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상자 - 2

그간 삐삐와 돌아다니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뿔의 모습에 적잖게 당황했다.
그야 그간 삐삐는 저 뿔로 자신의 몸을 긁거나 밥 달라고 윤견을 찌르는 용도로 밖에 본 적이 없었기에.
쿠구구구-!
이제는 불길한 소리까지 내며 점점 커져가는 뿔을 앞에 두고 뒤쪽으로는 혹여나 오지 않을 광신도들 경계했다.
그런 윤견 속도 모르고 검처럼 거대해진 뿔과 마찬가지로 전에 비해 몸집이 커진 놈이 천천히 윤견에게 다가갔다.
"덩치가 그새 컸네? 성장기야?"
"크르르르.."
"새끼야, 구해줬잖아..."
"크아앙!!"
짐승의 울음소리가 사방에 퍼지자 윤견은 직감했다.
-좆됐네.
{플라즈마 블레이드}
섬광의 스파크가 튀기며 뿔을 휘두르자 참격이 윤견을 향해 발산됐다. 비명과 함께 아래로 몸을 낮추자 문과 함께 벽이 통째로 날아갔다.
"이..미친 놈이!"
그간 조심히, 조용히 움직이던 윤견이 이를 아득 갈며 총을 겨누자마자 등 뒤로 들려오는 수많은 발소리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캬오!"
한눈 판 사이 놈이 벽을 타고 윤견의 목을 향해 발톱을 세웠다. 목을 꺾어 피하자 공중에서 머리를 휘둘러 뿔을 휘둘렀다.
이를 악물고 이번에는 허리를 꺾어 뿔을 피했다.
그리고 손으로 바닥을 짚고 발차기를 날렸다. 놈은 그대로 윤견에게 차이며 자신이 부순 벽 쪽으로 날라갔다.
"키이이...."
금세 정신을 차린 놈은 자세를 잡아 다시 윤견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옆쪽에서 들린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레 난동에 허겁지겁 올라온 광신도들과 난동의 주범이 서로 마주친 것이다.
계단을 올라온 광신도들이 일제히 검을 뽑자 놈의 뿔도 더욱 빛을 내더니 그대로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이다!
그 틈에 자리에서 벗어난 윤견은 서둘러 다른 방문을 부술 듯이 차며 안을 확인했다.
-다른 방에 놈들이 있었으면 진즉에 나왔을 거야. 저 망할 놈이 얼마나 버틸 지 몰라, 빨리 뭔가를 찾아야 해!
수많은 문들을 열던 중 드디어 찾던 중 하나인 온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래층에서 발견한 검이나 총처럼 대충 던져 놓은 게 아닌, 마치 유물을 전시하는 것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게다가 윤견의 흑도뿐만이 아니라 다른 무기들도 나란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헌터들의 온도 있었고, 수인들의 창과 검 같은 무기도, 알 수 없는 무기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들어도 보고 한 번 살펴보고 싶지만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니 얼른 흑도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뭔?”
그러나 윤견이 밖을 나서자마자 소리가 끊긴 것처럼 소란스러웠던 소리를 대신해 고요한 정막과 함께 토막난 광신도들의 시체가 바닥에 즐비했다.
“...말도 안 돼. 저 놈이 이겼다고?”
지금 대충 바닥에 쓰러진 놈들의 조각을 따져도 적어도 최소 여섯 마리 쯤 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두를 놈이 도륙을 내버렸다.
“놈은?”
끔찍한 시체들 사이를 살피며 확인해봤지만 놈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자연스레 놈들을 베어가며 아래로 내려간 모양이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애매하지만 적어도 놈이 광신도들을 상대하고 있을 것이니 시간은 좀 번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틈에 윤견은 두 갈래의 길 앞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불상을 부술 것인지, 일행들을 구할 것인지. 그러나 고민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윤견은 곧장 답을 내렸다.
조각난 살덩이들을 밟으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아래쪽에서 싸우고 있는 지 곧바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끊임없이 들리는 것을 보아 양 쪽 모두 치열하게 싸우는 모양이다.
“하하...참. 우리 집 삐삐랑 같은 종 맞아?”
아무튼 저 놈 덕분에 방해 없이 뒤지지 못한 아래층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층에서 막 나오던 두 마리의 광신도와 마주쳤다.
당황한 광신도와 달리 곧바로 행동에 들어간 윤견은 흑도를 움직여 가장 앞에 있는 광신도를 찔렀다.
귀에 익숙한 비명소리가 윤견 코앞에서 터져 나왔다.
“시끄러 새끼야!”
레버를 잡아당기자 놈의 몸 안에서 푸른 화염이 놈을 갈아 먹으며 불타올랐다.
-역시...전에 비해 뭔가 약해졌어.
처음 광신도를 급습했을 때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몸을 던진 것이었지만 윤견의 예상보다 쉽게 놈을 제압했다.
분명 기억 속 광신도는 홀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윤견과 나름 비등하게 싸웠던 종족이었다.
그런데 그 때도, 삐삐의 종족에 학살 당한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 때에 비하면 이상한 정도로 약해졌다.
뒤에 있던 광신도도 검을 뽑고서는 그대로 윤견의 미간을 향해 찔렀다. 하지만 먼저 놈의 발목을 쳐서 넘어트려 공격을 피했다. 놈의 머리는 벽, 그리고 바닥에 부딪쳤다.
그 고통에 정신 차리지 못한 놈의 목을 향해 흑도가 찌르며 그대로 위로 베어버렸다. 이번에도 간단하게 쓰러트린 놈들을 보고는 검을 휘둘러 피를 흩뿌렸다.
