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약속을 지켜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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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민
작품등록일 :
2023.05.17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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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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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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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과 같다

DUMMY

이제는 그 눈에 어떠한 지성도 남지 않은 늑대는 붉은 안광을 줄줄 흘리며 반격을 시도한다. 전투할 때만큼은 아까 보다 훨씬 더 날카로워져 있다. 그러나 이번엔 밀리지 않고 충돌하며 합을 나눈다. 왼쪽에 든 검으로 내지른 공격을 막은 늑대가 빈 손으로 공격해 들어오자 오른손에도 마력을 둘러 방어한다. 아픔은 이미 초월해 있다.


몸을 빙글 돌리며 베어 날에 회전력을 부여한다. 몸 중심에서 검 끝으로 갈수록 깃들어 있는 파괴력이 강해진다. 양손을 교차해 막은 늑대가 뒤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쭉 밀려난다. 가장 단련되어 있어야 할 팔에서도 충격을 다 흡수해내지 못하고 피가 뿜어져 나온다. 이번엔 서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네 발로 달려온다.


수많은 먹이를 씹어왔을 강철 같은 이빨을 정면에서 마주한다. 마법과 치악력이 서로 힘을 겨루지만 마법의 검날은 전혀 부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빨간색으로 더욱 물들며 세상에 균열을 만들 기세로 일렁거린다. 오른손으로 늑대의 눈을 공격하려 들자 늑대는 몸을 빼고 그 공격을 피한다. 주먹에서도 마찬가지로 붉은색 마력이 소용돌이 돌며 닿는 무엇이든 집어 삼키려 하는 듯 보인다.


이번엔 이 쪽에서 달려든다. 양손으로 검을 붙잡아 위에서 아래로 일자를 그리며 내리긋는다. 급히 몸을 뺀 늑대의 갈기 몇 가닥이 허공에 나빌대고 한 순간 관성에 이끌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본 늑대가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쇄도해 온다. 이번엔 그 속에 꿈틀대는 공허를 똑바로 마주하며 공격을 이어 나간다. 짧게 얼음길을 깔며 전방으로 몸을 미끄러뜨린다. 상대의 오른쪽 앞발을 완전히 잘라낼 의도로 그은 검은 발톱에 막혀 깡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간다. 손아귀가 반동을 못 이기고 피를 터뜨리며 칼을 놓치지만 다시 손에서 자라나듯 칼을 형성해낸다. 여전히 정면에서 힘을 겨루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되지 않지만 상황에 따라 써먹을 수 있는 선택지로 자리매김 했음을 알았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서로에게 유리한 자리를 찾아 나간다. 늑대는 절대 뒤를 잡히지 않으려는 반면 이 쪽은 계속해서 사각을 점하려 한다. 나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해 계속해서 공격이 들어온다. 땅을 강하게 내리찍는 앞발을 옆으로 몸을 날려 피하고 생채기라도 내기 위해 칼을 휘두른다. 불안정한 자세에서 나가는 공격이라 상대의 털만 조금 잘라내거나 겉가죽에 얕은 상처를 내는 경우에만 그친다. 상대도 공격의 효과가 없음을 깨닫고 서로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시간이 지나며 늑대 쪽은 상처가 서서히 낫고 있는 것을 확인한다. 반면 이쪽은 이미 자연적인 회복 기능은 기대하기 힘들고 관련 마법조차 사용할 수 없다.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급해진다. 먼저 몸을 날려 우선 정면에서라도 공격을 이어간다. 검을 왼쪽 아래에서 사선으로 그어 올리며 늑대의 턱을 노리지만 끝까지 검로를 주시하던 늑대가 고개를 위로 쳐들어 공격을 피한다. 검은 허공을 가른다. 그 후 늑대는 이쪽의 다리를 노리며 오른쪽 앞발로 땅을 쓸 듯이 공격해 들어온다.

그 공격을 마력 폭발을 이용한 도약으로 피해낸다. 공중으로 뛰었기에 방향을 바꿀 수 없는 이쪽이 떨어질 방향을 향해 늑대가 아가리를 벌리고 물어 뜯으려 한다. 공중에 마력 덩어리를 형성해 발로 밟아 재도약, 이번엔 온전히 후방을 잡는데 성공한다. 늑대의 왼쪽 뒷발의 아킬레스건을 향해 얼음을 던지며 오른쪽으로는 얼음길을 깔며 직접 검을 휘두르며 진입한다.


