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16. 지금까지

“그러면 구하지 않을 거야?”
“구해야지...”
“결정 난 거네. 어차피 ‘중앙 제어실’로 향하는 문은 열려 있으니까, 닫을 때도 정부 관청과 현재 우리가 있는 G.G.E 관청에서 신호를 보내줘야 닫을 수 있어. 그러니, 이곳의 관청만 망가뜨리면 한동안 시간을 끌 수 있을 거야.”
자르빌은 초코바를 마저 다 먹고, 이번엔 한 손 크기의 과자 봉투를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뭐... 애초, 이들은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를 모르고 있을 테니까, ‘무언가’를 옮기기 위해서라도 섣불리 문을 닫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자르빌은 주섬주섬 과자 봉지를 뜯어 안에 든 감자칩을 입에 넣으면서 말하다가,
뭔가 여운이 남는 듯, 입으로 과자를 옮기던 손을 멈추고서 말끝을 흐렸다.
“G.G.E 요원은 ‘무언가’를 계속해서 옮겨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도통 감이 잡히지 않네.”
자르빌은 남아 있던 여운 때문인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 MDF실로 들어오는 '배낭의 입'과 르빌-리에를 바라봤다.
“흐흐... 나... 나, 괴롭힘당했어.”
르빌-리에는 이곳으로 들어오자마자 내게 와락- 안겨 애처럼 칭얼거렸다.
나는 르빌-리에가 ‘배낭’ 특유의 성질 긁는 듯한 언행으로 인해 고통받았다고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보는 눈이 있으니까... 조금 떨어뜨려 놓으려고 몸에 힘을 주었는데, 어째 그녀는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괴롭혔다고...? 이년... 방을 나가자마자 도망치더니, 일이 다 끝난 뒤에나 슬금슬금 기어 나와 놓곤 앙탈 부리네?”
배낭의 입은 르빌-리에를 기다란 몸통으로 뱀처럼 빙- 둘러보면서 다그쳤다.
“... 그러면... 배낭이 괴롭힌 게 아니었어?” 라고 내가 말했지만, 르빌-리에는 더욱이 나를 가슴으로 꼭- 껴안고는 몸을 고정한 뒤, 슈트와 함께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너 그러다가 수호에게 걸리면 괴롭힘당한다? 나 같으면 여기 말고 어디 다른 곳으로 들고 가서 할 텐데~ 큭큭”
“뭣? 잠시만... 잠시...”
그녀는 내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지금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배낭의 말만 가만히 듣더니,
기분 나쁜 ‘검은 후광’을 더욱 빛내며 고정한 나를 번쩍 들어 마치 곰 인형처럼 옆구리 사이에 끼었다가,
갑자기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획- 돌린 뒤, 자연스레 나를 다시 내려 두고서, 내 뒤로 몸을 숨겼다?
“조금 오래 걸렸네요. 생각보다 요원들이 많아서 말이죠. 그래도... 용사들이 없었다는 건 정말 다행이었지만요.”
몸에 피투성이가 된 이다흰이 르빌-리에가 바라본 출입문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조금 늦게 그 뒤를 이어, 최수호도 속바지와 런닝 차림으로 이곳으로 들어와 아주 당당히 내 앞에 섰다.
“변태, 이다흰 옷과 내 옷 좀 배낭에서 꺼내줄래?”
라고 말하며, 최수호는 내 뒤에 숨어 있던 르빌-리에를 쳐다보자,
르빌-리에는 히익-하는 소리를 내면서, 내 뒤에서 조금 더 물러나 자기 다리를 품에 끌어안은 채 쪼그려 앉았다.
“어... 어. 알겠어.”
나는 부랴부랴 매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고, 안에서 옷들을 꺼내어 이다흰과 최수호에게 건네주었다.
“그나저나, 중앙관제실로 향하는 문이 열려 있을 줄이야... 그러면 이제 윤호씨의 누나만 구하면 되겠군요.”
이다흰이 내가 꺼낸 옷들을 주섬주섬 입으며, 커다란 모니터 속 지도에서 빛나는 한 점을 바라보았다.
“저 지도에서 빛나는 점이, 윤호씨의 누나가 있는 점이죠?”
“맞아...”
