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같이 멸망한 세계 속 유일한 파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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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앗호
작품등록일 :
2023.05.2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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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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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브 - 3

DUMMY

*


처음에는 그저 졸린 듯한 기분이었다. 정신은 몽롱하고 눈은 깜빡깜빡 감기고.


그러다 기억도 안 나는 어느 날 의식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치 잔잔한 물 속으로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답답하지 않고 몸과 마음이 편안했다.


분명 가라앉고 있음에도 편온한 감정이 드니 무서웠다. 그리고 다시 흐릿한 감각 속에 여러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파이브?'


파이브? 뭔 소리지?


그러나 해답을 알아내기도 전에 다시 의식이 더욱 가라앉았다.


'파이브?'

'누...구..?'


내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지금 자고 있을 텐데...


꿈인가? 확실히 꿈을 꾸는 느낌이다.


그렇구나 꿈이구나.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의식이 완전히 잠겼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가운을 입은 사람들 일명 닥터라고 불리는 자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며 이종족의 괴물들이 어렵지 않게 보이기 시작할 때 쯤 의식이 돌아왔다.


그래도 아직까지 나는 꿈속에 있었다.


그러던 중 하얀 가운이 아닌 검은 검을 찬 닥터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그때부터 나와 함께 다니며 구해주고 싸우고 돌아왔다.


'수고했어, 파이브.'



"헉!"


드디어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가라앉던 정신과 육체가 침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간 없었던 기억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펭귄인형도 호털 음식도 수원화성도 그리고 갇혀 있던 순간도.


꿈이 아니다. 모두 현실이었다. 나는 잠을 잔 것이 아니다. 죽어 있었던 거와 같았다. 남들에 의해 손 발이 묶인 채로 비탄의 파도에 침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파도 속 들려오는 부드러운 소리.


'파이브.'


내 이름이 아니지만 다른 이들이 나를 부르는 말. 때론 장난기가 담긴 채, 때론 부드럽게, 때론 걱정스럽게 불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 귀를 통해 생생하게 들렸다.


자신들을 믿어 달라고.


*


문 틈으로 보이는 사내. 이상하게 그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가슴이 먹먹했다. 내가 아닌 파이브와의 추억일 텐데.


끼이익...


세탁소 문이 힘없이 열리며 후드를 뒤집어 쓴 파이브가 모습을 드러냈다. 윤견은 가만히 않아 고개만 들며 파이브를 쳐다봤다.


파이브도 그런 윤견을 내려다보고는 콧방귀와 함께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디로 가려고 했어?"

"...햇빛 보육원에.“


파이브가 자란 집과도 같은 곳이다.


"거기 멀잖아? 애가 겁도 없네."

"위험하다 싶으면 돌아가면 돼."

"...그렇긴 하지. 그럼 같이 가자."


파이브가 놀란 토끼눈으로 윤견을 바라본다. 윤견은 머쓱하니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뭔, 못 할 말 했냐? 반응이 그게 뭐야?"

"아니...다른 쪽이잖아."

"좀 돌아가면 되지. 여기도 가는 길은 아니었잖아."


파이브는 대답도 없이 무릎을 끌어안고서 발을 사부작 비볐다. 그 모습에 피식 웃고는 엉덩이를 떼며 파이브에게 손을 내밀었다.


"춥다, 가자 파이브."


파이브의 손이 잠시 주저했지만 이내 윤견의 투박한 손을 잡고 일어섰다.


"...밖에 아직 비오나?"

"아까처럼 내릴 걸? 모자 뒤집어 써."


상가 밖으로 나가니 전보다는 약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팍..차팍.


비로 젖은 보도블럭을 밟으며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최대한 애쓰지 않으려 했지만 계속해서 찔러오는 파이브의 눈치에 윤견은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파이브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뭐..뭐야, 또 왜? 뭐가 문제야?”

“아니..그..나도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나..싶어서.”

“나? 나아...도 뭐 닥터지. 닥터라 불러.”

“진짜 의사도 아니면서.”

“시끄러. 그럼 존댓말 하든가. 나이도 어른 게.”

“윽! 꼰대.”


파이브가 혀를 빼며 인상을 구겼다. 평소의 파이브였으면 상상도 못할 반응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 표정이야 말로 평소 파이브의 표정일 것이다.


