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30. 여명의 시작

“대령님. 이 작전... 정말 계속하시려고요?”
의자에 앉아 있던 태진이 부들대는 손으로 연신 턱을 만졌다가 볼을 만졌다가,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대충 옷소매로 문대면서 서관호에게 말했다.
“왜, 여기서 그만두고 싶어?”
“... 아니요.”
“그런데 왜?”
지금 이 대기방엔 ‘진 유백화’는 없었다.
그는, 이 대기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바벨탑 직원에게 멋대로 항의하러 간 상태이긴 했지만...
이 바벨탑의 대기방에서는 작전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수칙.
아주 당연한 수칙을, 태진은 이미 이성을 상실한 채로 나불대고 있었다.
“진 유백화... 그 새끼를 죽이고 싶은데 말이죠...”
“...”
서관호는 그런 태진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린 뒤,
그대로 끌어당기며 무릎으로 갈비뼈를 쳤다.
“너... 우리들을 다 죽일 셈이냐? 정신 차려.”
“크...”
복부를 부여잡고 고통에 잠긴 태진의 귀에 대고, 서관호가 속삭였다.
“나도 너만큼 진... 그 새끼를 죽이고 싶다. 지금 당장 그 새끼 대가리에 총알을 박고 싶어... 하지만 참아. 수진이를 위해서.”
태진의 귀에 댄 서관호의 입이, 뿌득대면서 이를 갈며 말했다.
“씨발...”
태진은 결국 바닥을 향해 끄윽 대면서 소리 없이 흐느끼다가,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런 태진의 모습을 보고 있던 정해숙이, ‘하...’ 입에 문 담배를 길게 뿜었다.
“... 슬슬 진을 찾으러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 새끼... 왠지 또 사고 칠 것 같은데?”
정해숙은 손가락 사이에 낀 담뱃대를 재떨이에 비벼 꺼트렸다.
“그래... 너는 태진이를 돌보고 있어... 내가 찾아올 테니까,”
서관호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무엇이 생각난 것처럼 걸음을 멈췄다.
“만약, 상태가 호전되지 않으면... 일단 데리고 나가서 뭐라도 사 먹여라. 돈은 내 지갑에서 가져가고.”
미안했다.
자신이 수진이를 죽인 거였다.
하필 데려온 새끼가, 그런 싸이코 녀석이었다니.
좀 더 시간을 내어 그 녀석을 알아봤어야 했다.
조급해 하지 말고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했어야 했는데..,
서관호는 대기방에서 나와 바벨탑의 1층 복도를 걸었다.
그의 꽉 쥐어진 주먹에서 피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 젠장... 이 망할 새끼는 어디로 간 거지?’
고요한 바벨탑의 복도.
복도치곤 폭이 상당히 넓어, 어느 골목의 널찍한 길목 같은 곳을,
서관호는 끝이 보일 때까지 걸어갔다.
“흠...?”
멀리서 보았을 때는, 빨간 물감을 벽과 바닥에 칠해놓은 것 같았다.
“이건...”
어느 정도 다가갔을 땐, 몇 명의 사람이 서 있었고,
그 주변엔 수많은 고기 조각이 떨어져 있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대체...”
마침내, 가까이에서 마주했을 땐, 진을 막아선 세 명의 사람과,
그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음을 서관호는 깨달았다.
“아참~ 우리 팀을 올려보내 달라고~ 이렇게 전부 죽였잖아? 이 층엔 더는 경기자가 없어.”
진이, 자신을 막아선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기다리시죠. 지금, 마스터에서 보고를 올리러 갔으니, 적어도 하루 뒤에나 허가가 떨어질 겁니다.”
“융통성이 없는 친구들이네. 허허허 좋아, 보고가 올 때까지 나는 여기서 기다리지.”
진은 자리에 주저앉아, 들고 있던 사검에 턱을 기댔다.
“... 어떻게 된거죠?”
서관호는 꽉- 진 주먹을 펴며, 진에게 물었다.
“어? 왔구나? 아니, 우리 팀은 4명인데 방이 엄청 작아서 말이야. 그래서 빨리 올라가려고, 경쟁상대를 다 죽였어.”
“...”
벽과 바닥에 칠해진 핏물과 다르게, 옷에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진.
