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38. 소녀의 기록

“...?!”
길게 내려오는 앞머리로 눈을 가린 한 여인.
그녀는 연구원들이 입는다는 흰색 가운을 걸친 채,
각종 화학 약품 냄새를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엇! 죄송해요.”
그녀는 내게 뻗고 있던 손을 얼른 거두며,
왜인지 눈을 가린 앞머리가 찰랑거릴 정도로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했다.
“그... 갑자기 실례지만, 당신이 ‘그분’이 신가요?”
“... 그냥, 평범한 아저씨다.”
“평범... 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그녀의 앞머리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한쪽은 초록색, 다른 한쪽은 갈색인 눈이,
주위에 가득 차 있던 ‘신수 해방 교단’의 신도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 그... 혹시 당신이 진짜 그분이라면...”
그녀는 무언가 원하는 것처럼 나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려고 할 때,
“그분이여.”
“그분이여.”
“그분이여...”
‘신수 해방 교단’이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 사이에서 전신을 타이츠 하게 감싸는 검은 원피스를 입은,
내게 익숙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그분이여. 우리는 당신의 간절한 바람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습니다.”
새하얀 피부를 지닌 것과 비교될 정도로,
검게 그을린 듯한 눈동자에, 검게 탄 듯한 긴 생머리를 지닌 그녀.
그녀의 머리 사이에는 다양한 태엽과 톱니바퀴들이 박힌 채 돌아가고 있으니,
그녀는 머리에 박힌 크고 작은 태엽 중 하나를 감았다.
찰칵,
한 바퀴 감기는 태엽 소리에 맞춰 신도들은 일제히 바닥에 두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자... 꽃들의 왕이시여, 이 세상의 이데아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고결한 분이시여. 부디... 저희를 들판으로 안내해 주소서.”
찰칵.
한 바퀴 더 감기는 태엽 소리가, 고요히 골목을 뒤흔들었다.
나는 골목의 침침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고층의 플랫폼 밑에서 눈알이 달린 수많은 해바라기가 살랑거리며 나를 나무라고 있었다.
“... 이제는 확신할 수 있겠어... 너희들은 전부, 나와 함께 황야에서 나온 짐승들이었군.”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따스하고 무릇 익은 과실의 냄새가 풍기는, 정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길을 거기에서도 이어져 있던 것이었다.
소녀의 그 자유로운 날갯짓에서부터,
내가 나아갔던 깊은 골목에서,
혼자 있다고 생각한 들판에서까지.
“... G.G.E의 신수 연구 개발 부서에서 온 연구원인가?”
나는 고층의 플랫폼 밑에 붙어 살랑거리는 해바라기들을 바라본 채, 앞에 있던 그녀에게 말했다.
“네. 맞는데요...”
그녀도, 그녀의 동료라고 생각이 되는 뒤에 서 있던 2명의 남자도,
나처럼 고개를 들어 고층 플랫폼 밑에 붙은 해바라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너희들을 여기서 빠져나가게 해줄 테니, 한 가지 부탁이 있다.”
“... 그게 뭐죠?”
그녀의 눈을 가린 앞머리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따라왔던 사람들... 동료들을 부탁하지.”
“그야... 저희들을 이곳에서 나가게만 해주신다면 쉬운 부탁인데요... ‘그분’의 동료들은 어디에...”
“바벨탑 1층에 있을 거다. 함께 고층으로 올라가라...”
바벨탑에서 ‘깊은 골목의 탐험대’가 된 나는 고층으로 올라가, 처음으로 생활이란 것을 해보았다.
골목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색깔 있는 옷을 입어 보았고, 컴퓨터나 전자기기의 사용법을 배워 보았고, 사람들이랑 어울려 술도 마셔 보았다.
술... 그래, 나는 특히 박사라는 남자와 술을 자주 마셨다.
녀석은 나의 강한 육체를 신기해했으며, 일부로 말을 걸기 위해 내게 줄곧 질 좋은 술과 음식을 사주었다.
나는 당시의 박사가, 그리 싫지 않았다.
