줬다. 움직인 말들은 지도의 여러 지점을 거쳐 ‘피셰’라고 적인 표식 위로 모였다.


 “기억하십시오. 왕자님. 전쟁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죠.”


 “백께선 언제나 제게 가르침을 주시는군요. 뼈에 새기겠습니다.”


 루카스가 가벼운 경례와 함께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어릴 적 그의 종자로 들어가 검을 잡는 법을 배운 이후로 정말로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그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자신의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절 왕자님이라 부르시면서 말을 높이실 겁니까? 전 아직 왕이 아닙니다. 엄연히 철혈백 휘하의 일개 지휘관이죠. 편히 말씀하시지요. 옛날 생각도 나고 좋지 않겠습니까.”


 루카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어렸을 적의 힘든 훈련과 수업은 이젠 좋은 추억이 되었다.


 “‘루카스 이놈아! 다시 검을 그렇게 잡았다간 네놈 볼기짝이 남아나지 않게 해주겠다!’같이요.”


 다른 이들은 극히 어려워하는 철혈백도 루카스에겐 좋은 삼촌이자 스승일 뿐이었다.


 “아니, 언제적 이야기를 하십니까?! ..신하된 도리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 강철같던 에른스트의 평정이 흔들렸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과 뺨에 맺힌 땀이 그가 느끼는 당혹감을 보여줬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에른스트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루카스였다.


 “아직 왕이 아니래도요. 편히 말씀하시기 전까지 계속 이럴 겁니다. ‘당장 뛰지 않으면 무기고 갑옷을 모조리 닦게 만들어 주겠다!’. 또 뭐가 있더라...”


 “..하아. 알겠다. 네녀석은 옛날부터 바뀌질 않는구나. 스승을 놀려먹는 제자가 어딨단 말이냐.”


 에른스트가 작게 한숨을 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루카스의 고집은 굉장했다. 한번 마음을 먹은 이상 쉽사리 철회하진 않을 것이다.


 “훨씬 낫군요. 그럼 전 이만 제 군막으로 돌아..”


 만족한 루카스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그의 말은 끝마쳐지지 못했다.


 “급보! 급보입니다! 제국군이 남부에서 대패하고 북상하고 있다 합니다! 일부 부대는 흩어져서 이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급박한 소식에 경례조차 잊은 전령이 군막의 입구를 거칠게 젖히며 들어왔다.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머리칼과 헐떡이는 숨이 그가 얼마나 서둘러 달려왔는지 보여줬다.


 “..! 자세히 말해라! 제국군이 대패했다니 무슨 소리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식에 에른스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령의 어깨를 붙잡았다. 평소의 그라면 하지 않았을, 가벼운 행동이었으나 위엄을 지킬만한 무게감의 소식이 아니었다.


 루카스 역시 조금 전까지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순식간에 거두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이..”


 전령의 입에서 나온 보고는 에른스트와 루카스에게 망치로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선사했다.





 “2만의 제국군 보급대가 대패한 데다 남쪽의 보급망도 모조리 파괴됐다. 그 여파로 13만 제국군이 우리와 합류하기 위해 북상 중이다. 맞나?”


 에른스트가 의자에 앉으며 전령이 말한 내용을 확인했다. 정신을 가다듬어 충격이 줄긴 했으나 여전히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예. 그중 3만은 본대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이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정찰병들의 보고로는 나흘이면 이곳에 도착할 것이라 합니다.”


 “알겠다. 물러가라.”


 “아랑왕께 영광 있으라.”


 손으로 이마를 짚어 시선을 가린 에른스트가 전령을 물렸다. 전령이 후들거리는 몸을 간신히 추슬러 경례한 뒤 군막을 나섰다.


 그가 떠난 군막 안에는 납덩이 같은 침묵이 깔렸다. 이따금 들려오는 병사들의 말소리나 대장장이가 장비를 정비하는 소리만이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님을 알려줬다.


 “모든 일이 틀어졌군요.”


 침묵이 흐르고 1분여, 루카스가 잔뜩 찌푸린 얼굴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그래. 아주 많이 틀어졌다. 제국군과 전쟁이라도 벌일 게 아닌 이상 우리 보급품과 군량을 나눠줘야만 한다.”


 에른스트 역시 자세를 바꾸지 않고 답했다. 두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절망감 때문이 아니다.


 1분 1초의 시간마저 아까워하며 대책을 계산해내고 있었다. ‘어째서 제국군이 패배했는가?’같은 의문은 머릿속 깊은 곳으로 추방했다. 상황에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을 할 여유 따윈 없었다.


 “길어야 3달이군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래. 그 이상으로 길어졌다간 설령 승리해도 점령지를 유지할 수 없다. 순식간에 반란으로 쫓겨나게 되겠지.”


