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제35화
서울을 연고지로 하면 유리한 점이 있다.
“결국 피자를 쏘기로 한 거야?”
인프라 구축이 국내 원탑이라 야구 외에도 즐길 거리가 많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난 그때 분명 봤어. 피자를 얻어먹은 야수 친구들이 어떤 경기를 펼쳤는지 말이야.”
야구와 관련된 이야기다. 10개 구단이 참가하는 한국 프로 야구판에서 서울, 수도권에 연고지를 두는 팀이 무려 5개 팀이다.
절반이 서울, 그리고 서울 인근에 몰려 있다는 뜻이다.
“아하.”
치르는 경기의 절반을 원정에서 치러야 하는 일정에서, 원정 거리가 가까운 팀이 4팀이나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큰 이점이다.
몇몇 팬들은 손바닥만 한 땅덩이에서 원정 거리 드립 치기 있냐고 비웃는다.
하지만 6~7개월간 매일매일 버스 타고 장거리 이동을 해보면 생각이 좀 달라질 수도 있을 거다.
“만약 오늘 피자값을 해내지 못한다면 놈들의 식사에 설사약을 탈 생각이야.”
“···몰수 게임을 만들고 싶어?”
지금 우리 팀의 일정이 그러하다. 우린 우천 취소로 1경기밖에 치르지 못하긴 했지만, 수원 레이븐스와 원정 시리즈를 치렀다.
그리고 오늘부터 고척에서 3연전을 준비해야 하지.
고척에서 경기가 끝나면 잠실 원정 경기다.
그리즐리스가 홈팀 자격을 가진 경기인데, 사실 우리 입장에서는 홈경기나 다름없잖아.
“억지로 토하게 만들 순 없으니 빠르게 내보내기라도 해야지.”
“······.”
3개의 시리즈가 모두 원정 시리즈인데 수원에서 치른 시리즈를 제외하면 죄다 서울에서 치르는 경기라는 이야기다.
수원에서 뛴 경기를 원정이라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심지어 그리즐리스하고 경기를 끝낸 뒤에는 다시 홈 연전을 치르게 된다. 12경기를 서울과 그 인근에서 치른다는 뜻이지.
힘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이래서 서울 공화국이라 하나 봅니다. 서울이 최고야. 늘 새로워. 짜릿해.
“문제 있어? 그냥 먹은 만큼 값을 하면 그만인데.”
“···난 네가 꽤 정상인 범주에 들어가는 친구라 생각했어.”
아무튼, 지방 연고지의 팀들이 보기에는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혹은 부러운) 원정 일정을 치르게 된 우리 팀은 경기를 앞두고 오늘 선발로 나서는 윈들러가 쏘는 피자를 먹게 되었다.
“그래?”
“근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근데 이 미친놈이 피자를 쏘면서 하는 말 좀 들어보라지.
피자를 얻어먹고 이기지 못하면 설사약을 타겠다고? 이게 보통 사람이 할 만한 발상인가?
“흠, 그건 오해야.”
“글쎄.”
“잘 생각해 봐, 친구.”
“뭘?”
쓸데없이 진지한 윈들러는 거창하게 썰을 풀기 시작했다.
“우린 프로야. 프로페셔널이라고. 그렇지?”
“그런데?”
“프로란 받아먹은 값을 하는 게 프로야. 동의해?”
“···그래서?”
“밥값을 해내지 못한다면 설사약 좀 먹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게 아닐까?”
“없겠냐, 이 미친놈아.”
프로페셔널을 이상한 데 갖다 붙이고 있네, 이 미친 미국인이. 역시 투수 중에 정상인을 찾기 힘든 건 사실인 것 같다. 나만 빼고.
* * *
놀랍게도 피자의 효과는 엄청났다.
“오늘 다들 미쳤네.”
예전에 미첼이 처음 피자를 돌렸을 때도 타자들이 미쳐 날뛰었는데, 오늘도 그런 양상이다.
“실화냐.”
1회 초 공격에서 가볍게 1점을 뽑아낸 우리 팀은, 2회 초 공격에서 타자 일순을 하며 5점을 뽑아냈다.
이후에도 야금야금, 점수를 뜯어내며 7회 초 공격이 끝난 시점에서 무려 12점을 뽑아냈지.
심지어 올해 페이스가 좋던 서울 데빌즈의 외국인 1선발 라이언 브라운을 상대로 만들어 낸 쾌거였다.
“좋아. 놈들은 피자를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군.”
“······.”
오늘 6이닝 1실점으로 훌륭한 피칭을 선보인 윈들러는 꽤 만족한 느낌이었다.
포수로 나선 장우 형이 좀 불안한 모습을 노출하긴 했지만, 넉넉한 득점 지원에 마음이 푸근해진 윈들러는 크게 개의치 않고 씩씩하게 던졌다.
큰 이변이 없다면 오늘 경기에서 시즌 2승째를 따낼 예정이다.
“그래도 매번 피자를 쏘는 건 나도 좀 부담이긴 한데.”
“···그보단 설사약으로 협박해 보는 건 어때? 너 등판할 때 삽질하는 사람 식사에 설사약 탄다고 얘기하면 다들 죽어라 뛰지 않을까?”