“급식아 앞으로는 맘대로 가출하지 마라~.”

“뭐래. 근데 고딩도 급식..이긴 하구나.”

“...너 고등학생이었어?”

“우씨!”


예상치 못한 소식에 윤견의 다리가 멈췄다. 파이브가 짜증과 함께 윤견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잡혀 갈 때 중2였거든!? 그리고 몇 년이 지났는데!”

“말도 안 돼! 그럼 너가 라호 보다 연상이야??”

“그럼. 앞으로 라호는 날 누나라고 불러야 할 걸.”

“..허! 참..”

-갇혀 있어서 성장판이 닫힌 건가...


둘은 그렇게 뛰어갈 때와는 다른 속도로 천천히 길을 돌아갔다. 마치 강북구에서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무사히 돌아온 파이브를 향해 민혀과 라호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가갔지만 달라진 파이브에 잠시 주춤거렸다. 그런 그들을 향해 파이브가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평소랑 똑같이 대해요. 그런데 문하 언니는?”


순간 일행들의 얼굴에 그늘이 스치며 지나갔다. 파이브도 단박에 그늘을 발견하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흔들리는 동공으로 윤견을 쳐다봤다.


윤견은 깊게 한숨을 쉬고는 파이브의 등에 손을 얹었다.


“내일 인사하러가자. 내일, 맑은 날에. 들어가자.”

“..그...”


파이브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자 곧바로 눈치 챈 윤견이 다시 파이브의 등을 밀었다.


“내가 가서 말할게. 춥지? 얼른 씻어라. 민혁아 아래 층 가서 뜨거운 물 좀 받아서 와라.”

“옙!”

“라호는 상부에 말해주고.”

“네.”


그렇게 일행들을 시청 건물로 보내고 윤견은 재채기와 함께 시의회로 들어섰다.



“다행이군..”


머리를 붕대를 감고 있는 강식이 안도인지 모를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설마 머리를 공격한 겁니까?”


사색이 된 얼굴로 묻자 강식이 손을 다급히 저었다.


“아! 아닐 세. 이건 내가 넘어져서 다친 거야.”

“다..다행이네요.”

“대신 뺨을 맞았다네.”


강식이 고개를 돌리자 볼에 선명하게 찍힌 손바닥자국이 보였다.


“싸게 맞았네요.”

“그렇지...”


강식이 쓸쓸한 미소를 짓고는 의자를 뒤로 젖혔다.


“아마 다시는 나를 보려고 하지도 않겠지.”

“...네.”


윤견이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대답 자체에 장난기는 없는 진심이었다. 강식 역시 받아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방에서 작은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상자 하나를 열어보니 단순한 스타일의 팔찌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에는 주사기가 달랑 들어있었다.


-팔찌? 그리고 이건...


"...이거 힐링 샷이죠?"


모습은 다르지만 헌터인 그이기에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역시나 강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팔찌랑 함께 파이브에게 주게나."

"이거 하나 밖에 없는 겁니까?"

"온전한 힐링 샷은 그거 하나뿐이라네."


-온전한?


의아함에 올라간 눈썹을 본 강식이 이번에는 품속에서 손바닥 크기의 철제 함이 있었다.


딸깍.


함에 버튼을 누르자 뚜껑이 위로 올라가며 내용물들이 보였다. 검은 색 종이를 돌돌 말아 놓은 것만 같은 담배들이 들어 있었다.


"...이건 또 뭡니까, 이 담배들은?"

"자네 안주머니에 있는 거 봤네. 게다가 이건 보통 담배랑은 달라."


담배는 가지고 있는데 피지는 않습니다. 라고 반박하려던 윤견의 입이 멈췄다.


강식은 담배 하나를 꺼내 윤견에게 건넸다. 검은 담배를 이리저리 살피던 윤견은 코를 가까이 대며 냄새를 맡자 몸의 세포기 깨어나는 것 같은 청량감이 맴돌았다.


마치 금연했던 사람이 담배 냄새를 맡은 것처럼.


"...이거 힐링 샷 아닙니까?"

"제대로 봤군. 이번에 남은 찌꺼기로 한 번 만들어 봤네."

"그럼 이거 하나에 힐링 샷 하나 분은 아니겠네요."

"그렇지."


