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안에 괴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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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바딕
작품등록일 :
2023.05.1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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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7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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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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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32. 죄악의 탑

DUMMY

“... 골한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상황인데요...”



최수호는 크기가 작아진 라프를 인형처럼 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제 생각으론 아저씨가 선우에게 소개해 주려고 했던 그 사람은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다른 방법을 찾아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저긴 너무 위험해...”



최수호의 말대로, 바벨탑은 위험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바벨탑 주둔지’에선 신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곳과 대략 1km 넘게 떨어진 저 거대한 바벨탑에선 신수의 기운이 짙게 뿜어지고 있었으니,


상당히 많은 수의 신수가 바벨탑에 자리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돌아가진 못하겠군.”



나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는 ‘신수 해방 교단’의 두 번째 야수, 자선하며 물어뜯는 자 에단.”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빨간 장갑이 차분하게 걸어 나와,


다소곳이 깍지 끼며 우리를 향해 기도했다.



“아... 제가 모시는 그분이 드디어 이곳까지 행차하셨군요.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곳을 기점으로, 골목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 질 겁니다.”



그는 과장되지 않은 차분한 말투로 말했지만,


그의 가느다란 눈 속에 비추어진 기묘한 눈웃음은,


이미 광기에 잠식되어 빛을 잃어버린, 맹견의 눈과도 비슷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분이 말했었죠. 여정은 계속되어야 하는 법이라고요. 저희는 줄곧 기다렸습니다. 향기롭고 따스한 들판에서부터 시작해, 당신이 처음으로 여정을 시작한 이 바벨탑까지... 줄곧 말이에요.”

“...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에단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깎진 낀 두 손에 입을 가까이 붙였다.


나는 내가 맨 가방에서 뻗어 나온 배낭의 ‘기다란 입’에서,


칼날이 송곳처럼 뾰족하게 생긴, 내가 보통 인간형 신수에게 치명상을 입힐 때 사용하던 검을 손에 쥐었다.



“말하지 않겠다면, 여기서 죽이겠다.”

“저희는 길을 닦는 낙오자. 개척하는 선지자, 그분이여. 왕이 되어서 부디 우리를 해방하여 주시죠.”



에단의 주위로 사람보다도 크거나, 바퀴벌레보다도 작은 무수한 벌레들이, 스멀스멀 파도가 밀려오듯이 기어 나왔다.


그것들은 인간의 다리와 얼굴을 지닌 채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무어라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주둔지에서는 신수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것들, 설마 사람인 거냐?”

“그분이여... 천사는 날개를 먹어 하늘을 나는 법. 당신이 항상 조아리던 말을, 비로소...”



벌레들의 탁류가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덮쳤다.



----------



바벨탑의 32층.


4개의 층이 합쳐져 바벨탑에서 유난히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이 층은,


사람 대 사람이나 신수 대 신수끼리 싸움을 붙이는 불법 투기 경기가 일어나는 장소로,


대략 2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이 여럿 배치된 층이었다.



“이게 병기라고?”



이런 원형 경기장 중 제2번 경기장 중심에 서 있던 진 유백화는,


그곳에 있던 ‘거구의 근육질 몸’에 머리 대신 ‘동그란 링’이 떠 있는 G.G.E의 생체 병기 앞으로 다가갔다.


G.G.E의 생체 병기는 진이 다가와도 아무 반응 없이, 멈춘 기계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쓸만해 보이긴 하는데...”



진 유백화는 G.G.E의 생체 병기를 사검으로 툭툭 건드렸지만,


아무 미동도 하지 않는 생체 병기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훌쩍이는 한 여인을 향해 고개 돌렸다.



“... 이봐, 그만 좀 울어. 운다고 뭐 해결되는 줄 아나?”



진은 두꺼운 파일철을 품에 껴안고 긴 앞머리로 눈을 가린 채 훌쩍대는 예루를 한심하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박사님께... 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망했다고 진짜...”



예루는 긴 앞머리 안으로 옷소매를 집어넣곤 슥슥 문대면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 괜히 가지 말라고 한 걸 이렇게 와버려서 대형 사고에나 휘말리고... 분명 나 잘릴 거야.”

“잘리는 건 잘리는 거고, 일단은 살아서 나가야 잘리던가, 말든가 할 거 아니냐?”

“저는 잘리는 건, 죽기보다도 싫다고요...”

“죽는 것보다 잘리는 게 싫다니... G.G.E 신수 연구 개발 부서엔 괴짜들이 많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 일줄은...”



진은 서관호를 보며 말했지만,


서관호는 솔직히 진이 그럴 말할 처지는 안 된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예루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G.G.E 신수 연구 개발 부서에서 일하셨으면, 엄청 똑똑한 분이셨겠네요.”

