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도시

사방으로 보이는 청록색과 녹색 빛 정경. 분명 밭에서 벗어나 도심으로 들어왔음에도 보이는 건 파릇파릇한 색들뿐이었다.
"...아마존에 간다면 이런 느낌일까?"
윤견은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둘러보며 말했다.
건물 외벽을 타고 자라난 울창한 나뭇잎과 줄기, 그리고 그 틈을 완벽하게 가리고 있는 이끼들까지. 정말 거대한 나무 한 구르가 있는 듯한 모습의 건물들이 줄을 이었다.
가로등이나 버스 정류장도 어림없이 식물들이 둘러쌓여 있었다.
"...혹여나 물어보는 건데, 너희 종족이 한 거 아니지?"
파이브가 슈퍼 밖에 피어난 거대한 꽃봉오리를 보며 말했다.
"아냐, 나도 처음 보는 식물들뿐이야."
"그럼 식물 전문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음...어떤 걸 양분으로 삼길래 저렇게 크게 성장하는 걸까...정도?"
"됐어, 어차피 길 막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시하고 출발해."
윤견이 파릇파릇 식물들을 보며 인상을 구긴 채 손을 휘저었다. 멈췄던 바퀴가 앞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울창한 식물들 사이로 이색적인 색을 가진 자동차가 나아갔다. 라호는 흥미롭다는 듯이 식물들을 관찰했지만 윤견은 건물들을 집어 삼킨 식물들을 보며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그러던 중 바퀴가 도로 위까지 뻗은 뿌리의 일부를 밟았다.
덜컹.
차가 살짝 덜컹거리던 순간.
건물을 감쌌던 줄기와 꽃봉오리가 요동치더니 꽃봉오리가 만개하며 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뭐..뭐야, 씨방?!"
마치 거대한 입처럼 쩍 벌린 채 다가오는 꽃을 보며 기겁한 민혁이 거칠게 핸들을 꺾었다. 가까스로 꽃은 허공을 낚아채고는 다시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새침하게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타이어에 귀 찢어질 마찰음이 울리더니 이내 멈췄다.
방금까지 풍경을 감탄하던 라호도 방금 상황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만 깜빡깜빡 거렸다.
“방금 뭐야?! 나만 봤어! 무슨 마*오 게임에서 나오는 괴물도 아니고!! 우리 먹으려 했던 거지?? 어?!”
반면 파이브는 흥분을 떨치지 못하고 와다다 뱉었다.
그러나 민혁과 윤견도 대답해 줄 상황이 아니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말도 못한다는 것을 두 사람은 지금 깨달았다.
“자...잠깐. 씹. 잠깐 멈춰봐.”
“이미 멈췄어요, 형님.”
윤견은 작게 탄식하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평정심을 되찾으려 했다.
“저...저 미친놈은 갑자기 왜 공격한 거야?”
“...움직이니깐?”
조금 진정이 된 파이브 대답했다.
“아니, 그랬으면 진즉에 공격했었어야지. 영역, 우리가 놈의 영역에 침범했나? 아니 그러면 왜 지금은 가만히 있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지만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아까와 같은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쉽사리 풀리지 않자 평정심이 흔들리며 꾸깃 인상을 쓰자 뒤에서 라호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식..식충 식물 같은 경우에는 향 같은 미끼로 유인해서 함정에 빠트려요.”
“향?...다른 건 또 없어?”
“어...아님 뭔가를 건드렸다거나?”
라호가 툭 내뱉자 민혁과 윤견의 뇌리에 차가 덜컹 움직였던 것을 떠올렸다. 민혁이 창밖으로 머리를 내 빼며 바닥을 훑었다.
“어! 저거다!”
그리고 아스팔트 위로 조그맣게 모습을 보인 식물 뿌리가 보였다. 파이브와 라호도 뒤를 돌아보며 민혁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윤견도 차에서 조심히 내려 뿌리를 발견했다.
“저거 맞네, 저거.”