작은 새는 날개를 먹어 하늘을 나는 법이라고 내가 박사에게 말해주자, 박사는 상당히 감명이 깊었다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녀석이 싫지는 않았지만... 나는 녀석이 꺼려졌다.
나는 단지 떠나가는 새의 지저귐이 좋았다면, 그는 우리들이 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길을 나아가기 위해선, 날아가는 새를 보기 위해선,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탐험대 일원 중 특출나게 강하다고 한 7명의 사람과 함께 깊은 골목을 개척했다.
나는 그들이 박사에게 어떠한 짓을 당해, 더 이상 사람의 길에서 벗어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작은 새는 날개를 먹어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 혹시 그분은 신수인가요?”
그녀의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초록색의 한쪽 눈이,
이 골목 속의 칙칙함을 호기심으로 물들이며 나를 바라봤다.
“...”
신수, 그것은 인간을 이해하며 잡아먹는 짐승.
인간의 특징을 본능적으로 학습하면서,
인간보다도 인간을 더 잘 파악하여,
마음이나 육체를 가지고 노는 괴물들.
“그렇게 보이나...?”
“제가 이전에 신수 한 마리를 연구한 적 있었거든요. 아직 어려서 잡아먹기에 부적합한 생명체를, 인간으로 위장한 신수에게 던져주는 실험이었죠. 거기서 신수는 그 생명체를 바로 잡아먹지 않고 마치 애완동물처럼 생명체를 키운 뒤 잡아먹는 행동을 볼 수 있었어요... 당신, 그분한테도... 저는 이러한 특징들이 묻어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깊은 골목’의 신수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그분... 신수들은 이런 그분을 이용하여 인간을 사냥하려 한다는 것... 그래서 저는 처음엔 신수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모인 단체가 ‘신수 해방 교단’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그분을 마주한 순간 비로소 알 수 있었죠. ‘신수 해방 교단’, 이 이름 그대로 신수들의 해방을 위한 단체라고...”
“... 잘 알고 있군. 역시. 박사가 뽑은 인재다워.”
황야에서 온 짐승들.
그것은 나의 만감(萬感)을 좀먹는 대식가들.
그것은 그날 소녀가 내게 내밀었던 보라색의 꽃이 되어, 살랑이는 오만(五萬)의 죄악들.
“박사에게 전해라. 네 바람대로 되지 않을 거라고.”
그래도 고층에서는 하늘이 보였다.
그 속엔 무슨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겉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밝고 친절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고, 혼자서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나는 날아갔던 작은 새가 떠올랐다. 그녀도 이런 고층과도 같은 곳에 살았더라면 나를 두고 떠나갔을까?
아니... 애초 고층에서는 인신매매가 불법이니까, 그런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겠지.
‘우리들은 이제부터 깊은 골목으로 향할 거야! 거기에는 어떤 강한 신수가 도사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우리 함께 즐기다가 오자고!’
깊은 골목 탐험대의 리더가 외쳤던 새의 지저귐.
그것을, 다시 한번 내 눈으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구하러 가지 못해...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해주면 좋겠군. 배낭.”
나는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두었다.
그러곤 뒤돌아, 나는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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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라는 남자가 우리에게서 뒤돌아 걷기 시작하자,
‘신수 해방 교단’ 사람들은 그분을 일제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서관호는 이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분을 뒤따라 빠르게 사라져 버린 ‘신수 해방 교단’의 모습에,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기록! 기록하게 제 수첩 주세요!”
예루는 진에게서 수첩을 받아, 또다시 무언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된 거냐? 계산이 빠른 이 몸의 머리로도 이해되지 않는데?”
진의 바람이 예루가 열심히 적고 있던 수첩을 펄럭였지만,
예루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수첩을 더 꽉 거머쥐었다.
“‘신수 해방 교단’ 그 자체가 하나의 신수였던 거예요.”
“교단이 하나의 신수...? 그런데 왜 신수가 저 ‘그분’이라는 남자를 따라간 거냐?”
“그건 유추해 보건대, 신수는 그분과 일종의 공생 관계를 이뤘다고 생각되네요.”
“그렇다면... 그분도 신수라는 말?”
“네. 어떤 측면에선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그분은 그걸 깨닫고, 교단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간 것 같은데요...?”
