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22. 그와 그분

“안 돼. 라프. 여자애가 그러면 못 쓴다고.”
최수호에게 안긴 라프는 여전히 선우민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아저씨에게 고개를 획 돌리며 뭔가를 바라는 지 두 눈을 깜빡댔다.
“... 배낭, 왜 안 나오냐? 라프...”
아저씨를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니...
최수호는 꿈틀대는 라프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라프는 늘어났다 작아졌다가 하는 유연한 몸을 이용해 최수호에게서 빠져나와, 아저씨의 배낭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점차 커다래지는 팔을 아저씨가 매고 있던 배낭으로 쏙 집어넣었다.
“나와라. 선우민과 같은 듯 다른 녀석이 있어. 라프”
아저씨는 라프가 팔을 집어넣은 배낭을 등에서 풀어 손에 들었다.
그러자 라프는 더욱이 배낭을 이리저리 헤집더니,
곧 배낭의 기다란 입을 잡아 바구니에서 뱀을 끄집어내듯이 빼냈다.
“... 오...! 신수가 더 있었어?”
선우민이 배낭의 기다란 입을 보며 눈을 반짝였고,
“이거~ 점점 그분의 정체가 궁금해지는데?”
자르빌은 아저씨를 향해 떠보는 듯이 말했다.
“뭐야? 뭐... 왜 잘 자는 사람을 깨워?”
배낭의 입이 졸린 것처럼 입을 끔뻑거리면서,
라프가 큰 손톱으로 가리키고 있던 선우민을 바라봤다.
“... 뭐야? 이 애가 선우민...? G.G.E에서 무슨 짓을 당한 거야?”
배낭은 선우민을 보자 그곳으로 입을 길게 뻗으며 못 믿겠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나는 아마 너희들이 알던 선우민은 아닐 것 같은데... 나는 고층에서 태어났거든.”
선우민은 자신을 살펴보는 기괴한 배낭의 입을 보고도 그저 머쓱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골목까지 왔을까? 아직 어려 보이는데~?”
배낭은 의아한 듯 입을 놀리며, 선우민의 눈앞으로 자신의 입을 가까이 붙였다.
“그건, 우리가 상층부의 X 요원 자격증을 지녔다는 말씀.”
선우민이 갑자기 눈앞으로 다가온 배낭의 입에 조금 당황한 듯 주춤거리자,
옆에 있던 자르빌이 배낭을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랑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X 요원...? 그게 뭔데? 먹는 거야?”
배낭의 입이 이번엔 자르빌에게 뻗으며, 그 특유의 비꼬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하긴, 한낱 신수가 알 리 없지...”
자르빌도 그에 질세라 무시하는 듯한 말투로,
슬그머니 배낭의 입을 훑으면서 말했다.
“뭐...?”
배낭은 자르빌의 태도에 이를 질끈 씹으면서,
기다란 입을 갸웃 움직이고 있을 때,
“X 요원 자격증은, 상층부의 의뢰를 받을 수 있는 자격증을 뜻한다. 그들은 웬만한 장소에는 허가 없이 출입할 수 있을뿐더러, 어지간한 살인까지 면죄받을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지.”
아저씨가 배낭의 입을 보며, 본인답지 않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고층에 그런 자격증이 있다고...?”
배낭이 아저씨에게 ‘입’을 돌리며 말한 뒤,
이따금 자르빌을 흘끔거리면서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고층은 권력만 있다면 뭐든 가능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대다수 권력층이 밀집해 있는 상층부는 사실상 정부보다도 더한 권력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다만, 아무리 권력이 강하다고 한들, 골목이 있는 한 무력적인 면은 G.G.E와 정부를 넘어서지 못해. 그래서 상층부에선 이런 권력으로 X 요원 자격증이란 걸 만든 뒤, 유사시에 써먹으려고 하는 거지.”
고층...
최수호에게 있어, 그곳은 언젠간 살아보고 싶은 곳이었다.
이런 골목에 비하면 그곳은 유토피아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들었다.