“정말 놀랍긴 하네요. G.G.E는 전용망을 이용하는 데다가, 보안이 철저한데 이렇게 빠른 시간에 해킹에 성공할 줄이야.”
입으로 놀랍다고는 하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고 무뚝뚝하게 말하는 이다흰...
아무튼, 나는 그런 그에게, 정말 누나를 구하러 가도 되겠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그래...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어쩌면, 이 신탑으로 다급히 와준 이들에게 모욕이 될 수도 있으니깐,
나는 지금 당장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만 생각하자고, 마음을 잡았다.
“... 누나는 괜찮아...?”
최수호도 모니터 속, 지도에 찍힌 점을 보며 조금 주저하듯이 내게 물었다.
“후인-르빌씨가 G.G.E가 끊어둔 민간 통신망을 복구해 주어서 어찌저찌 연락은 닿았는데... 누나는 자기가 있는 곳에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
“... 누나는 너를 생각해서 그러는 걸 거야. 그러니, 너는 누나가 살아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 돼.”
최수호는 옷을 갈아입고, 내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전신 슈트의 헬멧을 집어서 내 앞으로 내밀었다.
“너는 자기 앞가림도 안되는 데 남을 더 생각하니까, 오래 있어봤자 마음고생만 더 해. 그러니, 지금 당장 출발하자.”
나는 이전보다 더 길어진 최수호의 머리칼을 잠시 바라봤다.
누나를 구하고, G.G.E를 말리면,
나는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아니... 그러지 못하더라도, 조금 더 길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나는, 내 속에 가득 차오르는 생각들을 억누르고서, 그녀가 내민 헬멧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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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으로 뒤엉킨 세상으로부터.
거짓된 신들의 농간에 사람들이 죽어 갔다. 사람들이 죽어 간다.
내려다보는 적막함을 풍기며, 그것이 수 세기 반복되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
새로운 터전으로 모두를 인도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하면서,
여태껏 지금의 순간을 위해서 살아왔다.
“아이들은 아이답게, 순수하고 귀여운 맛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이 세계엔 각자의 삶과 장소가 있다고 저는 생각하지만... G.G.E 사령관님은 그걸 넘어서려고 하시는 거군요.”
얼굴을 뒤덮는 민무늬의 ‘검은 가면’을 쓴 박사는, 새하얀 공간 속에서 G.G.E 사령관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당신이 기원한 소원으로 인해 이 세계의 인류가 절멸할지도 모르는 데, 굳이 이 프로젝트를 강행하려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검은 가면은 거대한 꽃 한 송이 앞에 서 있던 G.G.E 사령관을 향해 두 팔을 들어 보이며, 즐거운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인간들을 걱정할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고 나의 소원을 방해할 생각도 없다면, 그저 궁금해서인가? 박사.”
G.G.E 사령관은 박사의 물음에도, 그저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거리는 거대한 꽃 한 송이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네. 지식의 근원은 모든 만물에서 나오는 거니깐요. 부디, 당신의 지식과 의지, 신념을 제게 알려주시어, 제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보탬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래...”
거대한 꽃 한 송이를 올려다보고 있던 G.G.E 사령관은 뒤돌아서서, 박사의 검은 가면을 바라보았다.
“유일하게 너만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
“저는 단순히 호기심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이니깐요.”
“...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때 자네가 내게 해준 말이 생각나. 너는 ‘그분’에게서 이 말을 들었다고 했지. ‘작은 새는 날개를 먹어 하늘을 날아간다.’라고. 이 이야기를 들은 게 벌써 몇 세기 전의 일이야.”
“아...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이야기, 이었죠. 그건.”
“그래.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고민했었다. 모든 이들이 기회를 얻을 방법이 없는지, 골목으로 에워싸인 이 저주받은 세계에서 한 명도 남김없이 구원해 줄 방법은 없는지...”
G.G.E 사령관은 다시 뒤돌아서서 꽃 위로 손을 올리자,
스멀스멀 거대한 꽃은 G.G.E 사령관의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를 구하려고 할수록, 그만큼 상응하는 인과가 따르는 법이었지.”
“이상의 타협, 이라는 건가요?”
“아니,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육체가 바뀌었지만, 타협한 적 없었다.”
“... 그건... 아... 그렇군요. 이거 참 당신도, 저와 비슷한 부류였던 것이었군요.”