급격히 속도를 낸 탓인지 늑대는 방향전환이 쉽지 않은 상황에 놓인다. 앞으로 뛰어가며 뒷발로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려 하지만 얼음의 속도가 훨씬 빨라 어쩔 수 없이 꼬리를 휘둘러 얼음을 쳐낸다. 얼음조각이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져 비산한다. 그 사이를 몸으로 뚫으며 뒷발의 약점을 공격하려 하지만 반사적인 뒷발차기에 검의 넓적한 부분을 오른손을 이용해 지면과 평행하게 눕히며 공격을 막아낸다.


기동성이 위협받아 화가 난 것인지 생명의 위험을 느낀 것인지 방향을 틀어 네 발로 달려온다. 더 이상 힘을 숨길 이유도 없다는 것인지 아까 늑대의 아가리 안쪽에서 언뜻 보았던 무가 살짝 벌려진 아가리의 양쪽 틈으로 안개가 퍼지듯 스며 나온다. 어떤 식으로든 노출되면 죽거나 죽는 것에 준하는 부상을 입을 것을 직감하고 손에 쥔 마검의 크기를 더욱 키운다. 지금까지가 1이라면 이제는 2에 달하는 출력. 핏빛 검이 손에서 몸부림친다.


우선 무를 마력으로 벨 수 있는지 확인한다. 일부러 충분히 끌어들인 이후 살짝 피하며 무의 짙게 뭉친 부분을 향해 검을 옆으로 몸을 틀며 긋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간섭하며 상쇄되지만 그 흔들림의 여파로 내 몸에 떨어지는 무의 숨결까지는 막아줄 수 없는 것을 깨달았다. 재빨리 관성을 유지하며 늑대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 거리를 벌린다.


무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늑대가 주둥이에서 더 밀도 높은 무를 뿜어낸다. 발에 뭉글게 깔리고 있는 무를 온몸에 두르고 뛰어오기라도 한다면 더 이상 지금까지 해왔던 방법으로는 몸을 부비며 싸울 수 없다. 원거리에서 쏘는 공격만으로는 결판이 나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한동안 회피에 집중한다. 늑대도 더 이상의 여유는 많지 않은 지 승기를 잡았을 때 집요하게 공격해 들어온다. 상대의 속도는 줄었지만 그 때문에 방향전환이 자유로워진 영향으로 오히려 피하는 것이 더욱 힘들어진다. 아까도 그랬지만 이제는 정말로 스치면 죽는다는 심적 부담이 더욱 몸의 움직임을 힘들게 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반격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상대가 행동을 주저할 것이다. 무에 닿지 않으며 찌르기 위해 한층 마력을 강하게 주입한다. 길이가 세 배 가까이 늘어나며 섬세한 검로를 그리기는 힘들어지지만 이게 최선이다. 늑대의 주변으로 얼음길을 둥글게 만들어 상대가 만들어내는 무의 영향권 바깥에서 움직이다 한 번씩 몸체를 베어낸다. 그러나 이미 상황의 우위를 점한 늑대는 계속해서 내 체력을 소모시키기만 할 뿐 섣불리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 최소한의 방어만 유지하며 얕은 공격은 무시로 일관한다.


상대의 추격은 멈추었지만 대신 이쪽의 체력이 바닥나기 직전이다. 멀어지기 위해 남은 힘을 짜내 몸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빙글 돌리며 검을 휘두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위협적인 공격이라 늑대도 몸을 틀어 꼬리로 방어하지만 사실 힘을 얼마 주지 않은 위협용 공격에 불과하다. 그 반동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미끄러지는 경로에 얼음길을 깔며 멀리 거리를 벌리는데 성공한다.


앞으로 양쪽에 남은 전투 지속력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상대는 무를 두른 이후로 싸우면서도 체력을 온존했고 이쪽은 격렬한 마법 사용이나 움직임 탓에 굉장히 지쳐 있다. 상황을 타개할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싸웠던 상대, 동물, 그 모든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되었군요. 동물보다 힘이 약한 인간이 도구나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할 지는 역설적이게도 나를 죽이려는 위협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어요.’


늑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늑대를 관찰해야 한다. 이제 무는 거의 빈틈없이 늑대를 감싸고 있다. 가끔씩 요동치며 슬며시 형체를 드러내고 있지만 그것은 간격이라 부를 만한 것 없는 완전한 카오스의 주기로 나타나는 약점이다. 흘긋 보이는 상처에서도 이제는 피 대신 공허가 흘러나오고 있다.


