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자 - 2

*
하늘은 석양이 들어선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주변에 퍼진 뜨거운 열기와 썰렁한 거리 그리고 과자처럼 무너져있는 건물과 거대한 발자국.
그 중심에 게이트 하나가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그 안에서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거대한 몸집과 대검. 그것이 나오자 게이트는 사라졌다.
“음? 이종족이다!!”
근처에 수색을 하던 헌터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그의 무전을 듣고 몰려온 수 십의 헌터가 게이트에 나온 존재를 둘러쌓았다.
“..뭐야? 하나잖아?”
“게이트 브레이크에서 나온 모양인데...그럼 보스라는 거잖아. 다들 자세 잡..”
차마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바위 덩이가 날아와 머리를 터트렸다. 경종처럼 울린 소리에 모든 헌터들이 각자의 온을 들고 놈에게 달려들었다.
*
두껍고 투박한 손이 대검을 쥐고는 가볍게 휘두르자 풍압과 함께 발아래 잔풀들이 흔들렸다.
그리고 다시 검을 쥐고 이번에는 방금보다 좀 더 강하게 휘두르자 땅을 가르며 거친 참격이 발산했다.
참격은 마녀로 향했으나 오우거가 그 앞을 가로 막고는 양 손에 바위를 움켜진 채로 참격을 내리쳤다.
“으아아라라!!”
참격에 바위와 손은 버티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겨지며 공중에 뿌려졌다.
마녀가 다시 한 번 영창과 함께 광선을 날리고는 오우거에게로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그러나 광선을 진즉에 막고 날아간 대검에 의해 그대로 찍혀 죽었다.
오우거가 다시 한 번 포효를 뱉고는 놈을 향해 달려갔다.
“..가자. 파이브.”
“어?..어.”
방금까지 싸움을 지켜보던 윤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파이브를 잡고 움직였다. 다급히 움직이는 모습은 파이브의 눈에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한편 놈에게 달려가던 오우거는 그대로 발을 날렸으나 놈의 주먹 한방에 몸이 뚫리며 차가운 논밭에 쓰러졌다.
“닥터, 왜 그래?”
“..기억났어.”
“어? 뭘?”
“일단..일단 멀리 가자.”
-씨발..씨발! 이 망할 대가리는 왜 이제야 기억해내는 거야!
7황들에 의해 세계가 서서히 침식당하고 있었지만 아직 헌터 기관들이 활동하고 있던 시기에 접한 뉴스가 있다.
한 명의 거인을 막기 위해 출발한 헌터 연합이 거인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됐다.
당시에는 거인과 함께 동귀어진으로 언론에게 뿌려지며 헌터들의 희생과 투지를 알리는 사건으로 끝났지만 이미 헌터들 사이에서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인은 물론이고 헌터들 모두 사지가 절단 된 채로 있었다. 절대 거인이 만들 수 없는 상흔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범인이 찍힌 자동차 블랙박스를 확보하며 모든 헌터들에게 공문 하나가 내려왔었다.
‘‘처형자’를 보면 절대 싸우지 말고 다른 헌터. 최소 A급으로 이루어진 파티나 길드장과 합류해 토벌하라.’
-그 놈이야. 사진이 흐릿해서 처음에는 몰랐지만 저 공격...확실히 놈이야.
파이브의 손을 잡고 달려가던 윤견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끼어들더니 대검 하나가 윤견의 앞을 가로 막았다.
“...씨발.”
그리고 머지않아 대검의 주인도 대검과 같이 위에서 떨어지며 모습을 보였다.
멀리서 봤을 때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숨 막히는 살기가 가득했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겠다는 단 하나의 본능만이 남아 있는 괴물.
“...파이브, 내가 막고 있는 틈에 둘에게 달려가.”
“시..싫어. 같이..”
“지금 그럴 때 아냐.”
평소였으면 버럭 화를 냈을 윤견의 목소리가 차갑게 떨렸다. 파이브도 그 쯤 돼서야 알 수 있었다.
윤견의 모든 신경이 적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지금 자신과 말씨름 할 여유도 없다는 것을.
“...알았어, 가서 오빠들 불러 올게.”
“지금!”
윤견은 신호와 함께 먼저 흑도를 뽑고서 놈에게 돌진했다. 놈도 바로 대검을 움직이며 흑도를 막았다.
“크윽!”
고작 검을 부딪친 것 뿐인데도 반대쪽에서 전해지는 힘에 윤견이 이를 까득 물었다. 윤견이 막고 있는 틈에 파이브가 온 힘을 다해 달려갔다. 다행히 처형자는 파이브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처형자가 검을 살짝 튕기자 윤견이 그대로 밀려났다.
-역시 거인을 벨만한 힘이다. !
잠시 밀려난 사이 처형자가 검을 휘두르자 거친 궤적이 윤견을 덮쳤다. 날렵하게 옆으로 몸을 던져 검을 피하고 빈틈에 흑도를 밀었다.
그러나 곧바로 처형자의 두꺼운 주먹이 움직였다.
고작 주먹 하나지만 윤견의 본능이 경고음을 울렸다.
발과 손을 급히 멈추고 허리를 꺾자 주먹이 윤견의 앞을 쓸고 지나갔다. 주먹을 피하고 온 몸을 돌려 흑도로 큰 원을 그렸다.
검 끝이 처형자의 옆구리를 베며 원에 피를 뿌렸다.
-좀 단단하긴 하지만 공격이 못 먹힐 정도는 아냐.
상처를 확인한 윤견은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두 손으로 검을 잡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처형자도 자신의 상처를 손으로 살짝 핥고는 다시 윤견을 향해 대검을 치켜세웠다.