신수나 가인더로 친구가 죽을 걱정이 없고,
신수나 가인더로 사랑하던 사람을 잃을 걱정이 없고,
생활을 풍족히 하기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
하지만 그런 곳도 역시 그들만의 걱정이 있는 곳이라고,
최수호는 나름 타협점으로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골목보다는 낫다는 생각은 떨칠 수 없었다.
“... 그런데, 아저씨는 고층 사람인가요? 생각보다 고층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네요?”
최수호가 아저씨에게 물었다.
고층이 더 궁금하기도 했고, 신수 해방 교단에서 다른 골목 마을에서,
그분이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의문점들을 전부 무마시키던 아저씨란 사람에 대해,
최수호는 조금 알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 그건 나도 궁금한 건데 말이야~ 당신... 정체가 뭐야? 우리 X 요원 자격증으로도 당신에 대한 정보를 열람할 수 없었어. 되려, G.G.E의 장관이 이 이상 당신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한다면, 상층부와 우리에게 제재를 가할 거라고 협박할 정도였으니까.”
“... 딱히 별거 없을뿐더러, 알 필요도 없다.”
“그건 우리가 결정할 문제인 것 같은데... 뭐, 좋아, 말해주지 않을 거라면 됐어.”
자르빌은 재미없다는 듯이 아저씨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현관문을 열었다.
“선우. 그만 가자.”
“왜? 이렇게 그분도 찾았는데, 좀 더 따라다녀 보자.”
“사력만 보고 저 아저씨가 ‘그분’인지 어떻게 확신하냐? 본인 이름도 말해주지 않는데, 수상쩍은 사람과 함께 있어 봤자 좋을 건 없다고.”
자르빌의 말을 들은 선우민은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그분에게도 뭔가 사정이 있는 거겠지. 게다가 무턱대고 따라온 건 우리니까.”
선우민은 찰싹! 달라붙어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가는 라프의 돌발 행동에도,
흔들림 없이 그 굳은 금빛의 눈동자로 아저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있지, 고층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누군지 몰라.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고층에 있는 어떤 실험실이었거든.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선우민이 라는 사람을 모르지만... 나는 그 실험실에서 연구하던 연구원들에게서 들었어. ‘선우민. 그의 유전자는 구현에 성공했지만, 역시 생전 그가 쓰던 사력은 발현하지 못했다.’라 하더라고. 아마... 너희들이 찾는 선우민은 그 연구원이 말했던 사람 아닐까?”
선우민의 말에 배낭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을 끄덕였다.
“뭐 대충 예상했다고~ 라프도 말이지. G.G.E의 실험실에서 태어났거든. 역시 그 녀석들은 미련을 못 버리고 있네...”
“어떤 미련?”
자르빌이 현관문을 슬며시 닫으며, 배낭에게 물었다.
“깊은 골목의 탐험가들. 그래... 그건 동화 같은 이야기였지. 그때는 정말 신수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고, 깊은 골목에서 과거의 기술들을 되찾을 것만 같았거든.”
“...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면,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당연히 G.G.E가 전부 정보를 소실시켰지. 아마 G.G.E에서 그때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건 G.G.E 사령관이나 박사 정도일 걸?”
“그래서, 그 정보란 게 뭔데?”
자르빌과 배낭의 뭔가 의미심장한 대화.
최수호는 그 둘의 대화가 궁금했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하다고 느껴지기도 했기에,
자신은 그만 이 대화에서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았지만...
이미 ‘그분’이라는 아저씨와 함께한 시점에서 별로 의미 없을 것 같아 그냥 계속 듣기로 했다.
“뭐~ 길고도 긴 이야기인데... 간단히 정리하면, 선우민이란 사람이,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 깊은 골목을 개척하는 이야기였지. 끝~”
“에? 그게 끝?”
“끝이야.”
“뭐야? 지금 하나도 설명이 안 된 것 같은데? 선우민이란 사람을 왜...”
자르빌은 선우를 슬쩍 바라보았다가,
“복제하려 하냐고...?”
배낭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 그건...”
