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 (1)

미국에 있는 건물들은 낮고 넓은 구조가 대부분이다.
남아도는 게 땅인데 굳이 돈을 많이 들여 고층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냐는 식.
엔터프라이즈 렌터카도 넓은 대지 위에 큼직한 창고형 건물로 지어져 있었다.
건물 밖 주차장에도 전시된 차량이 많았지만, 내부에도 다양한 차종이 전시되어 있었다.
워낙 전시장이 넓어서 그런지 진호와 민소영이 안으로 들어가도 따로 안내하는 사람이 없었다.
차를 보고 마음에 들면 사무실로 가서 상담을 나누는 방식인가?
민소영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픽업트럭들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포드의 F150을 비롯해서 쉐보레 실버라도, 닷지 램 등 인기 차종들이 줄지어 진열되어 있었다.
미국에서는 한국처럼 대형 가전제품을 주문하면 무료로 배송하고 설치해주는 경우가 드물다.
상당한 추가 요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차에 실어 가는 걸 선호한다.
커다란 짐을 실으려면 픽업트럭이 편하다.
비포장도로를 거침없이 달릴 수 있고 다양한 용도로 활용될 수 있는 것도 픽업트럭의 장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커다란 픽업트럭은 짐이 되기 쉽지만, 미국에서는 주차 스트레스가 적어서 문제 되지 않는다.
물론 시내 중심가에 사는 사람은 예외겠지만.
차량을 구경하고 있으니 멀리서 누군가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배가 산처럼 나오고 키가 큰 백인 남성이었다.
"혹시 메기가 소개해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전 빌이라고 합니다."
아까 식당에서 일하던 웨이트리스 이름이 메기였나보다.
아무튼 그녀가 말한 아는 오빠의 이름은 빌이 맞았다.
"네. 차를 좀 렌트하려고 합니다."
"어떤 용도로 쓰시려고 합니까? 관광? 아니면 여행?"
"네. 주로 여행 용도로 쓸 생각입니다."
"그러면 짐도 많이 실을 수 있고 편안한 SUV 모델을 고르시는 게 좋죠."
빌은 조금 떨어진 곳에 전시되어있는 차량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요즘 인기 있는 모델은 지프 그랜드 체로키, 도요타 하이랜더입니다. 둘 다 성능도 뛰어나고 잔고장이 없어서 사람들이 좋아해요."
진호는 일본 차량은 별로였다.
굳이 미국까지 와서 일본 차를 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충전이 조금 귀찮을 수도 있지만, 오토 파일럿 기능이 있는 테슬라 모델 X도 사람들이 선호합니다. 요즘 어딜 가든지 충전소가 있으니까 조금 여유 있게 다니시면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겁니다."
전기차?
진호의 귀가 솔깃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 오니까 테슬라 차량이 부쩍 눈에 많이 띈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테슬라의 본고장이라서 그런가?
"모델 X를 한번 보고 싶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빌을 따라가 보니 전시된 차량은 검은색 테슬라 모델 X였다.
빌이 리모컨을 누르자 뒷문이 갈매기 날개처럼 스르르 위로 열렸다.
문이 그대로 올라간다면 옆 차를 긁을 수도 있지만, 살짝 접히면서 올라가기에 좁은 공간에서도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오. 신기하네."
"미리 설정을 해두면 차량 근처에 갔을 때 문이 자동으로 열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 타보십시오."
진호가 차량에 탑승하자 빌이 말했다.
"브레이크를 밟아 보십시오."
진호가 브레이크를 닫자 문이 스스로 닫혔다.
그런데 기어가 보이지 않았다.
진호가 뭔가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자 빌이 웃으면서 말했다.
"혹시 기어를 찾는 거라면 터치스크린 속에 있습니다. 모든 컨트롤은 핸들과 중앙에 있는 대형 터치스크린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방향지시등 레버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은 적응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진호는 전자기기를 다루는 데는 빨리 적응하는 편이라 메뉴를 몇 번 흝어보고 금방 사용 방법을 파악할 수 있었다.