“아휴~. 이제 저거 조심하면서 운전해야겠네요. 근데 저걸 본 기억이 없는 거 같은데...”
전과 달리 한껏 조심히 굴러가는 자동차와 주변을 감시하는 여러 눈들.
그런 도중에도 기괴한 식물들과 열매들은 점차 늘어만 갔다. 게다가 조금씩 움직이는 뿌리까지 보이자 일행들도 슬슬 무언가 잘 못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물러났어야 했나?
이제는 건물들을 가뿐히 넘어서는 식은땀이 절로 흐르는 식물들과 태양을 가리는 거대한 잎사귀들까지 등장하니 분위기는 더욱 서늘해졌다.
쿵!
그런 도중에 들리는 거대한 울림과 소리에 민혁은 다시 브레이크를 밟았다. 소리의 정체는 곧바로 알아 낼 수 있었다.
“...미친, 열매가 떨어진 소리야?”
윤견이 저 멀리 떨어져있는 거대한 열매를 보며 중얼거렸다. 언뜻 보면 사과처럼 보이지만 크기나 작은 흠도 생기지 않은 강도는 전혀 사과와 달랐다.
“이제는 위도 경계해야 하겠네요.”
“아직 갈 길은 멀지?”
민혁이 지도책을 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길은?”
“차라리 그 쪽이 더 짧죠.”
“돌아가자. 위협이 너무 많아. 거의 시 전체가 적이라 봐도 무방해.”
윤견의 결정에 아무도 반대하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일행들도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심정은 똑같으니.
그렇게 민혁이 조심이 핸들을 돌리던 순간 삐삐의 귀가 쫑긋 움직이더니 옆을 바라봤다.
“삐!”
삐삐의 소리에 시선이 모이자 녹 빛 풍경 속에 움직이는 생명채가 보였다.
“사..람?”
“고블린도 있어. 저건...어인?”
“그런데 다들 머리 위에 뭔가..달고 있어요.”
라호의 말대로 저들의 머리 위에는 길고 얇은 줄기와 그 끝에는 잎사귀가 달려 있었다.
탁..탁..탁.탁.타다다다.
절뚝이던 다리가 점점 가속도가 붙더니 이제는 달리는 시작했다. 그것도 일행들이 있는 자동차를 향해.
민혁이 반사적으로 엑셀을 밟으려하자 윤견이 민혁을 잡으며 말렸다.
“그러다 또 딴 놈들 자극할 수 있어. 기다려.”
조수석 문이 열리며 윤견이 흑도와 함께 나왔다. 그리고 놈들에게 다가갔다.
“..오 씨!”
과정에 뿌리를 건드릴 뻔 했지만 다행히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벌써 코앞까지 접근한 놈들을 향해 검은 궤적을 그렸다.
단칼에 베인 자들이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붉은 피와 함께.
“피?”
-그간 봤던 기생 식물에 당한 생물체를 죽이면 피는 나오지 않았어. 나왔더라도 이렇게 신선하지도 않았고. 역시 빨리 벗어나야...
뒤를 돌아본 윤견의 눈에 보인 건 자신을 다급히 보고 있는 파이브와 어딘가를 보고 기겁하고 있는 민혁과 라호였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는 차를 향해 오고 있는 수많은 꽃들이었다. 하늘을 가리는 형형색색의 꽃들.
한 발짝 물러나서 보면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두 발짝 앞에서 보고 있는 윤견은 아니었다.
“...달려!! 내일까지 터미널에서 합류할 게!”
틈새의 시간에 판단을 내린 윤견이 말하자마자 민혁이 바로 엑셀을 밟았다. 자동차는 그대로 다가오는 꽃들을 피해 달아났다.
-뭐지? 뿌리를 밟지는 않았는데?
그러나 윤견의 눈은 금방 시체들로 향하며 정답을 확인했다. 하지만 답을 알아냈다는 안도도 느낄 틈 없이 아직도 움직이는 꽃들을 마주했다.