문득 이쪽의 상태를 점검한다. 피를 잔뜩 흘렸을 텐데 진작 쓰러지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아니나 다를까 온몸에 걸친 수십 수백개의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고 있지 않다. 대신 오래된 혈액처럼 검붉게 물들고 점도가 높아 보이는 액체 형태의 마력과도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다. 피가 이것으로 대체된 것인지는 몰라도 이미 소진되고 한 줌도 남지 않았을 마력을 대신해 사용하고 있었음을 이해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몸뚱아리에는 혈액 따위 흐르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늑대가 한 것을 그대로 보고 따라한다. 혈액과도 같은 것을 몸 주변에 진하게 둘러 일종의 마력 장벽을 형성한다. 손을 들어 만져보면 무척 따뜻하다. 밀도만 충분하다면, 무와 충분히 겨룰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동일한 눈높이에 선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싸우는 내내 힘에서 밀렸으니 체력이 부족한 지금은 더더욱 힘싸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고아원에서의 아침이 생각난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자는데 혼자 깨어 기지개를 켜곤 했다. 평일과 달리 주말은 수녀님의 간섭이 현저히 적다. 평소 수업을 듣고 뛰어 놀고 수녀님 몰래 새벽에 촛불 하나에 의지해 간신히 얼굴만 알아보며 떠드는 일상으로 인해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시간이었다.


단체 생활은 언제나 시끌벅적해 외로울 틈이 없다는 장점이 있긴 하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생활에 익숙하더라도 십대 중반에 들어선 여자에겐 적절한 수준의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비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내심 그런 시간을 원했지만 특별히 아이들이나 수녀님 앞에서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아침에 눈을 떴는데 놀랍도록 상쾌하고 고요했다. 잠을 잔 시간은 네 시간이 겨우 될까 말까 했지만 거울에 비쳐본 비나의 눈 밑엔 그 어느 때보다 다크 서클이 옅었다. 거실에 나가 커피를 한 잔 마시며 귀 기울이고 있던 괘종시계의 초침이 딸각대는 소리는 왠지 현저히 그 주기가 느리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는 때때로 남들 몰래 일찍 일어나 혼자만의 아침을 즐기곤 했다. 이상하게도, 그 날 만큼은 심장이 빨리 뛰었던 것 같다


내가 빨리 움직인다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과 같다.


“혈류 가속.”


늑대의 발과 검을 맞대며 처음으로 외쳐보는 새로운 영창. 이런 식으로도 마법을 쓸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강한 이미지를 담아 소리친다. 피, 혹은 피와 닮은 무언가가 몸 구석구석을 빠르게 누비는 이미지를 그린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온 몸의 대사가 활성화되는 감각과 함께 몸을 감싼 핏빛 안개 역시 맹렬히 회전하며 무를 밀어내고 있다.


“워어어어!”


“아아아아!”


서로 모든 것을 토해내며 싸운다. 귀의 바깥에서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귀의 안쪽에서는 함성소리가 서로 부딪히며 묘한 공명을 만들어낸다. 아까보다 모든 공격이 선명하고 느리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 속도에 적응하며 모든 공격을 정면에서 맞받아쳐낸다.


한계까지 튀어나온 발톱이 날카롭게 내리 꽂힌다.


두 손으로 검자루를 붙잡아 위로 강하게 올려붙인다. 힘겨루기 끝에 발톱이 뚝 하고 부러진다.


관성으로 튕겨 올라간 검날이 주둥이마저 베어버릴 기세로 상승한다.


늑대는 몸을 반 바퀴 돌려 꼬리로 타격하려 한다.


꼬리와 검이 부딪히는 찰나, 바닥에 얼음길을 깔아 그 힘을 이용해 이동한다. 자세를 낮추며 오른쪽 다리를 몸 바깥으로 쭉 뻗어 궤적을 만들어내고 그대로 앞발과 뒷발 사이의 배 아랫부분으로 들어간다.


수 차례 난도질을 해 짧은 시간 안에 수십 개의 자상을 만들어낸다. 늑대가 고통에 울부짖는다.


고통에 마구 날뛰는 꼬리를 붙잡아 하늘을 향해 치켜들어졌을 때 수직으로 높이 뛰어오른다. 그 높이는 늑대 키의 스무 배. 검을 손아귀에서 빙그르르 돌려 양 손이 부서져라 역수로 움켜쥔다.


“마무리!”


그대로 검은 정수리를 향해 내려 꽂힌다.


“우···우···”


제대로 울지조차 못하며 늑대는 멈춰 선다. 생의 마지막에 안광이 돌아오고 다시금 노란색 눈동자를 드러낸다.


털썩


늑대의 시신이 땅으로 힘 없이 쓰러진다.


그 눈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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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날아와 앉은 참새들 23.05.25 1 0 13쪽
»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과 같다 23.05.24 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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