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같이 멸망한 세계 속 유일한 파이브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새글

지앗호
작품등록일 :
2023.05.22 17:05
최근연재일 :
2024.06.15 14:10
연재수 :
229 회
조회수 :
47,573
추천수 :
334
글자수 :
1,113,510

작성
24.05.03 20:25
조회
20
추천
1
글자
10쪽

좋은 사람

DUMMY

얇은 비늘 막을 뚫고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라호는 조금씩 자라나는 새싹을 보며 어제 밤 봤던 윤견의 눈을 떠올렸다.


-...


화가 난 것도, 기특해 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단조로운 감정이 아닌 복잡한 것들이 섞인 듯한 눈빛이었다.


“후우~.”

-내가 뭔가 실수했나?


“또 뭐 키워?”

“우왁!”


파이브가 하품하며 말을 걸자 화들짝 놀란 라호가 비명을 질렀다.


“야! 놀랐잖아!”

“미..미안.”


파이브가 물병을 꺼내 목을 축이고는 의기소침해 있는 라호를 슥 쳐다봤다.


“이번에는 또 왜?”

"아하하...그게..."


뜸을 드리며 고민하던 라호는 어서 말하라는 파이브의 무언의 압박에 결국 어제 일을 말했다.


당시에 파이브도 비닐하우스 안에서 봤었지만 보이는 건 윤견의 등 뿐이라 자세한 것들은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흐음...그래?"


파이브도 어제의 윤견처럼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차 안에서 아직 자고 있는 윤견의 얼굴을 훑었다.


"뭐...내가 닥터랑 그나마 오래 붙어 있던 건 맞는데...아닌가? 아니, 그래도 기억은 있으니깐 맞겠지?"

"그..그치."

-꽤 예매한 기준이지만.


그래도 파이브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아무튼 내가 아는 닥터는 딱히 너를 탓하거나 불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거야. 있었으면 그 때 바로 말했을 걸?"

"그..그런가?"

"어. 이미 닥터는 다 까먹었을걸."


파이브가 피식 웃자 조금은 안심이 된 라호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정말 파이브의 말대로 윤견은 평소와 똑같았고 똑같이 대해줬다.


그렇게 평소처럼 아침식사를 끝내고서 라호는 재배를, 민혁은 잠시 볼일을 보려 가고 윤견은 홀로 지도책을 보고 있었다. 그런 윤견을 향해 파이브가 다가와 발로 툭 쳤다.


"? 왜?"

"뭔데?"

"? 뭐가?"



의문만 오가는 대화에 파이브가 작게 인상을 썼다.


"아니, 어제 뭐 라호 노려봤다며!"

"뭘 노려봐! 안 노려봤어."


자신도 모르게 커진 목소리에 두사람 모두 라호를 살폈다. 다행히 라호는 아직 저 멀리서 열매를 따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쉰 윤견이 지도책을 덮고 말했다.


"그냥...맞나해서..."

"뭔 소리야? 뭔가 맞아?"


윤견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주저하자 파이브가 다시 발로 찼다.


"...도와주는 게 맞는 판단인가 해서 망설였다고."


잘 못을 말하는 아이처럼 윤견이 말했다.


놈은 괴물이다. 사람을 죽이는 괴물. 상처도 어쩌면 인간들과 싸우다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아니라도 앞으로 놈이 사람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런 괴물을 굳이 도와야 하는 의문에 윤견은 라호의 팔을 잡았었다.


"그런데 손을 놓아줬잖아."


파이브의 말대로 윤견은 자의로 라호의 팔을 놓았다.


"그랬지. 예전이었으면 분명 계속 잡고 있었을 텐데..."

"그치 옛날의 닥터였으면 욕도 했겠지?"

"그...그정도 까지는 아니야."

-...아닌가?


분명 예전이었으면 라호의 행동에 답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는 그런 기분은 없었다. 오히려 라호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인간과 이종족의 사이에 있는 라호를.


그리고 라호의 의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하게 라호를 이해하는 건 또 아니었다.


“에휴~.”


파이브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뭔데? 그 한숨?”

“남정네 둘이 아주 답답하다, 답답해. 그냥 서로 대화하지, 왜 나 가지고 이럴까~.”