옷만 보았을 땐, 그가 이런 짓을 벌였을 거라고는 믿기 힘들었지만,
이미 서관호는 그가 수진이를 살해하는 걸 보았기에, 그저 마른침을 속으로 밀어 넣었다.
“... 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가면, 저희도 좋죠.”
“그렇지? 역시, 이 친구.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말이 통하는 친구야.”
실실, 웃으면서 말하는 ‘진 유백화’.
서관호는 그저, 그의 웃음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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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지와 장판이 다 벗어져, 회색빛 콘크리트로 물든 거실.
그 한가운데에 놓인 드럼통에서 불이 피어올라,
연기가 되어 열어둔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신수 걱정은 ‘그분’이 있으니, 필요 없겠지...?”
김류나는 골목 속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불안한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나도 있어!”
“... 나도 있다고.”
“나도 있다. 라프.”
그러자 선우민을 필두로 자르빌, 라프가 차례로, 김류나에게 대답했다.
“... 나는 이런 분위기 적응 안 되니까, 조금 진정하면 안 될까?”
김류나는 두 소년을 불이 지펴진 드럼통과 번갈아 보다가,
라프의 모습을 한 번 흘끔 쳐다보더니, 몸서리치면서 드럼통과 가까이하고 있던 손을 비비적댔다.
“... 헤헤... 하긴, 우리들은 깊은 골목으로 가야 하니까...”
선우민이 드럼통 근처로 와, 미리 깔아두었던 천 쪼가리 위에 앉았다.
그러자, 자르빌이 선우민 옆에 앉았고,
라프는 크기가 작아지면서, 이미 앉아 있었던 최수호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럼, 그 제단... 마저, 이야기해 주면 안 될까?”
선우민이 창가에 서 있던 나를 향해, 꿈에 부푼 소년과도 같은 눈을 빛냈다.
마치, 그때의 대장 같은, 모험심에 가득 찬 눈으로...
“... 그 제단은 ‘어떠한 믿음’과 ‘과학’이 만난 ‘깊은 골목’의 유적이었다. 제단은 멸망했던 과거 인류의 유적과 동시대 거로 추측되었지만, 나머지 모든 건 달랐지. 생전 처음 보는 글자, 기술, 또... 연구했던 소재. 그건 분명 인류의 과학시설과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그래, 마치 그곳은 어떠한 존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제단과도 비슷했지.”
나는 그런 대장의 모습을 뒤로한 채,
창가 너머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골목 속을 바라보며 말하다가,
“그리고 그 어떠한 존재란 건 바로 신수...”
묘하게 밝은 빛의 털을 지닌, 라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마, 라프 같은 반신수도 박사가 그 제단을 연구하면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겠지.”
라프가 나를 보며, 짧지만 유연한 흰색 빛의 털을 살랑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저, 내가 그날 들판에서 보았던 민들레씨처럼, 그녀는 그날의 저주에 사로잡힌 나를,
사신처럼 고요하게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제단 같은 것에서 신수가 처음 발생했을 수도 있겠네요?”
선우민이, 자르빌에게서 받은 육포를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확률이 높아. 제단에서 신수화에 썼었던 재료는, 다음 아닌 신수였다. 신수는 죽으면 그 육체가 어떠한 방식으로 사라지지만, 급소만을 피해 신수를 생존시킬 수 있다면 신수의 육체는 사라지지 않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지. 재단은 이런 방법으로 신수에게서 조직 일부를 떼어내, 생명체에게 이식한 흔적이 있었지.”
“... 단순히 궁금해서 그런 실험을 한 건가? 흠...”
선우민이 드럼통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말했다.
“... 궁금해서라... 너 같으면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생명체를 담보로 한 실험을 할 수 있을 것 같나?”
내 말에, 선우민이 팔짱을 끼면서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요...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헤헤”
“...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만 한숨 자둬라. 내일 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선우민의 선, 악 구분 없는 호기심.
박사와 대장도, 이런 호기심을 지니고, 서로 의견을 공유하면서 함께 깊은 골목에 관해 연구했었다.