빠르게 수첩을 넘기면서 무엇을 열심히 기록하던 예루의 모습을 진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곧 흥미를 잃었는지 그분이 내려두고 간 허름한 가방으로 다가갔다.
“... 그분... 괴물 같은 그 남자는 과연 가방 안에 뭘 넣어 두었으려나?”
진은 가방 앞에 쭈그려 앉아 들고 있던 사검의 검집으로 툭툭 건드리면서 말했다.
“그거... 그분의 동료분들부터 만나보고 만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교단과 그분이 사라지자마자 이렇게 바로 긴장감이 없어질 수 있다니.
서관호는 진을 말리고 싶었지만,
“어서 가방 안을 열어 보죠!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두근거리네요.”
예루마저 진 옆으로 다가가 수첩을 넘겨 메모할 준비를 했다.
“그럼 한 번 열어...”
“... 이렇게 떠나가다니. 그 녀석... 약속도 안 지키고 말이야.”
그러자, 입 하나가 가방의 지퍼 사이로 뱀처럼 튀어나와 진에게 말을 걸었다.
진은 튀어나온 입에 얼른 사검의 거머쥐면서, 예루 앞을 막아섰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는데...”
뭔가, 힘없이 축 처져 기운이 없어 보이는 입.
서관호는 다행히 아직 긴장을 완전히 풀지 않아,
저 튀어나온 입에 조금 덜 놀랄 수 있었다.
“그나저나, 라프도 있는데, 왜 ‘신수 연구 개발 부서’의 연구원에게 우리들을 맡긴 거야... 생각이 있는 건지 참...”
입은 놀란 우리들과 달리 그저 무감각하게 중얼거리면서, ‘입으로’ 우리들을 훑어보았다.
“당신은 그분이 사육하던 신수인 건가요!?”
역시나 예루는 가로막고 있던 진을 지나쳐,
가방에서 뱀처럼 길게 뻗어 나온 입에게 앞머리를 찰랑이면서 신기한 듯이 말을 걸었다.
“사육?! 아니거든. 나는 누구에게 사육 따위나 당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나는 반신수 반인간인 ‘배낭’이다. ‘신수 연구 개발 부서’의 연구원이라면, 이 몸에 관해 들어보았을 텐데? 내가 바로 공식 게이트를 침공한 그 그림자 신수라는 말씀.”
“... 아! 그 그림자 신수요? 맞아... 용사의 말론 선우민에게는 ‘입처럼 생긴 신수’와 공식 게이트를 공격한 ‘그림자 신수’가 있다고 하던데... 그게 설마, 같은 신수일 줄은 몰랐네요.”
서관호는 예루와 저 입처럼 생긴 신수... 반신수의 대화에, 아까 가방에서 입이 튀어나왔을 때보다 더 깜짝 놀랐지만, 괜히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자신은 G.G.E의 특수임무부대 소속이라 ‘그림자 신수 사건’을 조사하며, 이 신수를 잡기 위해 골목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결국 잡지 못했는데 이렇게 코앞에서 보다니...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 선우민은 지금 신수 연구 개발 부서에서 무슨 짓을 당하고 있겠지?”
반신수의 입이 스르륵- 뱀이 기어가듯 예루의 눈앞으로 길게 뻗어갔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진이 사검을 뽑아 들며 입에게 겨누었다.
“저는 그쪽 담당이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생명에 지장이 주는 실험은 하지 말라고 박사님의 지시가 있었으니, 아마 구속되어서 심리 감정이나 피검사 따위를 받고 있을 거예요.”
“그래, 박사... 그 녀석이라면 뭐... 조금 눈치채고 있겠지.”
반신수의 입은 경계하고 있던 진에게 입을 획 돌렸다.
“뭘 그렇게 경계하고 있냐?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봐?”
“... 이 몸은 반신수라는 걸 처음 들어봐서 말이야. 그래봤자, 신수 아니냐?”
“하! 반신수... 그래! 앞머리녀, 너라면 반신수에 대해서도 알 거 아니야? 어서 이 모자란 놈에게 설명해 줘라.”
입은 진의 말에 화가 난 듯 입을 크게 벌리면서 예루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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