“네가 물어봤잖아! 됐어, 다 준비됐냐?”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려 말하지 민혁과 라호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윤견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자동차로 향했다. 파이브는 그런 윤견의 등을 보고 다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들은 해가 저물기 시작 할 때까지 이동하다 ‘상주소방서’에 멈춰 섰다.


“아이고...바퀴에 진흙 다 꼈네.”


가던 중 무너진 길 때문에 잠시 밭을 밟은 적이 있었다. 민혁이 작게 탄식하고는 능숙하게 붙은 진흙을 떼기 시작했다. 그 틈에 윤견과 라호는 주변을 살피기로 했다.


“왼쪽으로 가. 무슨 일 있으면 부르고.”

“네.”


나눠서 둘러보던 중 라호의 눈에 낯선 흔적을 찾았다. 이제는 능숙하게 발소리를 죽인 라호가 천천히 흔적을 살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발자국으로 봐선...

“거기까진 모르겠다. 그래도 짐승의 것은 아니니..”

“키이이...”


낯선 소리에 라호는 바로 입을 다물고 나무를 치켜세우며 소리가 난 쪽을 경계했다. 보이는 건 울창한 나무들뿐이었지만 조심히 다가가니 낯선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리고 다섯 자국 나아갔을 때 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고..고블린!?”


고목에 기대며 피를 흘리고 있는 고블린과 눈이 마주쳤다.


나무의 줄기 꿈틀 움직이며 적의를 보이자 고블린은 고작 비명과 함께 눈을 지끈 감은 채 가녀린 두 팔로 자신을 막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슬며시 눈을 뜨자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인간만 보였다.


“..하아. 다들 왜 이리 다치는 거야.”


라호는 나무를 거두더니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씨앗 하나를 꺼내려던 찰나.


“키에에에!!!”


바닥에 숨기고 있던 조약돌로 깎아 만든 단검을 뽑아 든 고블린이 라호를 향해 최후의 발악을 내보였다. 다급한 라호의 눈은 점점 커지고 주머니에서 급히 뽑아 든 손에서는 열매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라호가 나무에 힘을 부여하는 것보다 빠르게 단검이 라호를 향해 다가갔다.


“아..”


그러나 단검보다 빠르게 라호가 입을 바로 떼자마자 흑도가 날아와 고블린에 박혔다.

라호를 노리던 고블린은 그대로 흑도와 함께 나무에 박혔다.


"괜찮냐?"


흑도의 주인이 라호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역시 뽀얀 피부에 붉게 물든 피와 상처였다.


-살짝 닿았었나?


그 외에는 아무 상처도 없으니 손을 내밀어 넘어진 라호를 일으켰다.


"..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뭔 인사냐. 것보다 이번에도..."


윤견의 시선이 바닥에 널린 씨앗들을 훑었다. 무언의 시선을 해석한 라호도 쭈뼛 윤견의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방해..됐을 까요?"

"...아니."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 때 같았다. 라호는 급히 바닥에 떨어진 열매를 주우며 떠들었다.


"다..다쳐보여서 잠깐 방심했어요."

"큰일 날 뻔 했네."

"그러게요. 그저 치료하려고 했을 뿐인데."


라호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세계야. 언제든지 칼빵...공격 받을 수 있는 개 같은 세계."


언어를 순화하려 했지만 막바지에 실패했다. 그리고 순간 윤견이 뇌리에 파이브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직 다 못 돌았을 텐데 잠깐 걷자, 라호야."


뜻 밖의 제안에 라호도 당황한 눈치였으나 이내 무언가 받아들이기라도 한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많이 답답하죠?"


조용히 밤길을 걷자 라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윤견은 차마 '응'이라고 대답하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그래도 내심 대답을 느낀 라호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도 저는 하나라도 많은 생명을 살리고 싶어요."

"그게 설령 악한 생명이라도 말이냐?"


윤견이 그간 품었던 의문을 말하자 라호의 말문이 막혔다. 어려운 질문을 마주하다기 보단 곤란한 질문을 맞이한 듯한 침묵이었다.


"네가 하는 건 분명 착하고 옳은 일이야. 하지만 이런 세계에는 옳지 않다고 생각해. 네가 구한 사람, 아니 생명이 나중에 사람을 해칠 수도 있고."