다만, 박사는 선, 악 구분뿐만 아니라, 감정이란 개념이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아, 뭐든지 선을 넘는 지경에 이르렀고,
대장은 박사와 다르게 어느 정도 선을 지키는 편으로, 항상 대장이 박사를 말리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결국 그 재단을 어떻게 했어?”
선우민의 옆에 있던 자르빌이 내게 물었다.
“... G.G.E의 ‘신수 연구 개발 부서’에 있던 ‘박사’에게 전부 넘겼다.”
“하긴, 그편이 제단을 연구하는 데 제격이겠지... 그런데, 내가 듣기론 그 박사라는 남자, 겉으로는 이미지가 엄청 좋지만, 실상은 ‘매드사이언티스트’라고 하던데?”
“여정을 향한 길은 때론 미쳐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었지.”
손에 묻힌 죄악감.
인간과 동물이 섞여 있는 듯한 ‘새로운 인류’을 마주했던 당시 내가 들었던 생각은, 그저 무감각한 우리들의 미래였다.
골목과 골목 위에서, 우리들은 그저 신수를 피해 달아나기 바빴고, 달아나지 못한다면 죽기야 밖에 더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류를 위해, 여정을 계속하던 대장을 위해, 나는 일곱 기사와 함께 칼을 거머쥐고, 앞으로 나아갔지만...
한 명의 새로운 인류가 우리 앞을 막아서서, 한 송이의 보랏빛 꽃을 우리에게 내미니,
나를 따르던 일곱 기사는 땅으로 꺼졌고, 나는 어느덧 광활한 들판에 누워 있었다.
나는 홀로 다시 그 장소로 돌아갔지만 이미 세월은 흐른 상태였고,
두꺼운 책 한 권만이 그때 내가 서 있던 그 장소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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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서관호는 진 유백화를 포함한 일행들과 함께, 바벨탑 30층을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다음부터는 경기 외에 경기자를 죽이는 행위는 실격 처리되니 주의하기를 바랍니다.”
“뭐? 어차피 서바이벌 경기 아니었어? 결국, 남아 있는 놈이 1등 하는 게 포인트잖아?”
“... 경기 중, 서바이벌 경기도 있긴 하지만, 보통의 경우는 경기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아... 그런 거였어?”
우리를 안내하던 두 명의 안내원 중 한 명이,
진 유백화의 이상한 상식에도 표정 변화 없이 그에게 차분히 대꾸했다.
“그러면... 어떠한 경기에서든 죽이는 건 가능한 거지?”
우리와 상식 구조가 다른 이 남자, 진 유백화.
“죽이면 실격되는 경기도 있습니다.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도 실력에 일환이니, 알아서 잘 판단해 주세요.”
그나저나, 이 바벨탑의 안내원.
이런 사람을 많이 만나본 건가?
골목이라서 그런 거라고 단정 짓기에는,
진은 이미 1층에서 경기자들이 머무는 대기방에 일일이 찾아 들어가 시비를 건 뒤,
한 곳에 불러 모아 죽였다고 한다.
제아무리 골목이라지만 이런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은 끔찍한 일이었는데,
지금 우리를 안내하는 이 안내원은 진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있었다.
“실력... 제압하는 것도 실력이라... 그래. 그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이지, 암... 그만큼 힘 조절을 잘한다는 거니까.”
“그럼요. 그러니까, 다음 경기에서 활약하기 기대해 봅니다.”
“이 골목대장인 ‘진 유백화’만 믿으라고.”
띵-
30층에 다다라서,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바벨탑의 30층은 1층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구조로,
널찍한 복도를 중심으로 사이사이에는 대기방들이 줄지어져 있는, 고층에서의 흔한 호텔 같은 느낌이었지만,
안내원의 말로는 이 복도 중심엔 뷔페가 있어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하며,
생필품이나 의약품들도 1층에선 구매해야 했지만, 이 30층에서는 개별적으로 지급된다고 한다.
우리는 전보다 더 넓어진 대기방에 들어가, 거기서 제일 큰 방을 진 유백화에게 준 다음, 작전을 시작했다.
첫 경기는 당장 내일부터 라니까, 우리는 경기자들과 경기를 조사해 보겠다고 진에게 말한 다음,
우선, 가져온 초소형 폭탄 N-7을 이 바벨탑 30층에 설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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