“...”



바벨탑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한 사람의 힘이라도 더 빌려야 하는 상황.


서관호는 그녀와 같은 G.G.E 소속이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상황에선 말할 수 없었으니,


일단은 ‘G.G.E 특수 임무 부대 소속’의 직업정신을 살려 그녀의 마음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학교에서 천재라고 불렸는데요... 그래서 수석으로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해서 논문을 썼는데... 윤리 의식과 너무 떨어져 있다고 퇴짜맞았지만... 박사님만큼은 알아줬다는 말이죠.”



서관호는 앞머리로 반쯤 가린 그녀의 얼굴이 향하고 있던, G.G.E의 생체 병기를 바라봤다.



“지식이 없는 저로선, 이 병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외관만 보면 뭔가 엄청 강해 보이네요.”



괴짜들이 많다던 G.G.E 신수 연구 개발 부서.


박사는 인재에 대한 편견이 없었기에 능력이 출중하다고 연구에 도움만 된다면.


골목 고층 가릴 것 없이 인재를 등용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신수 연구 개발 부서에는 상당한 괴짜들이 많았고,


이런 괴짜들은 대부분 박학다식했기 때문에,


과연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서관호는 조금 불안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나설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제가 멋지게 설계했으니깐요. 제 작품의 피부는 티타늄보다도 강하고 질겨, 어지간한 상처는 나지 않을뿐더러, 만약 상처가 나더라도 몸에 이식된 나노 입자들이 상처를 치료해 주죠. 게다가 이들의 근육 또한...”



장황하게 지식을 늘어놓은 예루.


서관호는 그녀의 말을,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 그래서 제 작품은 박사님을 필두로 인증된 몇 명의 명령만 듣게 설계되어 있어요.”

“그 박사라는 사람을 정말 좋아하시네요.”

“그럼요~ 그분이 제게 지식을 보태줬기에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으니깐요.”

“그래서 박사님에게 보탬이 되고자, 이 바벨탑에 몰래 와서 전투 데이터를 수집하려고 했던 건가요?”

“...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세요... 이거, 몰래 돌아가긴 글렀어...”

“제 생각으론, 아직 몰래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서관호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며, 재빨리 의도한 말을 떡밥처럼 뿌리기 시작했다.



“G.G.E 신수 연구 개발 부서에 근무하신다면, 사력자라는 능력자들을 아시죠?”

“네... 당연하죠.”

“잘됐네요. 진씨는 강한 사력자예요. 진씨와 예루양의 작품이 손을 합친다면, 이 바벨탑에서 벗어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 바벨탑은 총 120층인데, 이곳은 32층... 중간에 엘리베이터로만 갈 수 있는 구간도 있고, 아예 출입구가 숨겨져 있는 층도 있는데, 저는 힘들다고 보는데요...”

“그러면,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야겠네... 제가 알기론 그 박사라는 사람은 ‘끝없는 탐구심’을 직원들에게 내세운다고 하던데... 뭐, 사람은 여러 생각을 가졌으니까 말이죠.”



서관호가 끝없는 탐구심이라고 말하자,


예루는 영감이라도 떠오른 사람처럼 흠칫 몸을 떨더니,


멍한 표정으로 G.G.E의 생체 병기를 바라봤다.



“맞아요... 이런 실전 상황은 데이터를 수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죠... 비록 박사님의 허가를 받진 않았지만, 제 열정만큼은 그분도 인정할 거예요.”



예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진이 유심히 살펴보고 있던 G.G.E의 생체 병기로 다가갔다.



“G1004 V2, 너는 이 사람, ‘진 유백화’와... 그...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서관호라 합니다.”

“서관호, 나를 서포트하며 지켜줘.”



예루가 말하자, G.G.E의 생체 병기는 ‘머리’ 대신 목 위에 떠 있던 ‘동그란 링’을 예루를 향해 움직였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겠음.”



그러자 생체 병기는 근육질의 남성적인 몸과 다르게,


여성의 목소리에 기계음이 섞인 말투로 대답한 뒤,


예루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참고로 제 작품은, 제가 위험에 처하실 다른 명령을 배제한 채 저를 먼저 구할 거예요. 이건, 기본적인 사항으로 입력된 거니까... 그렇게 알고 계시라고요.”

“뭐, 어차피 이 몸이 있는 이상, 딱히 위험에 처하지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이 병기가 과연 나를 서포트 해줄지 모르겠네. 내가 워낙, 강해서 말이야. 하하하.”



