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

황건적 무리 백만여 명이 연주로 몰려갔을 때, 청주에도 황건적은 준동하고 있었다.
“자의야. 네가 요동으로 떠나 있는 동안 공 북해가 나를 보살펴 주는 정성이 오랜 지인의 그것보다 나았단다. 그런 공 북해가 지금 곤란한 처지에 빠져 있으니 네가 마땅히 그를 도와야 하지 않겠니?”
“예, 어머니. 소자가 북해로 달려가겠습니다.”
태사자는 본디 동래군의 관리였는데 청주와 동래군 간에 시비가 생겨 낙양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양쪽의 관리 중 먼저 도착하는 쪽이 이득을 얻는 상황인지라 꾀를 부려 청주 사신의 장계를 훼손했고, 이후 화를 당할까 두려워 요동으로 피신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공융이 기특해하며 그간 태사자의 모친을 돌봐줬으니, 이제 그 은혜를 갚으라는 얘기였다.
“이럇!”
태사자가 말을 달려 북해국 도창현에 도착하니, 과연 황건적이 그곳을 포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틈이 보였던 것일까.
순식간에 돌파해 성으로 들어간 태사자였다.
“유현덕에게 사신을 보내자는 말만 하지 말고! 저 포위망을 뚫고 나갈 용사는 진정 없는 건가?”
“도적떼의 숫자가 워낙 많은지라···.”
성에 갇힌 공융이 답답해할 때, 태사자가 입성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활로를 찾았다는 생각에 반갑게 맞이하니.
“공 북해께서 제 어머니를 돌봐주신 은혜를 이렇게 갚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태사자는 담담하게 대답하고 평원으로 달릴 준비를 했다.
쉬익!
태사자는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가 과녁을 꽂고 그곳에 활을 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성으로 돌아갔다.
공격을 나오는 줄 알고 혼비백산했던 황건적들은 별일 아니었다며 긴장을 풀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활을 쏘니 일상처럼 여긴 황건적은 아예 누워서 구경하기도 했는데.
그때 태사자는 말을 내달렸다.
방심한 황건적은 쫓지 못했고, 태사자는 그대로 평원으로 향했다.
태사자의 구원요청을 받은 유비는 내심 기뻤으나 겉으로는 웃음을 감추고 엄숙하게 말했다.
“공 북해께서 이 유현덕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는군요.”
유비는 관우를 불러 3천의 군사를 내어주며 북해를 도울 것을 명했다.
그리고 은밀히 이르기를.
“운장, 끝까지 황건적을 쫓을 필요는 없어. 포로를 잡는다면 모를까, 굳이 내 병사를 상하게 하지 말라고. 알겠지?”
“물론입니다, 형님.”
“그리고 저 태사자 말인데, 어떻게 회유해 볼 수 없을까? 용기도 있고 무예도 제법인 것 같아.”
명성과 인재를 탐내던 유비였기에 손해는 적게 보면서도 가능한 이득을 취하려 했다.
관우가 노력해 보겠다는 말로 답하고 북해로 출발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황건적 수장 관해는 원군을 보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으며, 태사자도 유비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공융에게 보고하러 갔으니까.
“자의, 그대 덕분에 북해가 무사할 수 있었네. 그나저나 어떤가. 이제 고향에 정착할 때가 되지 않았나?”
공융이 임관을 제의했으나 태사자는 거절하며 말했다.
“그저 은혜에 보답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남쪽에 동향 사람이 있어 그를 만나러 가려 합니다.”
그 말과 함께 태사자는 양주자사 유요를 만나러 갔으나.
“내가 태사자를 중용한다면 허자장이 비웃을 거라오.”
유요는 그렇게 말하며 태사자를 홀대했다.
허자장의 인물평이 유명하다지만, 전 진국상 허창의 친족답게 가끔은 세심히 살피지 못하고 태사자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내렸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
조조가 연주목에 올랐다는 보고를 받았다.
황건적은 다른 건 몰라도 숫자만큼은 많아 조심해야 할 적이다.
하지만 결국 먹고 살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도적떼.
성만 지키며 적을 뺑뺑이 돌리면 보급이란 개념이 없는 그들은 저절로 무너져 내릴 것인데 말이야.