이게 단순히 피자를 얻어먹어서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아니면 오늘 따라 우연히 타자들의 감이 단체로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팀 분위기를 조지던 좆태규의 징계가 선수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지.
물론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봐야겠지만.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어?”
“뭐?”
“나 같은 신사가 그런 끔찍한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넌 좀 더 동료들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할 거야.”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그 와중에 윈들러 놈 탈룰라 솜씨 좀 보소. 지 등판 끝났다고 마음이 다시 넉넉해졌나 보다. 먼저 설사약 드립을 친 게 누군데. 어이가 아리마셍.
하여간 선발 투수란 것들은 죄다 미친놈들이다. 나 같은 정상인들이 별종 취급을 받는 이상한 세계라고.
“오, 좋아!”
“나이스 피칭!”
윈들러와 미친 소리를 나누는 사이 우리 팀의 7회 말 수비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점수 차가 워낙 많이 나다 보니 조금 맥 빠진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 대승은 언제나 환영이지.
‘좆태규 아웃된 경기에서 바로 이겨서 더 좋고.’
사실 오늘 경기는 포수 차이라고 할 만한 경기는 아니었지만, 아무려면 어때.
사람들이 보기에는 딱 봐도 좆태규가 억제기처럼 보였을 거 아냐. 그거면 충분하다. 만족.
* * *
서울 데빌즈와의 1차전을 12 대 1 대승으로 마무리 지은 우리 팀은 이어진 2차전에서도 좋은 경기를 이어 나갔다.
웰치의 퇴장, 그리고 출장 정지로 이어진 지난 사태 이후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심판들은 꽤 점잖은 판정을 보여주었다.
이는 존을 넓게 사용하는 미첼에게 큰 힘이 되었지.
포수가 불안하긴 했지만 그보다 존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게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그동안 리그 최고 수준의 포수보다 심판들의 캐리력이 더 뛰어났다는 얘기지.
6이닝 무실점 5k.
미첼은 이번 시즌 첫 무실점 등판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판정이 정상적일 경우, 본인이 어떤 피칭을 보여줄 수 있는지 증명해 보였다.
10점대를 넘나들던 ERA도 어느새 5점대 초반으로 끌어내리며 확실히 반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
“자, 잠시만 주목.”
이후 데빌즈와의 3차전에서는 재현이 형이 6이닝 무실점으로 훌륭한 피칭을 보여 주었지만, 이후 데빌즈의 타선이 무섭게 터지며 패배하긴 했다.
그래도 5연패 이후 위닝 시리즈를 따냈기에 팀 분위기는 꽤 괜찮은 편이었지.
“이번 주중 3연전 상대가 어딘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좆태규가 사고 치기 직전, 그러니까 팀이 5연패를 찍을 무렵 팬들은 웰치 복귀 전 까지 전패 각이 날카롭게 섰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사실 나도 진짜 암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예상외의 반전을 이끌어 낸 셈이지.
“난 사실 우리 팀과 그리즐리스와 어떤 관계인지 정확히 몰라. 하지만 놈들이 미디어 데이 때 굉장히 어처구니없는 소릴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그리고 5월 4일인 오늘, 우린 잠실에서 숙명의 라이벌전을 치르게 된다.
홈구장을 공유하는 웬수 사이, 서울 그리즐리스가 이번 3연전의 상대라는 뜻이다.
“물론 우리 팀의 신인이 훨씬 멋들어지게 갚아주긴 했지만 말이야.”
어린이날을 끼고 치러지는 라이벌전이다 보니 감독님도 평소와 달리 기합이 크게 들어간 느낌이다.
“내가 알아보니 작년에 이 팀이 조금 좋지 못했을 때도 그리즐리스와의 전적은 괜찮은 편이더군. 훌륭한 일이었어.”
화요일 경기임에도 상당한 관중들이 들어찬 상태다. 내일은 아마 100퍼 매진이겠지.
한국 프로 야구판에서 손에 꼽히는 라이벌리 아닌가.
“하지만 올해에는 그보다 좀 더 좋은 상대 전적을 만들고 싶군.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인가?”
아, 물론 유럽 축구판의 훌리건들처럼 서로의 뚝배기를 깨고 다니는 관계는 아니다.
그냥 일상적으로, 혹은 인터넷상에서 좀 더 서로를 싫어할 뿐이다.
“캡틴은 어떻게 생각해? 작년처럼 대충 절반 정도 이기면 만족하나?”
“절대 아닙니다! 올해 곰탱이들이 우리하고 눈도 못 마주치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관계는 아니지만, 지역감정이나 모기업 간의 관계가 예전보다 순화된 현 시점에서 가장 라이벌 의식이 강한 사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자세야. 다들 캡틴이 하는 말 들었지? 놈들에게 이곳 잠실의 주인이 누군지 제대로 보여주도록 해. 두 번 다시 놈들이 좆같은 말을 하지 못하도록 박살을 내주란 말이야. 내 말 알겠어?!”
“네!!!”