프로그래밍을 제대로 하면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사용자가 직관적으로 사용 방법을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테슬라의 유저 인터페이스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물리적인 버튼이 없어서 운전 중에 기능을 조작하려면 조금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뭐 적응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밖에 나와서 둘러보니 조립 상태나 단차가 조금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거의 2억에 가까운 차임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인 완성도는 기존의 차량에 비해서는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신 신기술이 대거 들어간 측면도 있기에 진호는 테슬라 모델 X를 빌리기로 결정했다.
"괜찮네요. 이 차로 할게요."
"그럼 이쪽으로 오십시오."
빌은 진호에게 렌트비와 세금, 보험료 등을 설명해줬다.
차량의 렌트비는 한 달로 계산하니 거의 9,000달러에 육박했고 거기에 세금과 보험료까지 더하니 14,000달러 정도가 나왔다.
이럴 거면 그냥 차를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행자 신분으로 차를 사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금액이 상당히 나왔네요. 제 권한으로 20% 할인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부담이 조금 줄어들 겁니다."
100달러 팁을 준 것에 비해서는 효과가 컸다.
딱히 할인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상대의 호의를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고맙습니다."
진호는 신청서를 작성하고 결제를 하기 위해 카드를 건넸다.
그때 누군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빌. 아침부터 바쁘군."
"네. 사장님. 테슬라 모델 X를 한 달 빌리려는 분이 오셨습니다."
"오. 그런가?"
사장은 진호의 얼굴을 보고 약간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혹시 며칠 전에 마트에서 무장 괴한을 잡으신 분 아닙니까?"
"아. 네. 그때 거기 계셨나요?"
"괴한을 처치하는 걸 제가 직접 봤죠. 제가 엄지손가락을 들어주니까 미소를 지으며 지나가시던데요."
기억이 났다.
잠시 눈을 마주친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인가 보다.
사장은 진호가 작성한 신청서를 보더니 총금액 항목에 줄을 그었다.
"이분은 모두 공짜로 해드려."
"사장님?"
빌이 놀라서 사장을 바라봤다.
"그때 마트에는 제 가족들도 모두 있었습니다. 만일 미스터 킴께서 범인들을 제압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모두 죽었을 수 있었어요. 앞으로 미스터 킴이 사용하는 차량은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금액이 상당한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죽으면 돈이 소용없습니다. 생명의 은인에게 이 정도면 약소합니다. 하하하하."
"고맙습니다. 앞으로 미국에서 차를 살 일이 있으면 사장님께 구매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호는 사장과 악수하고 밖으로 나왔다.
빌은 차량을 주차장까지 이동시켜줬다.
"이 카드가 차량 키입니다. 혹시 운행하시다가 불편한 점이 있으면 키 뒷면에 있는 스티커를 보고 전화하시면 됩니다."
"네. 고맙습니다."
진호는 모델 X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엔진 소음이 없어서 차량 내부는 아주 조용했다.
민소영은 기분이 좋은 듯 크게 웃었다.
"와. 오빠. 대박이네요. 잘하면 엘에이에서는 돈 없어도 먹고살겠는데요? 호텔도 공짜, 밥도 공짜, 차도 공짜. 하하하하하!"
"공짜 좋아하다가 머리 벗겨진다. 소영아."
그때 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호 님. 전기차를 빌리셨군요. 이 차를 제가 조금 손 봐도 되겠습니까?]
"이걸 손 볼 게 있나?"
[제가 확인해보니 소프트웨어를 바꿔주면 성능과 주행거리를 3배 이상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이 차량은 롱레인지 모델이므로 완충 시 주행거리는 478킬로미터에 달한다.
3배 이상으로 주행거리가 늘어난다면, 1,50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다는 말이다.
"좋긴 한데 ... 나중에 반납할 때는 원상복구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잠시 차를 세워주시겠습니까?]
"알았어."