예루가 진에게 말하자, 진은 걸걸하게 웃으면서 그녀의 말을 은근슬쩍 되받아쳤다.



“... 그래봤자 사력...”



예루는 그런 진을 보고 무어라 항변하려고 할 때,


서관호는 얼른 예루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진씨는 ‘진정한 실력자’인 데다가 골목대장이니까, 그럼 믿고 가겠습니다.”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럼... 어서 가자고.”



진은 들고 있던 사검으로 자기 목을 툭툭 치며, 예루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



벌레들의 탁류가 흘러가고,


나는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검에 묻은 벌레의 피를 털어냈다.



“뭐야? 전부 잡혀간 거야?”



배낭의 입이, 내가 맨 가방에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 내가 지켜주지 못했다.”



무수한 벌레들의 향연.


그곳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베고 또 베었지만, 앞으로는 나아가지 못했고,


그때처럼 또 내게... 죄악감이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 죄악감은 그저, 나아가지 못한다는 좌절감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벌레처럼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 비롯된 것인가?



“배낭... 나는 지금까지 짐승들을 죽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게 내 인생의 전부였고, 나는 뒤돌아보지 아니한 것이, 신념이라 생각했지.”



천사는 날개를 먹어 하늘을 난다고,


일곱 개의 검은 하나같이 올곧게 뻗어 나와,


방해하는 것들의 목을 베었다.



“이대로, 나는 그들을 구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군.”



죽였다. 내 손으로,


아이들과 나를 말리는 이들을,



“... 네가 걱정하는 게, 나는 뭔지 모르겠지만, 너는 최수호를 보호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인제 와서 뭐 하는 거야?”



배낭의 입은, 뱀처럼 나를 ‘입으로’ 보다가,


입 속에서 자주빛으로 날이 빛나는 단도를 퉷! 뱉었다.



“구하러 가야지. ‘그분’은 애들과 한 ‘사소한 약속’ 따위도 져버릴 거야?”

“...”



나는 배낭이 뱉은 자주빛의 단검을 손에 쥐었다.



“그래, 약속했지...”



나는 고층으로부터 이어진, 저 거대한 바벨탑을 바라봤다.


그곳은 ‘시작의 탑’으로서 나를 고층으로 데려가 준 ‘구원의 탑’인 동시에,


나를 대장과 만나게 해준 ‘만나의 탑’이 되었고,


마지막으론, 그저 이루지 못할 회상만이 감도는 죄악의 탑이 되었으니.


나는 천천히 바벨탑으로 걸어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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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4 - 36. 들판 위에서 (완결) 25.04.07 8 0 13쪽
199 4 - 35. 들판 위에서 25.04.03 7 0 12쪽
198 4 - 34. 저주받은 곳 25.04.01 8 0 12쪽
197 4 - 33. 저주받은 곳 25.03.28 8 0 12쪽
196 4 - 32. 저주받은 곳 25.03.25 8 0 12쪽
195 4 - 31. 방주 25.03.21 8 0 12쪽
194 4 - 30. 방주 25.03.17 9 0 12쪽
193 4 - 29. 수정된 장 25.03.14 9 0 12쪽
192 4 - 28. 수정된 장 25.03.11 8 0 12쪽
191 4 - 27. 수정된 장 25.03.08 8 0 12쪽
190 4 - 26. 최초의 왕 25.03.05 9 0 12쪽
189 4 - 25. 최초의 왕 25.03.04 9 0 12쪽
188 4 - 24. 바라는 자들 25.03.01 8 0 13쪽
187 4 - 23. 바라는 자들 25.02.26 9 0 12쪽
186 4 - 22. 바라는 자들 25.02.23 11 0 12쪽
185 4 - 21. 피어난 장 25.02.20 9 0 12쪽
184 4 - 20. 피어난 장 25.02.18 9 0 12쪽
183 4 - 19. 피어난 장 25.02.16 8 0 12쪽
182 4 - 18. 지금까지 25.02.13 9 0 12쪽
181 4 - 17. 지금까지 25.02.10 10 0 12쪽
180 4 - 16. 지금까지 25.02.09 11 0 12쪽
179 4 - 15. 각오한 장 25.02.06 9 0 12쪽
178 4 - 14. 각오한 장 25.02.05 9 0 12쪽
177 4 - 13. 각오한 장 25.02.02 9 0 11쪽
176 4 - 12. 퇴장과 입장 25.01.30 9 0 12쪽
175 4 - 11. 퇴장과 입장 25.01.28 10 0 13쪽
174 4 - 10. 집결 25.01.25 10 0 12쪽
173 4 - 9. 집결 25.01.22 10 0 12쪽
172 4 - 8. 집결 25.01.20 10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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