그만큼 졌을 때의 후폭풍이 심한 매치이긴 하지만, 이겼을 때 얻는 것도 크다.
아마 이번 시리즈에서 위닝 시리즈 이상을 따낸다면 팬들의 지지를 확실하게 끌어낼 수 있을 거다.
‘거기에 이번엔 보너스까지 걸려 있으니까.’
프런트에서 말하길, 매 경기 승리 시 수훈 선수에게 모기업 회장님이 직접 금일봉을 수여한다더라고. 아, 보너스는 못 참지.
한 시즌을 전체로 놓고 보면 결국 잘하는 놈이 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 경기씩 잘라서 놓고 보면 스타가 아닌 평범한 주전 선수, 혹은 대타 요원이 가장 빛날 수도 있다.
예상치 못했던 선수가 등장하여 경기를 결정짓는 장면은 의외로 자주 볼 수 있지 않나.
‘다들 눈빛부터가 다르네.’
회장님이 직접 주는 금일봉이라면 용돈치고는 상당히 짭짤한 수준일 확률이 높다.
상대적으로 연봉이 귀여운 젊은 선수들이 주축인 우리 선수단이 불타오르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조치는 없겠지.
“아자!”
“죽여버려!”
“저 새끼들 별거 아냐! 뒤지게 패버리자고!”
봐. 기합 들어간 것 좀 보라고. 저게 야구단에서 나올 만한 기합이냐고. 한판 붙으러 나가는 깍두기들이나 할 만한 대사 아냐?
‘근데 저쪽도 만만치 않은 것 같네.’
물론 우리 쪽만 불타오른 것 아닌 듯하다. 저쪽 덕아웃을 보니 분위기가 우리 쪽하고 비슷한 느낌이거든.
잘 들리진 않지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박지호 선수부터 해서 난리도 아니네.
‘아.’
서로 으샤으샤 하며 기세를 돋우던 그리즐리스 선수단을 관찰하고 있던 그때,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발견했다.
“최규석 저 양아치 새끼, 복귀했구나.”
4월 초에 만났을 땐 안 보여서 좋았는데 아무래도 복귀한 모양이다. 내가 크보판에서 가장 싫어하는 놈이 바로 저놈이다.
“어, 뭐야. 막내, 너 최규석 저 새끼 알아?”
“아.”
혼잣말을 한다는 게 좀 크게 나왔나 보다.
덕아웃 앞에서 열심히 선수들과 파이팅을 외치던 명찬이 형이 헬멧을 챙기러 들어오다가 내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모양이지.
“그, 야구 중계는 중고딩 때도 계속 봤으니까요.”
“아, 하긴. 알만 하지. 저 새끼 진짜 야구 개좆같이 하는 놈인 거는 그냥 봐도 알지.”
참고로 저 야구 좆같이 한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다. 진짜 사전적 의미 그대로 ‘좆같이’ 한다는 말이다.
동업자 정신 팔아먹고 야구하는 쓰레기인지라 그리즐리스 선수가 아닌 다른 팀 선수들은 모두 저놈을 싫어한다.
“작년에 형이랑도 싸웠죠?”
“어, 맞아. 저 미친 새끼가 데드볼 맞았다고 배트 들고 마운드로 걸어오길래 뒤에서 목을···.”
전생에 나와도 갈등이 있었던 놈이다. 사실 저놈과 갈등 한번 없었던 사람이 있긴 한가 싶을 정도라서 특별한 일도 아니지.
“아, 넌 투수라서 엮일 일이 별로 없겠지만, 혹시 내일 너 던질 때 저 새끼가 타석에서 야리거나 식빵 구우면 대충 무시해. 원래 그런 놈이라.”
오죽하면 이지스 시절에 한 선배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한테 최규석 대가리에 강속구 하나 꽂아주면 상금을 주겠다고 할 정도였다.
“아니면 걍 대가리에 160짜리 하나 꽂아주든가. 아, 그거 보고 싶긴 하네.”
···여기도 있네. 데드볼 청부하는 사람. 누굴 킬러로 아나.
아무리 그래도 160을 어떻게 사람 머리에 던져. 날 살인자로 만들 셈인가.
“엉덩이 정도로 타협 보죠.”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아무튼 놈의 얼굴을 보니 전투력에 불이 붙는 느낌이긴 하다.
만약 놈이 오늘, 혹은 내일 경기 중에 거지같은 짓을 하면 진짜 엉덩이에 볼침 한 방 놔줄 의향이 있다.
물론 놈이 얌전하게, 별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글쎄, 상상이 잘 안 간다. 고양이가 츄르를 끊지.
아, 참고로 저 새끼도 범죄자 출신이다. 내후년쯤에 폭로가 터지던가?
저놈은 왕년에 학폭 좀 하신 분이라서. 뭐, 저 인성에 학폭 이력 있는 게 딱히 의외는 아니긴 하지.
(다음 편에서 계속)
- 작가의말
이번 시즌 치러졌던 -꼴- 경기 중에
가장 편안했던 경기였네요.
세웅이 넘모 잘던졌고
타자들은 어제 일 안 한거 오늘 몰아서 했니?;;
뭔가 이겨서 좋은데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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