“됐다... 배낭. 네가 왜 그때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아저씨... 그분은 우리를 등진 채, 식탁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 내가 어떻게 그 이야기를 알고 있냐니... 나는 반신수. 선우민과 함께 다니던 ‘그녀’의 사력에서 태어난 생명체니까~ 덕분에 다는 아니지만, 그녀의 기억이 일정 부분 내게 남아 있지. 아~ 이제야 속이 좀 시원하네.”
배낭의 입이 아저씨가 바닥에 내려둔 가방으로 도로 들어갔다.
그러자, 스멀스멀 아저씨의 가방 안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형체의 무언가.
그림자보다 진하게 모든 게 불분명토록 빛나던 그것은,
이내 한 여인의 그림자로 형태를 가다듬었다.
“...”
하지만 아저씨는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은 채,
우리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분이 마음에 들거든~ 그래서, 이렇게 무기도 수납할 수 있게 해줬고 말이야. 그래서... 딱히 내 기억은 아니지만, 이 말을 네게 전달 할게... 이건 그녀의 유언 같은 거였으니까.”
그림자의 여인은 아저씨의 귓가로 바람에 살랑이듯이, 걸어갔다.
“짐승은 고층에 있어. 그러니, 부디 네 신념대로 행동했으면 해.”
아저씨의 귓가로, 속삭이듯이 말하는 그림자의 여인.
여인은 그 말을 끝으로 형태가 흐트러지기 시작하자,
아저씨는 마침내 흐트러지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조금 돌렸다.
“... 묵시록을 향한 여정은 그저 황혼을 알리는 자명종이니.”
아저씨는 흐트러져 사라지는 그림자의 여인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냥감이 정해졌다. 다음 목적지는 바벨탑이다.”
“뭐?”
자르빌이 깜짝 놀라 우리를 향해 몸을 돌리는 아저씨를 보며, 짧은 의문을 토했다.
“고층으로 올라갈 생각이야?”
자르빌의 말을 들은 선우민은, 뒤늦게 그게 무슨 말인 건지 아저씨를 그저 멀뚱히 바라봤다.
“바벨탑은 고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인 ‘비공식 게이트’ 중에 하나라고. 그곳은 ‘나선형 모양의 높은 탑’처럼 지어져서 바벨탑으로 부르며, 이 바벨탑은 다른 비공식 게이트와 다르게 ‘총 50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층마다 ‘불법적인 경기’가 벌어지고 있어. 만약 ‘골목 사람’이 이런 불법적인 경기에 참여해 1등을 한다면, 막대한 상금과 고층으로 올라갈 기회를 얻게 된다는 말씀."
자즈빌은 코가 오뚝해져선, 신난다는 듯이 본인의 지식을 뽐냈다.
“에~!? 그러면... 우리가 아저씨를 따라가도, 깊은 골목으로 가지 못하겠네?”
선우민은 반곱슬인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나저나... 너희들은 왜 깊은 골목으로 가고 싶어 하는 거지? 그곳은 오염된 것도 모자라 위험한 신수들로 가득한 곳이다."
아저씨의 당연한 의문과 물음.
깊은 골목, 그곳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괜히 섣불리 건드리면, 깊은 골목의 신수를 자극해 자칫 골목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만약 이들이 그저 호기심 때문에 깊은 골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거라면, 최수호는 자신이라도 나서서 이들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나는 그곳에서 나를 자식처럼 키워준 성희씨를 찾아야 하거든... 그 사람에게 빚진 것도 많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 실험실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건 전부 성희씨 덕분이었으니까.”
“그게 깊은 골목과 무슨 관련이지?”
“나는 실험실에서 빠져나와 X 요원 자격증을 딴 뒤, 성희씨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어. 그런데... 그녀는 나를 빼내 준 처벌로, ‘깊은 골목’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그곳에 파견됐데.”
선우민의 금빛의 눈동자가 땅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깊은 골목이 정말 위험하다는 거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꼭 그곳에 가야겠어.”
아저씨는 선우민의 짙어진 금빛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주섬주섬 바닥에 내려둔 가방을 들어 등에 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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