 에른스트의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군막에 침묵이 깔렸다.


 공화국의 병력은 약 10만. 제국군과 아랑왕군을 합치면 21만. 여전히 큰 전력 차다.


 그러나 상대의 땅에 쳐들어가는 입장에선 아군이 늘어나는 것보다 적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훨씬 크게 다가온다.


 더 많은 수비 병력은 결국 더 많은 견제 병력을 투입해야만 하는 뜻이다. 거기에 공성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는 병력의 숫자엔 한계가 있다.


 결국 공성에 드는 시간은 비슷하면서도 보급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어 버린다.


 이대론 상대가 성에 틀어박혀 기병대로 공성 중인 병력을 괴롭히기만 해줘도 패배가 확실해진다.


 이때를 기점으로, 에른스트는 기존의 전략을 수정해야 함을 직감했다. 안정적인 진격에서 대규모 병력을 이용한 단기 결전으로.





 “지금 여기서 레흐의 병력을 분쇄해야 합니다. 분명 제국군도 그런 생각으로 우리에게 협공을 제안했을 겁니다.”


 루카스 역시 같은 결론을 내놓은 듯 을파소가 보낸 쪽지를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제기랄. 레흐 쪽으로 움직이긴 해야겠군. 제국 놈들이 딴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니라면 좋겠다만.”


 에른스트가 혀를 차며 군막의 천장을 쳐다보았다. 상황이 이렇게 돼버린 이상 레흐의 군사와 일전을 치르는 것 외의 선택지는 없어졌다.


 “적당히 명분을 붙여서 제국군이 선공을 걸도록 해보죠. 우리의 기병이 더 강하니 후방을 노리겠다는 식으로요.”


 “그게 좋겠구나. 거기에 전열과 지휘부 사이의 간격을 좁혀야겠다. 만약 제국이 우릴 총알받이로 쓰려고 하면 즉시 후퇴할 수 있도록 말이야.”


 에른스트와 루카스가 짧은 시간 안에 ‘묘안’을 생각해냈다.


 그들이 석준의 속내를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휘부 주변에 포진한 다수의 병사는 석준의 계획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 확실했다.


 “백께서 군을 움직이시는 동안 전 기병 1만을 이끌고 레흐가 남하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겠습니다. 나흘 정도라면 충분히 발을 묶을 수 있습니다”


 “부탁하마.”


 “부탁하지 마십시오. 사령관이시잖습니까. 명령하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루카스가 당당한 자세로 군막을 나섰다. 그의 걸음걸이에선 미묘한 고양감과 자신감, 호승심이 전해졌다.


 마치 그동안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상대와 공놀이를 하러 가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레흐와의 전투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구나. 즐거워 보이기까지 해.”


 “들켰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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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붉은 손 - 127 (초원의 회전 5) 24.07.13 1 0 11쪽
127 붉은 손 - 126 (초원의 회전 4) 24.07.10 4 0 11쪽
126 붉은 손 - 125 (초원의 회전 3) 24.07.05 6 0 11쪽
125 붉은 손 - 124 (초원의 회전 2) 24.06.29 6 0 11쪽
124 붉은 손 - 123 (초원의 회전 1) 24.06.25 5 0 12쪽
» 붉은 손 - 122 (대회전의 전조) 24.06.22 7 0 11쪽
122 붉은 손 - 121 (초원의 음모) 24.06.20 6 0 11쪽
121 붉은 손 - 120 (르브셰 공성전 4) 24.06.18 7 0 12쪽
120 붉은 손 - 119 (르브셰 공성전 3) 24.06.08 7 0 11쪽
119 붉은 손 - 118 (르브셰 공성전 2) 24.06.04 9 0 12쪽
118 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24.06.01 9 0 12쪽
117 붉은 손 - 116 (까마귀 무리) 24.05.30 9 0 11쪽
116 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24.05.28 7 0 12쪽
115 붉은 손 - 114 (승전보) 24.05.25 9 0 12쪽
114 붉은 손 - 113 (최초의 공화국 7) 24.05.22 8 0 11쪽
113 붉은 손 - 112 (최초의 공화국 6) 24.05.18 10 0 11쪽
112 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24.05.14 11 0 11쪽
111 붉은 손 - 110 (최초의 공화국 4) 24.05.11 12 0 11쪽
110 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24.05.04 10 0 11쪽
109 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24.04.30 13 0 12쪽
108 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24.04.26 13 0 11쪽
107 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24.04.24 14 0 11쪽
106 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24.04.20 13 0 11쪽
105 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24.04.19 16 0 11쪽
104 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24.04.16 17 0 11쪽
103 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24.04.10 18 0 11쪽
102 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24.03.31 19 0 11쪽
101 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24.03.28 18 0 11쪽
100 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24.03.22 18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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