“예전에 만백녕이 유대를 자만심이 넘친다고 평하긴 했어도, 그토록 허망하게 갈 줄이야.”
“난세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일 뿐이었습니다.”
희지재가 유대를 폄하하고, 조조에 대해 보고했다.
“조조의 책사 진궁이 동군태수 조조를 연주목으로 추대하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제북상 포신이 이에 동조하며 연주의 호족들을 규합하여 표를 올렸으니, 곧 조정에서도 정식으로 허가가 날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정은 아직 원소와 겨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지재의 말대로 조조를 연주목으로 임명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겠지.”
어차피 조조와 연주 모두 원소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저희끼리 해 먹는 일인데 조정이 결사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황건적의 대비는 해야겠지. 그들이 연주의 어디까지 들어왔던가?”
“임성국까지 진격한 뒤 다시 북으로 올라갔습니다, 전하.”
“동평국인가. 그렇다고 임성 부근을 마냥 놔두기는 그렇군.”
임성국은 소패성 인근, 즉 패국과 가깝다.
황건적이 서남쪽으로 남하하면 양국과 닿게 되고.
희지재가 먼저 대비할 곳을 말했다.
“패국은 현재 만백녕이 지키고 있습니다. 따로 원군을 보내지 않아도 만백녕이라면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양국에만 병사를 보내면 되겠군.”
양국을 책임지고 있는 변양은 딱히 군재를 보여준 적이 없어 그 방면으로는 신뢰가 부족했다.
희지재가 인선을 물었다.
“어떤 장수를 보내려 하십니까.”
믿고 쓰는 거야 장료긴 하지만 황건적 경계용으로 쓰기엔 너무 과하다.
조조와의 전쟁도 기다리고 있으니 주력군의 병마를 담금질하는 일이 더 중요하기도 하고.
“진숙지를 대장으로, 부장은 가양도로 하지.”
진도와 가규라면 충분할 것이다.
보낼 장수를 결정하자 희지재가 살짝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설마 노숙을 보낼 것 같았나?
“지재, 자경이 떠날까 걱정되었나 보지?”
“아, 아니옵니다, 전하. 그저 전하의 합당한 인선에 감탄했을 뿐입니다.”
희지재가 맡고 있던 첩보 조직은 최근 영입한 노숙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도 잠깐 노숙에게 이 일을 맡길까 생각했을 만큼.
하지만 안 되지, 안 돼.
오나라의 최고사령관은 주사위 굴려서 딴 게 아닐 것이다.
노숙의 자리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며 희지재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이제부터는 연주의 동향에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게나. 이건 황건적을 물리치고 나서도 이어져야 할 것이야.”
“물론입니다, 전하. 인원을 더 충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놓치는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첩보원이야 다들 쓰고 있겠지만, 중요시하는 대상은 각자 다를 것이다.
우리에겐 그 중요하게 여기는 대상이 연주였고.
수뇌부라면 다들 알고 있는 다음 상대였으니까.
그렇게 사방의 동향을 신경 쓰며 내치와 군의 조련에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났다.
***
유표가 실질적인 형주자사로 활동한 것이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번성을 개수해 양번의 수비 태세를 갖추기는커녕, 양양성의 성벽도 높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원술의 공격은 유표에게 치명적이었다.
요격 나온 강하태수 황조가 격퇴된 후 여포가 기습적으로 성벽을 오르니 양양성은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어서 올라와, 이것들아!”
여포가 성벽을 올라 창을 휘두르며 원술군을 독촉했다.
“형님, 천천히 좀 가라니까! 혼자 내달리다 뭔 꼴을 당하려고!”
위월이 여포의 급한 성미를 단속해 보려 했으나.
여포는 주위의 병사를 쓸어버리며 말했다.
“이걸 봐라. 이 잡병들을. 북방에선 마을 하나도 제대로 못 지킬 것들이 여기엔 잔뜩 있구나! 크하하!”
여포를 제지하기 위해 달려온 장수도, 어깨를 맞대고 저항하려던 병사도 모두 소용없었다.