진호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테슬라의 메인 스크린이 잠시 꺼졌다가 리부팅하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화면에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갈색 머리에 중성적인 느낌의 아이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
"조이?"
[네. 진호 님. 차량 인터페이스를 조금 바꿔봤어요. 이제 이 차는 제가 운전을 대신해드릴 수 있으니 편하게 쉬셔도 됩니다.]
"오토 파일럿을 넘어서 인공지능 파일럿인가? 하하하!"
"조이. 얼굴을 보니 반갑네."
[소영 님도 반가워요.]
"조이. 너는 성별이 어떻게 되니?"
민소영이 묻자 조이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따로 성별이 없습니다. 불편하시다면 한쪽 성별을 지정해주십시오.]
조이가 진호를 바라봤다.
"난 상관없어. 조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저는 딱히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제 임무에 충실할 뿐이죠.]
"그럼 그대로 있어. 지금 모습도 좋아."
[네. 진호 님. 그럼 어디로 갈까요?]
"도시를 한 바퀴 돌아줄래? 구경도 할 겸."
[네. 알겠습니다.]
모델 X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
그날 저녁 맥스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스터 킴. 날세.
"맥스. 생각보다 일찍 전화주셨군요."
-자네에 대한 조사가 빨리 끝났어. 그리 특별한 이력이 없는 게 오히려 특이하더군. 카투사로 근무한 기록도 있고, 최근에 무죄로 석방되었으니 전과기록도 없어서 빨리 승인이 났어.
"다행이군요."
-다만 바우만이 조금 제동을 걸었어. 자네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하더군. 그래서 약간의 테스트를 거쳐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으니 양해하기 바라네.
"테스트요?"
-별건 아니야. 우리가 지정하는 곳에서 이 주 정도 훈련을 받아보고 그 성적을 보겠다는 말일세. 자네 정도의 능력이라면 쉽게 통과할 거야.
난데없이 훈련이라니 ... 다시 군대에 가라는 말처럼 들렸다.
어쨌든 기왕 하기로 했으니 어정쩡한 반응을 보일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자네를 데리러 사람들이 갈 걸세. 그 사람들을 따라가면 되네.
"네."
-아. 그리고 바우만에게 자네 전화번호를 알려줬으니까 나중에 전화가 갈 걸세.
전화 통화를 끊고 진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옆에 있던 민소영이 물었다.
민소영은 자기 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나 수련을 핑계로 진호의 방에서 계속 뒹굴고 있었다.
"오빠. 왜 그래요?"
"이 주 정도 훈련을 시켜보고 최종 결정을 하겠다는군. 자기들이 먼저 제안해놓고 테스트를 또 하는 건 뭐야?"
"이 주? 그럼 그동안 나는 혼자 있어야 하네요. 심심해서 어쩌지?"
"아까 검색해보니 시외에 사격 훈련장이 있더라. 거기 가서 사격을 배워보는 건 어때?"
"뭐 그거라도 하면서 시간을 때워야죠."
"나는 내일 아침에 가야 하는데 소영이 혼자 갈 수 있겠니?"
"흐흐흐. 요즘 내 실력 알면서 ..."
민소영은 진호가 계속 산양삼을 흡수해서 마나를 집어넣어 준 덕분에 소드 유저 중급이 되어 있었다.
진호가 깨달음을 얻기 전의 수준과 비슷했다.
진호가 그 수준으로 무기를 든 조폭 6명을 작살낸 것을 감안하면 굉장한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조이의 도움을 받지 못하니 진호와 비교할 정도는 안 되지만, 그래도 이제 맨몸으로 민소영을 이길 사람은 극소수라고 봐야 한다.
"그래도 여긴 총기가 있는 나라니 조심해야 해."
"알았어요. 조이가 테슬라와 연결되어 있으니 그래도 좀 안심이 돼요."
진호가 떠나있는 동안에도 조이는 테슬라 모델 X를 통해 민소영과 대화할 수 있다.
조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걱정할 일이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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