두 검 사이로 짧은 정적이 흘렀고 대검이 먼저 움직였다. 나름 거리가 있었음에도 순식간에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온 대검은 깃털처럼 가볍게 올라가 천둥처럼 낙하했다.
-막으면 죽는다!
낙하하는 검을 한 뼘 차이로 피하자 대검을 따라온 거친 풍압이 윤견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윤견의 동작과 검은 가볍게 거슬러 올라갔다.
흑도가 위로 올라서며 놈의 몸에 상처를 하나 더 만들었다. 그러나 처형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검을 그대로 옆으로 움직여 윤견을 쳤다.
윤견은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논밭으로 날아갔다.
“크윽!”
논밭을 한참 구른 후 겨우 멈춘 윤견의 위로 처형자가 뛰어올라 대검을 내리쳤다. 가까스로 몸을 굴러 피하자 폭탄이 터진 것처럼 거대한 진동과 함께 논이 솟구쳤다.
솟아오른 논을 뚫고서 대검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저 녀석...
진흙 범벅인 윤견이 다시 뒤로 물러서며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저 녀석 왜 소리가 안 나지?”
처형자가 움직일 때마다 거대한 덩치와 달리 매우 고요했다. 대검을 휘두를 때도 땅을 박차고 뛸 때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흑도와 부딪쳤을 때도 논을 내려쳤을 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혼자 음소거를 상태인 것처럼.
소리가 없다는 건 나름 큰 위기다 귀로 들리는 정보가 없다는 것이니 하지만 놈의 덩치로 봤을 때에 눈이 놓칠 일은 없을 것 같다.
역시나 처형자가 윤견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피부로 느끼는 공포와 귀로 들리는 고요한 정적의 괴리감에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서 레버를 잡아당겼다.
{온 – 착화(着火)}
흑도에서 일어난 불로 담배 끝을 살짝 태우고는 자세를 잡자마자 대검이 움직였다. 아까처럼 대검을 흘리고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움직이던 대검을 멈추더니 손을 뻗었다.
-? 뭐..뭐지? 손을 버린다고? 함정인가?
순간 오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도박은 피하자는 생각으로 손아귀를 피했다.
{파쇄}
그러자 멈췄던 대검이 위로 올라서더니 그대로 바닥을 찍었다. 이번에도 진동만 울리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바닥을 가르며 충격파가 발산됐다.
“뭔!?”
고작 대검을 내려치는 것 뿐이지만 그 동작이 한순간이었다. 마치 손가락 하나를 까딱 움직이는 것처럼.
-피하기에는 늦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차마 피하지 못하고 최대한 숨을 들이마시며 흑도를 휘둘렀다. 담배 연기가 순식간에 온 몸을 돌며 푸른 불꽃이 더욱 커졌다.
{온 – 청염일식(靑炎一煶)}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참격을 날렸다. 그러나 호기롭게 날아간 참격은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다. 처형자의 충격파에 그대로 날아간 윤견은 곧바로 눈을 떴다.
동작만큼이나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다. 충격파에 날아가 아주 찰나에 의식을 잃었었다. 흔들리는 정신을 부여잡고 눈동자를 굴리자 자신에게 걸어오는 처형자가 보였다.
“끄으으으!!!”
입과 코에서는 피가 흘러나왔고 몸 이곳저곳에서는 비명소리가 난무했지만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 일어서는 것뿐인데도 두, 세 번 넘어 질 뻔했다.
-시..시간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최대의 힘을 날린 공격은 가뿐히 넘어선 공격이었어.
“젠..장 어디 하나 베일 각오로 피하는 게 정답이었나?”
이미 왼 팔이 덜덜 떨리는 것이 벌써 한계인 모양이고 담배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반면 상대는 상처 두 개 밖에 없다.
누가 봐도 윤견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그러나 처형자는 주변을 살피고는 바닥에서 뭔가를 줍더니 윤견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뻗은 팔이 낚아채자 몇 초까지 입에 물고 있던 담배였다.
“뭐...뭐야?”
그리고는 가만히 자리서 서 있다. 머리에는 망태가 덮어져 있지만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걸 느껴진다.
-..설마 피라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추리지만 지금 상황에서 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담배를 태우고 입에 물자 처형자가 천천히 대검을 올렸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가만히 윤견을 응시했다.
그제야 놈의 의도를 파악한 윤견이 작게 욕을 지껄였다.
“...씨발 새끼가. 가장 강한 걸 꺼내보라는 거냐.”
어차피 도망도 방어도 못하는 상황. 놈의 도전에 윤견은 흑도를 집어넣고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듯한 폼, 지그시 감은 눈.
분노와 짜증, 공포와 불안함은 잠시 내려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검처럼 날카롭게 강철처럼 단단하게.
게다가 그 위로 담배 연기까지 더하니 말로 이룰 수 없는 경지까지 올라갔다.
-..좀 만 더.
눈 앞에 적을 뒀지만 그것마저 잊은 채 힘을 모았다. 주변에서 들렸던 바람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은 정막의 공간.
몸의 감각은 사라지고 오로지 검이 내뿜는 검기만이 느껴졌다. 검기가 서서히 올라서자 감았던 눈을 브릅 뜨고 검을 뽑았다.
정막을 가르며 흑도가 완전한 모습으로 발도를....
"너희는 여깄어. 나 혼.."
"안 돼!!"
흑도를 챙기고 아까처럼 홀로 나가려던 윤견을 향해 파이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런 소리에 일행들은 멍하니 파이브를 쳐다봤다. 방금까지 졸린 눈을 하던 파이브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왜..왜 그래 누나? 아파?"
라호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지만 파이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마치 겁먹은 아이처럼 그저 고개만 떨구고 떨고 있었다.
민혁도 파이브의 상태에 물으려던 순간 윤견이 천천히 파이브에게로 향했다.
"파이브...너. 머리색이..."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