담배 케이스를 통 째로 받은 윤견이 담배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럼 지금 미리 다 펴서 광석의 힘 회복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게 말했듯이 힐링 샷의 찌꺼기로 만든거라 한 방에 힘이 회복되지는 않아. 음...회복제라기 보다는 각성제에 가까워."

"각성제?"

"말 그대로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면 그 시간동안 힘을 끌어 오를 수 있지."

"헤에...손재주가 좋으시네요."


가볍게 케이스를 까딱거리며 넘어가던 윤견을 향해 강식이 손가락을 짚으며 말했다.


"잠깐, 그래도 피는 시간에 따라 부작용이 있으니 신중하게 펴야 할 거야."


강식은 그 뒤로 시간에 따라 찾아오는 부작용들을 설명했다. 윤견도 이건 중요한 얘기이기에 최대한 집중하며 들었다.

그렇게 강식의 모든 설명이 끝나자 윤견은 그제야 자신의 손 위에 올라온 게 정확히 무언인지 인지할 수 있었다.


윤견이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때에는 파이브는 이미 삐삐를 배에 올린 채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윤견은 조심히 삐삐를 들어 올리고는 이불을 덮어줬다.


"..뭔가 갑자기 제 자식이 급성장한 느낌이었어요."


민혁의 말에 윤견이 작게 웃었다.


"그러게 벌써부터 가출이나 하고. 라호는?"

"여깄어요."


라호가 화분 하나를 들고서 나타났다. 라호의 말에 의하면 태양이 아닌 달을 보며 자라는 식물이라고 한다.


고작 셋만이 모였지만 이제는 이들이 전부다. 전에 문하가 앉았던 의자는 비어둔 채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분명 비어 있는 의자지만 이상하게 시리 존재감이 컸다.


애써 무시하며 윤견이 말꼬를 틀었다. 가장 먼저 나온 주제는 다음 목적지였다.


"좋아요, 전."

"네, 그렇게 하죠. 많이 돌아서 가는 것도 아니고."


다행히 모두 다음 목적지에 불평하지 않았다. 파이브 시작점인 곳 햇빛 보육원.

당연히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이미 진즉에 보따리들에게 우편번호까지 알아낸 윤견이었다.


“그럼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서. 언제 출발 하냐는 건데. 너희는 어때?”

“일단 자동차 배터리도 충전했고 필요한 부품이나 수리는 끝났어요. 언제든지 오케이입니다.”


민혁에서 라호에게 시선을 옮기자 라호도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저도 필요한 씨앗은 이미 충족하게 재배했어요. 저..저도 오케이입니다. 아, 저는..말이죠.”


라호의 불안한 시선이 파이브에게로 향했다. 민혁과 윤견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분명 평소와 같은 모습의 파이브였지만 이상하게끔 라호의 눈빛만큼이나 불안해 보였다.


“그래..언제든지 출발은 가능하다는 거지...”


턱에 손을 괴는 윤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럼...다음 문제...새로운 동료이려나.”


일순간 라호의 눈빛이 크게 요동치며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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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악몽 24.06.03 12 0 11쪽
222 새하얀 운동장 24.06.01 13 0 11쪽
221 탈영병 24.05.30 14 0 11쪽
220 비 오는 밤 24.05.28 12 0 11쪽
219 궁상 24.05.26 10 0 9쪽
218 처형자 - 2 24.05.25 15 0 11쪽
217 처형자 24.05.23 13 0 11쪽
216 파이브의 각오 24.05.21 14 0 11쪽
215 어른 없는 밤 24.05.19 14 0 11쪽
214 녹색 도시 - 7 24.05.18 12 0 11쪽
213 녹색 도시 - 6 24.05.16 13 0 11쪽
212 평범한 존재 24.05.14 16 0 11쪽
211 녹색 도시 - 5 24.05.12 15 0 11쪽
210 녹색 도시 - 4 24.05.10 18 0 11쪽
209 녹색 도시 - 3 24.05.08 13 0 10쪽
208 녹색 도시 - 2 24.05.06 20 1 11쪽
207 녹색 도시 24.05.05 17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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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문제아 - 2 24.05.01 21 1 11쪽
204 불량아 - 7 24.04.29 19 0 11쪽
203 무채색과 긍지 24.04.28 25 0 11쪽
202 경찰청 - 3 24.04.27 2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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