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영병

익숙한 벨 소리. 대한민국 성인 남자라면 몸이 기억하는 소리가 강후의 귀에 들렸다. 그럼에도 강후는 이 소리가 환청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미 이 소리는 사라진지 오래다. 이 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동기들의 투정도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오르는 전역일도 이제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코를 간지럽히는 이 맛있는 냄새는 거짓이 아니다.
강후의 감겼던 눈이 부릅 떠올랐다.
“으엑!”
흰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소녀가 놀래며 인상을 찌푸렸다.
“앗! 죄송합니다. 아침 준비하고 계셨군요.”
“네? 아..네, 뭐.”
파이브는 대충 대답하고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오, 일어나셨어요?”
자신에게 차를 대접한 아이다. 어제도 그렇고 왜 고글을 계속 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착한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제 마신 차 또 안 해주려나? 훈련소에서 마신 탄산 급이었는데.
몸이 묶여 가만히 있는 강후를 제외하고 일행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어? 뭐야? 일어났어요?”
한참 그릇을 씻어 온 윤견이 강후를 발견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나참..일어났으면 일어났다고 말하시지.”
들고 온 그릇을 라호에게 부탁하고 강후의 결박을 풀었다. 하지만 강후는 자세만 편하게 바꿀 뿐 가만히 제자리에 있었다.
“? 왜 그러고 있어요?”
“아하하. 제가 이러고 있는 편이 더 마음 편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는 강후의 태도에 윤견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강후는 제자리에 앉아 아까처럼 움직이는 일행들을 다시 관찰했다.
저들은 그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지만 딱딱 필요한 동작만을 보였다. 그 모습에 마치 훈련이 잘 된 병사들로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도 요리가 끝났는지 척척 준비 된 그릇들 안으로 국자가 절도 있게 음식을 옮겼다.
절도 있는 모습이여서 그런지 침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
그릇 하나가 새롭게 나타나 음식을 채웠다. 민혁이 방긋 웃으며 손짓으로 강후를 불렀다. 강후는 아직 체면이 있는지 선뜻 가지 않았으나 계속된 권유에 반가운 발걸음을 보였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하, 아직도 군대 말투가 좀 있으시네요.”
민혁이 한 마디 내뱉는 사이 벌써 숟가락을 여섯 번이나 움직인 강후가 급히 음식을 삼켰다.
“며칠...몇 주 전까지는 그래도 군인으로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말 편히 하십시오. 얻어먹는 주제인데.”
“그런데 탈영병이라고 하지 않았어? 언제 탈영한 거야?”
“...”
강후의 시선이 그릇에 향하며 말하기를 주저했지만 이번 또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서 그런지 입을 열었다.
“처음...세종특별자치시에 한 번 그리고...”
강후는 말을 잇지 못하고 힘없이 웃어 넘겼다.
“그럼 두 번 도망...”
파이브가 말하다 아차 싶어 다급히 멈췄다. 하지만 강후는 다시 쓴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어색해진 분위기에 민혁과 파이브가 애쓰며 다행히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역시 도개면까지 가는 게 목표입니다.”
“고향이신가 봐요.”
“아뇨, 고향은 아니고 외할머니 댁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족들이 피난 간 곳이기도 하죠...저 혹시 한 그릇 더..가능할지..?”
윤견이 흔쾌히 그릇을 받아 국자를 움직이는 동안 강후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그곳으로 가는 이유를 물어도 될까?”
“솔직히 처음에는 제 밥그릇 지키기도 벅차서 무사하기만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에 있던 무리가 이종족 한 마리에게 공격 받아 무너졌습니다. 단, 한 마리에 말입니다.”
강후는 쓴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지금껏 보지 못한 허탈하고 공허한 눈이었다.
수많은 풍파를 희생과 필사의 힘으로 막아냈지만 고작 한 명의 생명에 무너져내리는 것을 강호는 두 번이나 눈앞에서 목격했다.
생명이 무참히 살육되는 현장, 죽음을 직감한 비통한 비명소리, 어떠한 발버둥도 가뿐히 무시하는 압도적인 존재.
강후의 총구가 또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또 다시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들린 그 때의 소리들로부터 도망치며 미친 듯이 달렸다.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한 다짐은 이미 너덜너덜한 상태로 총과 함께 땅바닥에 내팽겨 쳐있다.
그렇게 강후는 이리저리 목적 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우체국에 잠들 던 그 날. 배송되지 못한 한 편의 편지를 발견한 그 순간 강후는 잊고 있는 소망이 하나 떠올렸다.
[엄마 나 이제 병장 됐어 ㅋㅋ. 요즘 게이트 많이 나오던데 몸 조심하고 전역까지 앞으로...]
다음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는 군복도 총도 없지만 분명한 건 전역일은 이미 지난지 오래라는 것이다.
달그락..달그락.
얻어먹은 대가로 강후가 자처해 설거지거리를 들고는 구석에 쭈그려 앉아 그릇들을 씻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한 치 물러서 다른 짐을 챙기고 있었다.
침낭을 돌돌 마르고 트렁크에 실은 윤견에게 열매를 수확한 라호가 슬쩍 다가왔다. 라호는 입을 우물쭈물하자 윤견이 먼저 말했다.
“가는 길 동안이면 상관은 없을 거 같다.”
“네!”
라호의 표정이 한순간에 밝아지며 그대로 강후에게 달려갔다.
“하이고 참, 탈영 했다 하길래 심각한 건지 알았더니 뭐...그 정도 까진 아니었죠?”
이번에는 요리도구를 가지고 온 민혁이 트렁크에 올리며 등장했다.
“전 또 무슨 작전 전 날에 도망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고.”
“저 말이 전부 사실이면 그렇긴 하지.”