아가리처럼 쫙 벌린 꽃잎들 속에 촉수처럼 움직이는 수술들이 윤견을 덮쳤다.
{온 – 착화(着火)}
파랗게 달아오른 흑도가 가볍게 움직이자 꽃들이 후두두 떨어졌다.
-얘들은?
그러나 보이는 건 벽처럼 앞을 막고 있는 줄기들과 비처럼 내리는 꽃잎들뿐이었다.
“..쯧. 내가 누굴 걱정할 상황은 아닌 건가.”
빈틈없이 둘러쌓고 있는 기괴한 식물이 공격을 퍼부었다. 운견도 다시 궤적을 그리며 반격에 나섰다. 타다만 식물들이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 때마다 다른 식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다 불태워버리고 싶은데 그러다가 빠져나가지 못하면 연기에 질식해 죽을 거야.
그렇게 식물들을 계속해서 베어 가르던 중 새로운 식물이 자라나는 그 짧은 사이에 어느 건물의 입구가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 쪽을 향해 흑도를 휘두르며 몸을 던졌다.
빠져나간 윤견을 잡기 위해 식물들의 손길이 따라갔지만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일어선 윤견이 온 힘을 다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윤견의 두 발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얼은 것처럼 식물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허어..허어..”
가쁜 숨을 쉬며 밖을 보자 멈춰있던 식물들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윤견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건물 내부를 살피 수 있었다.
건물 안에도 식물의 줄기나 뿌리가 벽이나 천장에 붙어 있었지만 확실히 밖보다는 덜 했다. 그래도 천천히, 조심히 발을 움직여 건물을 돌아다녔다.
툭.
천장에 물이 세는 지 물방울들이 바닥을 두드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윤견은 빈 의자에 앉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버스터미널의 위치를 떠올렸다.
“길은 기억하는데...문제는 어떻게 가냐는 건데.”
탁.
그 때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에 반사적으로 흑도를 뽑아들었다. 물이 떨어지며 나는 소리와 명백히 다른 소리.
물방울 보다 더 무겁고 넓은 면적이 땅에 닿는 소리다. 그리고 그 소리는 윤견이 지겹도록 경계해서 잘 알고 있었다.
“...누구냐. 민혁이냐?”
발소리와 식물로 뒤덮인 상황으로 보아 그나마 가능성 있는 민혁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조금씩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바로 모습을 드러내며 흑도를 겨누자 검 끝에는 이종족이 서 있었다.
눈앞에 보인 이계의 종족에 흑도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검 날이 놈의 코앞에서 멈췄다.
윤견 허리 정도의 키에 가녀린 몸. 체형은 고블린과 비슷하지만 얼굴에는 입과 코는 없이 겁먹은 눈만 달린 윤견도 처음 보는 종족이었다.
“...하아. 가라.”
어째서 인지 복잡해진 머리에 윤견이 인상을 쓰며 말하며 검을 거두었다.
그러나 당연히 윤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이종족은 올렸던 손을 천천히 내리고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윤견을 바라봤다.
“짜식아, 가라고. 훠이~. 훠~이.”
손을 휘저으며 쫓아내려 해도 놈은 멍하니 윤견을 쳐다봤다. 그리고 오히려 윤견에게 천천히 다가가 바지를 조심히 꼬집고는 당겼다.
“? 뭔데? 따라오라고?”
역시 대답은 없었지만 계속해서 바지를 당기자 흑도를 고쳐 잡고는 놈의 손길을 따랐다. 수상쩍은 짓을 보인다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그러나 놈은 한 손으로는 윤견의 바지를 잡고 계속해서 앞 만보며 건물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안내했다.
-지하?
의구심에 잠시 발을 멈추자 놈은 어서 따라오라는 듯이 지하와 윤견을 번갈아 쳐다보며 바지를 당겼다.
“...에이 씨. 모르겠다.”
결국 윤견도 발을 떼고 지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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