여포의 활약에 힘입어 양양성의 성문이 뚫렸고, 성내의 주민들은 약탈에 시달렸다.
성내가 아비규환이 되었으나, 유표는 간신히 몸을 뺄 수 있었다.
하지만 호족들은 두 갈래로 갈렸다.
“자네는 어쩔 텐가?”
“채가는? 괴가는 어찌하고 있어?”
“그 둘이야 대놓고 원술에게 적대한 이들 아닌가. 진즉에 유경승과 탈출했네. 우리도 어서 결정해야 해. 남을 건지, 아니면 남쪽으로 피신할 것인지를.”
원술과 척지지 않아 양양에 남는 자들, 혹은 유표를 따라 강릉으로 도주하는 이들로.
그러나 여포의 공격은 양양에서 끝나지 않았다.
“보낼 수 없다, 크윽!”
“이런, 유 중랑장! 퇴각, 퇴각하라!”
후위를 맡은 유반이 부상을 당하자, 그의 부장 황충은 퇴각을 명했다.
이대로 퇴각하면 강릉성조차 지키지 못한다.
황충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이 병력이 사라지면 유표의 재기 가능성은 영영 없어지는 것이었다.
후위대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유표는 이를 악물었다.
“장강을 건널 수밖에 없겠군. 그대들은 어찌할 것인가?”
유표는 채모와 괴월에게 뜻을 물었으나,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다른 군웅이라면 모를까, 원술만큼은 자신들을 용서치 않을 테니까.
“사군(주목, 자사의 호칭)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유표는 장강을 넘어 무릉군으로 향했다.
기존의 형주자사 치소에 도달하여 여장을 풀었으나 유표의 한은 풀리지 않았다.
“이놈, 원술아. 반드시 네놈에게 복수할 것이니라. 쓸개를 씹어 삼키며 때를 기다릴 것이니, 그때까지 목을 씻고 기다려야 할 것이야.”
유표는 원독에 찬 저주를 퍼부으며 형남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외로이 남겨진 한 장수가 있었다.
여포가 남양에서 양양으로 직행하는 바람에 소외된 그.
신야 동쪽 호양현에 주둔하고 있던 문빙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일단 강하 쪽으로 가봐야 하나.”
문빙의 움직임은 황조가 원술에게 강하태수의 인수를 바치고 항복하면서 멈춰질 수밖에 없었지만.
***
그간 벌어진 변화에 대해 희지재가 보고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연주의 상황부터.
“그렇게 제북상 포신이 죽고 조조는 패퇴하는 듯했습니다.”
포신은 조조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구만.
조조가 서영에게 질 때 같이 싸우다 동생이 죽지를 않나, 이번엔 연주목으로 만들어 주며 돕다가 본인마저 전사하다니.
“하지만 조조는 이내 포신의 병사마저 흡수하고 단속하였습니다. 이후 복병을 계속 사용하면서 차츰차츰 적을 패퇴시키는 등 여러 차례 꺾고 마침내 연주 최북단인 제북국에 이르자 황건적 백만 명이 조조에게 항복했습니다.”
그렇게 연주에 관련된 보고는 끝이 났다.
그나저나 백만이라니, 어마어마한 숫자네.
물론 숫자가 팩트는 아니겠지.
“지재, 실제로는 얼마나 될 것 같나?”
“잘해야 이삼십 만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가족이 모두 포함된 숫자니, 그중에서 병력을 뽑아낸다 해도 삼사 만이 전부일 것입니다, 전하.”
희지재가 냉정하게 따졌다고 하더라도, 절대 백만 명의 반은 되지 않을 것이다.
연주가 그간 피폐해진 만큼 예년 수준으로 가호가 회복되는 것도 아닐 테고.
하지만.
“조조가 드디어 제 기반을 세웠군.”
“그간 원소의 객장 노릇하며 만든 수천의 병력이 조조에겐 전부였으니까요. 청주 황건적을 정예로 만들고, 연주의 호족에게 부곡을 받아내면 조조도 어엿한 대군벌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조조도 이제 쉽게 볼 수 없는 상대야. 더구나 원소에게 종군하며 쌓아온 경험과 이번에 보여준 기책을 더하면 그 능력을 알 수 있지. 지재도 조조를 상대할 때는 절대 방심하지 말게나.”