“형님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세요?”
민혁의 물음에 윤견은 고개를 돌려 라호와 얘기 중인 강후를 쳐다봤다.
“나도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100%는 없으니깐.”
“감사합니다! 식사까지 주셨는데 차량지원까지!”
설거지가 끝나 손이 시뻘건 강후가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윤견은 손사래 치며 감사 인사를 넣어두고 라호가 만든 식물로 만든 똬리 줄을 건넸다. 차에 타기 위한 일종의 표였다.
강후는 당연하단 듯이 손목을 내밀었다. 윤견이 손목 위에 살포시 올리자 식물들이 알아서 강후의 손목을 결박했다.
“으악! 이게 뭐야!?”
강후도 식겁했지만 시간이 지나 금방 익숙해졌다. 그 후 강후를 뒷좌석에 라호의 옆에 태우며 성당을 빠져나갔다.
“오! 해가 보이네요.”
비는 진즉에 그쳤지만 먹구름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아침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강후는 손목이 묶였지만 전혀 불안한 기색이 없었다. 이미 윤견 일행들을 어떤 사람들인지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그는 간만에 타는 자동차와 움직이는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시간도 길게 이어질 수는 없었다.
“크와아아아-!!”
한참 산 사이를 달리던 중 마치 누군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차의 앞에 이계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우거에 버금가는 덩치와 수인처럼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 그리고 닭과도 비슷한 깃을 가진 괴물이었다.
쿵-!
그리고 차의 뒤로 나무가 쓰러지며 길을 막음과 동시에 또 다른 괴물이 나타났다.
“씹! 내가 앞 쪽을 맡을게, 뒤는 부탁한다!”
흑도를 들고서 차에서 내린 윤견을 향해 나무 한 그루가 날아갔다. 몸을 낮춰 나무를 위로 보내고 앞을 막고 있는 괴물을 향해 달려갔다.
-처음 보는 놈이지만 딱히 뭔가 있어 보이지는 않아. 그냥 오우거에 수인 하나를 합쳐 놓은 모습이야.
“크오악!”
달려오는 윤견을 향해 거대한 손톱을 휘둘렀다.
{온 – 착화(着火)}
레버를 잡고 검을 움직여 푸른 불을 일으킴과 동시에 손톱을 쳐냈다. 거친 파열음과 함께 고통의 비명이 울렸다.
-다른 쪽은?
아주 잠시 생긴 틈에 다른 쪽 상황을 살폈다.
라호의 나무가 놈을 묶는 동안 민혁과 파이브가 열심히 총을 발사했다. 다행히 라호의 나무는 놈의 힘을 억누를 수 있었고 탄환은 놈의 피부를 뚫었다.
확인한 윤견의 시선이 다시 적에게 돌아가려던 찰나 움직이는 강후의 실루엣이 보였다.
“뭔?!”
윤견의 당황한 시선이 다시 강후를 쫓으려 했으나 다시 몰아치는 공격에 자세를 잡고 받아쳤다. 초조한 마음만큼이나 과격해진 검 끝이 손톱을 깨부수며 손을 태웠다.
손을 붕붕 저으며 불을 끄려던 놈을 향해 뛰어 오르며 흑도를 휘둘렀다. 검푸른 궤적이 휜 깃을 휘날리며 붉은 피를 흩뿌렸다.
쿵!
거대한 육체가 바닥에 떨어지며 큰 소리와 함께 흑도가 놈의 목을 향해 낙화했다. 윤견이 바닥에 착지하자 놈의 목이 잘렸다.
그리고 바로 뒤를 돌아보자 생각지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 뭐...뭐야? 무슨 일이야?”
이미 저 쪽 괴물도 총알에 벌집이 됐지만 이상하게 달려가던 강후는 바닥에 쓰러져 있고 라호와 파이브는 그런 강호의 옆을, 민혁은 산 속 어딘가에 총구를 겨누며 경계하고 있었다.
“저 쪽에서 창이 날아왔어요!”
민혁이 여전히 총구를 겨눈 채 대답했다. 라호는 다급히 식물들을 꺼내들며 강호의 상처부위를 덮었다.
“저..저를 구해주시려다가..”
“무슨 상황인지 대략 눈치 챘으니깐, 진정 좀 해. 깊은 상처는 아니지?”
“네..살짝 스친 정도입니다.”
“창은?”
“여기.”
파이브가 가리킨 곳에는 나무를 관통한 찬 한 자루가 있었다.
-놈들이 던지기에는 창이 작아. 다른 놈이다.
“민혁이는 나와 함께 계속 경계하고 너희 둘은 강후를 차에 태워! 얼른!”
윤견의 지휘 하에 라호와 파이브가 강호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 그 뒤로 윤견과 민혁이 슬금슬금 차에 올라타자마자 차를 출발했다.
차는 그대로 시체를 넘어 지역을 떠났다. 자동차는 금방 낙동강 옆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아직 해가 지기에는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강후의 상태가 안 좋아졌기에 정차했다.
“창에 독이 있었나 봐요!”
“! 민혁아, 저기 중학교. 중학교로 가자!”
자동차는 낙동중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멈췄다.
윤견이 강호를 둘러메고 라호와 함께 보건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 뒤를 파이브가 차에 있던 응급상자를 들고 쫓아왔고 그 뒤를 자동차를 안전하게 주차한 민혁이 따라갔다.
강후를 보건실 침대에 눕히고 옷소매를 찢었다. 라호가 묶은 식물들은 마치 오염된 것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다. 라호가 식물을 뜯자 상처 부위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상처를 본 라호의 표정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왜? 심각한 거야?”
“...저희...가을뿌리 종족이 쓰는 독이랑 가..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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