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과 긍지

‘견아.’
한 때 홀로 검을 다듬고 있는 윤견에게 문하가 물은 적이 있었다. 질문에 대해 윤견은 하던 것을 하며 대답했었다.
‘내 가방을 노리던 놈들이었어. 쉽게 뺏기지 않자 무기를 들고서 공격하더군. 그래서...베었어. 제압? 아니, 할 수 있었어.’
칼날을 다듬던 윤견이 손을 멈추고 흑도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검은 날 때문에 한 층 더 어두워진 눈은 그 때와 비견해도 손색 없었다.
‘그 놈 전에도 많았어. 구해줬더니 커터 칼 들고 가방 뺏으려던 놈, 잘 때 몰라 와서는 죽이려던 놈.
그 때마다 상처를 늘리며 제압하거나 기절시켰어. 그런데 그날은...날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이종족의 기습에 잠을 못 자서 예민했었는지 아무 생각 없이 감정에 따라 손을 움직였어.’
동족을 베는 느낌을 넘어선 동족의 생명을 빼앗는 기분. 첫 살인의 순간 윤견은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마치 풀을 베는 것처럼 아무 것도. 차라리 처음 이종족을 죽였을 때가 더 충격적이었다.
‘이종족을 하도 죽여서 그런지 이런 거에 둔감해 졌었나봐. 그래도 지켰던 존재들을 죽였는데...아무 느낌도 없었어. 그냥...빨리 자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었어.’
파앙!
기효가 소파 사이에 앉아있는 탁상을 걷어찼다. 넓은 탁상은 가뿐히 기효의 모습을 가렸다.
푸른빛을 내는 흑도가 한 번의 궤적으로 탁상을 두 동강내자 그 틈으로 십자가가 날을 세우며 솟아났다.
고개를 꺾자 뺨에 붉은 선이 그어지며 피를 흘렸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몸을 집어넣으며 흑도를 움직였다.
쉴 틈 없이 주고받는 공방에 찢어질 듯한 마찰음이 그들을 에워쌌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익숙한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서로의 움직임을 쫓았다.
{온 – 도깨비불}
흑도의 궤적에서 네 개의 푸른 도깨비불이 일렁이더니 기효를 향해 날아갔다.
“치잇!”
십자가와 체인으로 두 개는 막아냈으나 막지 못한 두 개를 피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윤견의 발차기가 날아왔다. 발차기는 그대로 기효의 옆구리에 명중했다.
발차기에 맞은 기효는 바닥을 잠시 구르고는 자연스레 일어서며 손가락을 까딱 움직이자 바닥에 있던 체인이 윤견의 종아리를 잡았다.
-! 어느새!?
윤견도 바로 응수하려 했지만 다시 튕기는 기효의 손가락질에 체인과 함께 벽으로 날아갔다. 체인을 끊으려하자 다시 체인을 움직여 천장에 천장으로 윤견을 날렸다.
쾅!
천장에 박힌 윤견이 정신도 처리기 전에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으아 씹!”
바닥에 처박히자마자 소파를 집어 던졌다. 기효는 찰나의 시간 안에 판단을 내리며 방어가 아닌 공격을 시도했다.
다시 윤견을 벽에 처박아 두고 자신도 소파에 치이며 뒤로 밀려났다. 그 틈에 종아리에서 체인을 빼내며 자유를 되찾았다.
기효도 소파를 치우고서 뱀과 같은 미소와 함께 십자가를 날렸다.
{온 – 스파킹 롤}
{온 – 청염일식(靑炎一煶)}
응수하듯 푸른 화염의 검기가 피어올랐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눈앞의 상대에게만 집중하자. 검을 흩날리며 윤견은 계속해서 자신을 잡았다. 그 때처럼.
처음으로 죽였던 그 때처럼. 간단하게, 복잡한 것들을 버려두고 눈앞의 것만 바라봤듯이. 윤견의 눈도 평소처럼, 기효의 눈처럼 무채색으로 변했다.