삼국지 최고의 군략가를 꼽을 때 대부분의 사람이 조조를 뽑는다.
아니더라도 다섯 손가락 밖으로 벗어나지는 않았고.
신하들이 그런 조조를 무시해서 방심하면 어쩌나 했는데 이번 연주의 전쟁을 보고 다들 경각심을 가지는 중이라 다행이었지.
“원술도 이번에 대승을 거뒀다고 했지?”
다음 보고를 기다리고 있던 희지재에게 물었다.
“여포가 원술의 밑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여포를 선봉으로 삼아 양양성을 비롯, 남군 전체를 점령했으며 강하군의 항복까지 받아냈다는 첩보입니다.”
“그럼 형북이 모두 넘어간 게로군. 원술의 저력이 죽지 않았어.”
손견이 죽은 뒤로는 쉽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형남사군에서 유표가 버티고 있으나, 워낙 낙후된 지역인지라 군을 크게 일으키기 힘듭니다. 다만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면 상대가 원술이라는 점이겠죠.”
그리고 여포도 있지.
그만큼 여러 사람을 배신했어도 아직 세상에 보여준 것이 적은 이가 여포.
실제로는 더 막장이다.
삼국지 대표 막장인 두 사람, 원술과 여포의 조합이라.
“여남에 인력을 파견할 필요가 있겠군. 형주에서 오는 유민이 늘 것 같아.”
“조정에 안건으로 올려 조치하겠습니다, 전하.”
사람됨이 막장이든 아니든 현재 원술은 우리와 동맹관계다.
마냥 신뢰할 수는 없으나 원소와 붙으려던 유표보다는 낫지.
나름 희소식이라 생각하며 다른 세력의 움직임을 마저 확인했다.
“서주는 어떤가. 도겸이 출진했다는 말까지는 들었네.”
“연주가 혼란한 틈을 타 다시 황하 너머 발간으로 진출했습니다.”
사실 조조를 잡는 일만 생각한다면 지금 뒤통수를 쳤어도 됐다.
하지만 황건적은 천하의 공적.
준군벌 취급받는 장연의 흑산적이야 어찌 넘어간다 해도 황건적과 뜻을 함께하면 즉시 아웃이다.
황건적과 만나면 조조의 뒤통수는 고사하고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는 거지.
그런데도 연주의 틈을 굳이 파고들다니.
이건 도겸의 깡이 좋은 건지, 아니면 꼭 가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건지.
의문은 희지재가 풀어줬다.
“병주 쪽도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 뭔가 노림수가 있는 듯합니다.”
“원소를 상대할 새로운 방책이라도 있는 거로군.”
원소를 견제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성과를 내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공손찬이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으니 큰일이다.
“공손찬은 여전히 유우와 사이가 안 좋은가.”
“아직은 공손찬이 도발하는 정도이지만, 유우가 언제까지 참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공손찬은 먼저 공격해 오길 바라고 있을 수도 있겠군요.”
듣기만 했는데도 천하의 정세가 복잡했다.
왕윤은 무슨 재주로 이걸 꿰고 엮어서 조정 밑으로 넣겠다는 건지.
물론 그걸 위해서 왕윤이 당근 정도는 제시한다.
“조정의 사자가 곧 도착한다고 했지?”
“예주목과 좌장군이 되심을 미리 경하드립니다, 전하.”
희지재가 나에게 축하 인사를 했으나 이건 나만 관직을 받는 것이 아니다.
“칙서를 받는 날이 진국의 신료가 대거 승차하는 날이 되겠군.”
희지재와 난 웃으며 그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조정의 사신이 칙서를 읽은 날, 우리가 가장 심각하게 논의한 일은 다른 것이었다.
“어찌 사소한 원한 때문에 가문을 멸족시킨다는 말입니까.”
“부도덕한 조조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원충도, 그리고 환엽도. 세상에 이름난 선비일진대 그렇게 모욕을 주다니요.”
조조가 연주목이 되고 나서 한 일은 그 쪼잔한 심보를 널리 떨치는 것이었으니까.
Comment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