"...물론 형의 말이 맞아요. 제가 구한 생명이 나중에 뭔 짓을 할 지 몰라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외면 할 수 없었어요....예전의 저를 보는 기분이었거든요.“


윤견은 그제야 라호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통을 아는 아이, 슬픔을 아는 아이, 그러나 화를 내지 못했던 아이. 라호는 그런 아이였다. 머리가 꽃밭인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


그리고.


이런 세계에 흔치 않은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라호는 죄 지은 사람마냥 윤견을 차마 보지 못하고 자신의 손만 바라보며 말했다. 윤견은 그런 라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도 많이 지쳤나봐. 이 사람은 믿어도 되는지, 잠을 푹 자도 되는지. 사람 한 명 만나면 이런 생각들로 가득했거든. 그래서 많이 예민했었어.”

“형은 저희 말고 착한 사람을 만난 적 없어요?”

“없진 않지. 그런데 한결 같지는 않더라. 뭐, 어느 누구도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세계니깐. 이제는 그러려니 해.”


윤견이 쓴 미소를 지었다.


“반대의 경우는 없었어요? 나빴다가 착해진..”

“없어. 단언컨대 없었어.”


미소는 금방 사라지며 단호히 말했다.


“...그럼 앞으로 저는 어떻게 할 가요?”


한참 눈치를 보던 라호가 조심히 물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너처럼 좋은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어야지, 음과 양이 맞지.”


라호의 얼굴빛이 전에 비해 그나마 밝아지며 미소를 지었다.


“최대한 피해 안 가는 선에서 할게요.”

“오냐.”


사람은 변하는 법이다. 정주의 말처럼 윤견이 변했듯이. 하지만 윤견은 라호 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품었다.


보기 힘든 좋은 사람이니.


예전의 윤견이었으면 지친 상태의 윤견이었으면 상상도 못할 소망이었다.


"슬슬 돌아가자."


윤견이 살포시 라호의 등을 밀며 말하자 라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밤을 지나 다시 움직인 일행들은 상주시의 도심에 도착했다. 그간 보인 밭과 나무는 사라지며 시멘트 건물들이 줄을 이어 모습을 보였다.


여기까지는 별반 다름없는 동네였지만 점점 중심지로 가자, 하나 둘 의문투성인 것들이 보이고는 이제는 차를 세우는 지경까지 도달했다.


"...와우..."


민혁이 감탄하고.


"딴 세상에 온 것 같아요."


라호가 감탄하고.


"..."


파이브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여긴 또 왜 이 모양이야?"


윤견이 탄식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개같이 멸망한 세계 속 유일한 파이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에 관해 23.11.06 141 0 -
229 흑백 도시 - 2 NEW 19시간 전 3 0 11쪽
228 흑백 도시 24.06.12 8 0 11쪽
227 검은 상자 - 3 24.06.10 11 0 11쪽
226 검은 상자 - 2 24.06.09 11 0 11쪽
225 검은 상자 24.06.07 15 0 11쪽
224 악몽 - 2 24.06.05 10 0 11쪽
223 악몽 24.06.03 12 0 11쪽
222 새하얀 운동장 24.06.01 13 0 11쪽
221 탈영병 24.05.30 14 0 11쪽
220 비 오는 밤 24.05.28 12 0 11쪽
219 궁상 24.05.26 10 0 9쪽
218 처형자 - 2 24.05.25 15 0 11쪽
217 처형자 24.05.23 13 0 11쪽
216 파이브의 각오 24.05.21 14 0 11쪽
215 어른 없는 밤 24.05.19 14 0 11쪽
214 녹색 도시 - 7 24.05.18 11 0 11쪽
213 녹색 도시 - 6 24.05.16 13 0 11쪽
212 평범한 존재 24.05.14 16 0 11쪽
211 녹색 도시 - 5 24.05.12 15 0 11쪽
210 녹색 도시 - 4 24.05.10 18 0 11쪽
209 녹색 도시 - 3 24.05.08 13 0 10쪽
208 녹색 도시 - 2 24.05.06 20 1 11쪽
207 녹색 도시 24.05.05 16 1 11쪽
» 좋은 사람 24.05.03 21 1 10쪽
205 문제아 - 2 24.05.01 21 1 11쪽
204 불량아 - 7 24.04.29 19 0 11쪽
203 무채색과 긍지 24.04.28 25 0 11쪽
202 경찰청 - 3 24.04.27 19 0 11쪽
201 경찰청 - 2 24.04.24 23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