카아앙-!
구슬픈 마찰음과 함께 청염이 충격파에 의해 퍼지며 이곳저곳에 불씨를 떨어트렸다.
“사장님!”
문 밖에서 들린 제 3자의 목소리. 윤견의 무채색 눈도 바로 목소리를 따라가자 예전 자동차 유리를 망치로 가격했던 불량아가 서 있었다.
적을 인지하고는 망설임 없이 흑도가 움직였다.
“커헉!”
불량아는 그대로 목을 부여잡고는 스르르 피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무채색의 눈이 한 소년을 담았다. 피를 흘리고 있지만 목이 아닌 온 몸에 생긴 상처에서 흘리고 있었다.
“하아...하아...”
“너는 아직 어리다. 하고 싶은 게 아직 많을 텐데 이곳에서 죽을 것이냐?”
당연히 싫다.
-이제 막 오두막에서 벗어났는데...
“너의 능력은 충분히 쓸 모가 있다. 투항해라.”
“입 닫아!!”
나무에 대추 크기의 열매가 맺더니 라호가 휘두르자 열매들은 정훈에게 날아갔다. 그러나 정훈은 파리 쫓듯이 손을 휘적거리자 차크람이 단칼에 열매들을 베었다.
열매가 베이자 과실이 연기로 변해 피었다.
“같잖군.”
정훈이 손가락을 튕기자 차크람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연기를 날렸다.
“...도망갔군. 하지만.”
정훈은 바닥에 이어진 핏자국들을 쳐다봤다.
-급하군. 움직임이나 능력을 쓰는 걸 보면 훈련은 꽤 했지만 역시 아직 실전 경험이 적어.
상처 부위를 잡으며 힘겹게 뛰어가던 라호의 발이 멈췄다. 만약 여기서 더 걸렀으면 계단을 지나쳤을 것이다.
차마 마지막 양심과 책임이 계단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거친 숨을 조금 씩 진정시키고서 주머니에서 작은 씨앗 하나를 꺼내 그대로 입에 넣어 씹었다.
조금이나마 피가 멎으며 통증이 완화되었다.
“침..침착하자. 아버지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잖아. 후...”
숨을 고르며 침착함을 되찾아서 그런지 정문 쪽에 있는 작은 화단에 눈에 들어왔다. 상처투성이 손으로 흙을 파며 씨앗을 심었다.
‘응? 갑자기 뭔 소리야?’
이종의 여인을 섬겼던 마을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날에 라호가 따로 문하에게 말을 건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사람들...죽였어야 했던 것일까요..?’
라호가 땅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문하는 당시를 회상했다. 다른 이들을 잡아 이종족에게 먹이는 마을사람이 있던 그 상황.
윤견과 문하는 이종족을 상대하는 사이 민혁과 라호는 무기를 들고 달려오는 마을사람들을 상대했었다.
민혁은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라호는 그저 그들의 길을 막기만 할 뿐이었다. 그 덕분에 민혁의 총구는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방해되지 않겠다고 했는데...’
‘라호야 그게 왜 방해야? 너는 충분히 너의 할 일을 한 거야.’
‘하지만...’
‘...내가 아는 사수가 했던 얘기가 있어.’
씨앗을 심자 등 뒤에서 닭살을 돋게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라호는 서둘러 나무로 화단을 짚은 다음 알아 듣기 어려운 언어로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발소리를 향해 다가갔다.
“음?...아하, 위로는 못 보내겠다는 거냐? 기특하군.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쳤던 놈이 한 판단치고는 말이야. 그래서, 두려움은 가셨나?”
정훈의 조소 섞인 질문에 라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아직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상처의 통증에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정훈의 눈은 무섭고 몸이 기억하는 고통은 두렵다. 하지만 그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것이 더 무섭다.