박사의 ‘검은 가면’에서 뻗어 나오던 즐거운 듯한 목소리는,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겸허해졌다.
“설마, 당신은 처음부터 구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 그저 새장이 싫었던 거였습니까?”
박사의 말에도 G.G.E 사령관은 그저 검은 눈물을 흘릴 뿐이니,
거대한 꽃은 이윽고 G.G.E 사령관의 손바닥 안으로 전부 빨려 들어갔다.
“묵시록에 여정은 사람들을 깊은 심연으로 끌고 가시어지니. 빠져나오지 못하는 깊은 여정의 끝은, 우리를 젖이 가득한 대지로 인도할지어다.”
G.G.E 사령관의 검은 눈물은 곧, 이 새하얀 대지를 더럽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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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G.G.E의 군사 시설에 있던 ‘G.G.E 관청’과 신탑의 ‘중앙 관청’을 연결해 주고 있던 내부 네트워크를 물리적으로 끓어 버린 뒤,
도시의 한 구역을 에워싸고 있던 거대한 벽으로 향했다.
‘여기서는 거대한 벽이 한눈에 보이네...’
G.G.E의 군사 시설은 군사 시설이라 그런지, ‘신탑’에서 제일 높은 산의 일정 면을 평지처럼 깎아 그 위에 지어져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서 있던 이 언덕 위에서는 도시의 단편을 한눈에 볼 수 있었는데,
G.G.E가 애초 이를 노린 건지 몰라도, 이 언덕 위에서는 저 ‘거대한 벽’들도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벽 주변과 벽 위에는 용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어. 저들을 무시하면서 벽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데?”
선우민은 거대한 벽들을 인상을 찌푸린 채 요리조리 관찰하며 말했다.
“이야... 그게 보이냐? 사력으로 시력 좀 강화한다고 보일 수 있는 거리가 아닌데?”
기다란 몸통에 달린 배낭의 입은 선우민 옆으로 뻗어와 ‘입’을 찌푸리면서 거대한 벽을 바라보다가 신기한 듯이 물었다.
“이 녀석의 감각은 사력을 안 써도 이미 사람을 벗어났으니까... 뭐랄까? 동물과 비슷하달까?”
그러자, 자르빌이 배낭 옆으로 다가와서 장난스럽게 배낭의 말에 대꾸했다.
“동물~!?”
“시력뿐만이 아니라 냄새도 잘 맞지, 소리도 잘 듣지, 이거 완전 멍멍이와 매가 합쳐진 키메라...”
선우민은 두 손으로 자르빌의 옆구리를 거머쥐고는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르빌은 기겁하며, 사력까지 쓰면서 선우민에게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미 간지럽힘을 당하고 있어 그런지 자르빌은 꼼짝없이 선우민에게 붙들려 온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그만! 그만! 알았어!”
“어딜!”
“항복! 항복할게! 미안! 하하하...”
자르빌이 몸을 배배 꼬면서 결국 사과를 남발하자, 선우민은 그제야 자르빌의 옆구리를 놓아주었다.
... 이런 모습을 봤을 때, 이들은 진짜 어린 것 같은데... 나도 딱 이 나이 때 누나와 이런 장난을 많이 쳤었다.
뭐, 보통 일방적으로 내가 장난을 당하는 처지이었지만, 그래도 그것대로 재밌었는데...
“용사들에게 들키지 않고 벽을 넘어가는 건 힘들 테죠. 그러니, 두 명 정도 미끼가 되어, G.G.E 용사들을 멀리 떨어뜨리는 놓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다흰은 장난치는 선우민과 자르빌을 뒤로한 채, 내게 다가와 말했다.
“미끼는, 저와 자르빌이 맡도록 하죠.”
“... 괜찮겠어...?”
“아직... 어색하네요.”
이다흰이 자기에게 존댓말 할 필요는 없다고 했는데,
왜인지 이 소년에게 반말하는 건, 나한테 있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노력했다.
이다흰은 이런 나의 어색한 반말을 듣자, 늘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서 살짝 화색이 도는 것 같았다.
“네, 당연하죠. 저는 오히려 벽 안쪽으로 들어가는 윤호씨가 더 걱정되는걸요.”
이다흰은 도시를 감싸고 있던 저 거대한 벽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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