마음이 기억하는 그 고통이 더 두렵다.
“하아앗!!”
라호가 기합과 함께 나무를 들고서 정훈에게 달려들었다. 정훈은 작게 한숨을 쉬고 손가락을 튕기자 차크람이 날아갔다. 라호는 나무의 껍질을 강화하고는 봉술로 차크람을 상대했다.
“호오...근접전도 꽤 하는 걸?”
-지금!
{시드 플래닛}
차크람을 거칠게 내려치고 나무 끝을 정훈에게 겨누자 나무가 순식간에 길어지며 정훈의 복부를 가격했다.
“쿠웁!”
예상치 못한 공격을 허용한 정훈의 이마에 핏줄이 볼록 솟아났다. 허리춤에 있던 군용 나이프를 뽑아들고는 그대로 라호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절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이내 다시 자세를 잡았다.
“..후우.”
현란한 봉술로 나이프를 상대했다. 정훈도 절도 있는 단검술을 보였으나 라호의 봉술을 쉽게 뚫지 못했다. 그러나 바닥에 박혔던 차크람이 뽑히는 순간 전세는 역전됐다.
또 다시 고통이 몸에서 피어났다. 당장이라도 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고 목구멍에서 비명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입술을 깨물면서 버텼다. 나무로 정훈의 머리를 향해 휘두르자 정훈은 가뿐히 몸을 낮추고 발차기를 날렸다.
“크악!!”
라호의 입에 토사물이 뱉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라호는 빨리 일어나려 했지만 내장이 뒤집히는 듯한 통증에 수차례 복도에 얼굴을 박았다.
정훈은 금세 화가 식었는지 핏줄은 금방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라호에게 다가가 가슴에 발을 올렸다.
“끄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라호. 그런 라호를 내려다보는 정훈에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사장도 문제야. 진즉에 너 같은 애들로만 받아드렸으면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아~애들만 받을 거면 능력이라도 보고 뽑든가, 이게 뭐야, 이게. 쯧. 피곤하다, 끝내자.”
나이프가 거꾸로 쥐어지며 날 끝이 라호를 가리켰다. 정훈이 그대로 내려찍으려던 찰나의 시간, 라호의 부자연스러운 팔 방향이 보였다. 그대로 시선을 보내니 옆으로 쭉 뻗은 팔과 똑같이 쭉 늘어난 나무가 있었다.
나무의 끝은 1층 화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이 애새끼가!”
{시드 플래닛 – 익스플로 플라워}
작은 화단에서 꽃 한 송이가 피어나더니 봉우리에서 씨앗을 발사했다. 정훈도 단검을 찍으려했지만 그보다 먼저 씨앗이 빠르게 움직였다.
퍼어엉!!
씨앗은 그대로 폭발을 일으키며 정훈을 날렸다.
거친 폭발음이 가시자 거칠지만 연약한 숨소리가 복도에 가득했다. 앓는 소리와 함께 라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장은 여전히 춤추는 것만 같고 피는 역류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심각한 자가 있었다.
“하아..하아...입장이 반대가 됐군. 죽일 건가.”
상처투성이로 바닥에 누운 채 가쁜 숨을 쉬던 정훈이 힘없이 웃었다. 그러나 라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멍청한 짓하지 말고 죽여라. 괜한 동정은 은혜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복수로도 돌아오는 법이다.”
정훈은 이미 운명을 직감한 듯 건조한 표정이었지만 라호의 눈을 슬픔이 물들었다.
“...소중한 사람이 해줬던 말이 있어요.
적을 죽이는 것과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것, 이렇게 두 개로 사람들은 움직인다고. 저는 적을 죽이기 위해 온 게 아니에요. 소중한 사람들을, 좋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온 거예요. 앞으로도
저는 지키는 존재로 있을 겁니다. 그게..”
그 때의 문하처럼 라호도 눈을 감았다 천천히 떴다.
“그게 저의 긍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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