그리고 바로 근처 방문을 발로 차 부수자 이 난장판에도 곤히 자는 이종족이 보였다. 이상토록 짜증이 솟구쳤지만 꾸욱 참고는 다음 방으로 향했다.
드디어 검이 아닌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파이브! 파이브!"
손과 발의 결박을 풀고 파이브를 흔들었다.
방금까지 좋은 꿈을 꾸는 것만 같던 파이브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소중히 떠다니는 물방울이 흔들리며 터지는 것처럼 파이브의 안면이 흔들리더니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어?"
분명 눈을 떴음에도 파이브의 눈은 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했다. 방금까지 자신은 눈부신 곳에서 그리운 이들과 함께 한 테이블에 둘러 앉아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식탁과 함께 세계가 물결처럼 흔들리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어두운 방과 정체 불명의 피를 뒤집어 쓴 윤견이 나타났다.
환각과 현실의 사이에서 혼란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다급히 움직이려하자 윤견이 그런 파이브를 붙잡았다.
"진정해, 파이브. 천천히, 천천히."
양 팔에서 느껴지는 윤견의 온기에 파이브도 흔들리는 동공도 점점 잔잔해져 갔다.
"여..여긴 어디야?"
"나도 몰라. 일단 우리 모두 붙잡힌 상황이고 이제 막 너 밖에 못 찾았어. 천천히 일어나 보자."
"으..응."
운견의 손에 의지하며 천천히 일어선 파이브가 다시 한 번 방 안을 살폈다. 잠깐 파이브의 눈에 착잡한 감정이 흘렀으나 금세 거두고는 윤견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모른 다는 거지?"
"어, 하지만 찾을 곳이 많이 축약되긴 했어."
윤견은 허리춤에서 전에 비해 많이 더러워진 권총 한 자루를 파이브에게 건넸다.
"...할 수 있겠어?"
총을 보는 파이브의 눈에 힘이 들어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종족의 싸움이 결판이 난 것일까, 아까까지 시끄럽던 건물 내부가 조용해지자 먼저 밖으로 나온 윤견이 주변을 살폈다.
방을 나오기 전 파이브와 나눈 대로 방 문을 열며 안을 수색했다.
그러나 모든 방문을 열고도 다른 일행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까처럼 무기들이 쌓인 방에서 라호의 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 위로 올라가?"
"아냐, 내가 위에서 부터 훑고 왔어, 이대로 내려간다...뒤에 잘 붙어 있어."
계단으로 향하자 겨우 발 한 짝 디딜 틈 밖에 없는 시체 길에 파이브의 눈썹이 움직였다.
"이것들 그 때 경마장에서 봤던 놈들이지? 닥터가 한 거야?"
"경마장에 본 놈은 맞는 데, 내가 하진 않았어....저 놈이 한 짓이야."
갑자기 발을 멈춘 윤견의 등에서 빠져나와 앞을 보자 눈에 익숙한 짐승이 시체 산 위로 당당히 서 있었다.
"삐..삐?"
분명 자신이 아는 삐삐처럼 보였지만 뿔과 덩치의 크기나 내뿜고 있는 분위기가 부정하고 있었다.
-최면사말고도 다른 이종족의 시체도 있어. 놈의 난동에 깨어난 건지, 아님 최면사가 조종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그 모두를 홀로 이긴 건가..
천천히 자세를 잡는 윤견을 보며 파이브도 정신을 다잡고 나무를 내려놓고 권총을 들었다.
파이브의 심장이 쿵쿵 방아질을 하며 파이브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가만히 있는 윤견의 등을 보자 조금씩 잠잠해지더니 이내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내가 삐삐 소리로 대화 해볼까?"
"..? 저게 들 고양이냐?"
-아직 덜 깼나?
"...삐~."
"야!"
슬쩍 목을 빼고 삐삐 목소리를 흉내 내는 파이브를 다그치듯 윤견이 파이브의 머리를 잡고 밀어 넣었다. 그리고 바로 검을 두며 경계했지만 놈은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바로 달려들 줄 알았으나 고개를 갸웃 거리며 윤견을, 아니 어쩌면 그 뒤에 있는 파이브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삐삐와 동족이구나 생각했다.
"..효과가 있는데?"
"봤지! 한 번 더 해?!"
교감 성공에 신이난 파이브가 다시 입 모양을 만들고 소리를 내려던 찰나 놈이 먼저 시체 산에서 내려가 아래로 향했다.
윤견과 파이브가 잠시 서로를 마주보고는 말없이 놈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이미 놈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놈은 놈이고 윤견과 파이브는 아래층으로 향했지만 그동안 봤던 층과 달리 이번 층은 모든 문이 열려 있었다. 아마 이 층에서 나온 놈들이 저 시체의 산의 일부인 것으로 보였다.
그리도 이제야 자세히 보니 시체 산 중에 사람 팔 한 짝이 삐져나온 게 보이자 다급히 산을 파헤치며 팔을 빼냈다.
“..후.”
사람의 시체는 맞지만 일행들의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한 시름 놨지만 뒤에서 보던 파이브는 금세 이 남성의 정체를 알아 봤다.
“저 사람...그 때 우리 최면에 빠지기 전에 봤던 사람이야.”
파이브의 말에 남성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니 맞았다. 소인에게 쫓기던 사람들 중 가장 선두에 있던 자였다.
절로 나오는 한숨에 윤견은 두 눈을 감고 짧게나마 묵념을 하고는 남성의 눈을 감겼다.
-잊고 있었어. 놈도 결국 이종족인데.
귀여운 외모와 삐삐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피어난 친밀감. 윤견이 처음 놈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못한 이유였다.
“닥터.”
낮게 울리는 파이브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누군가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의 주인은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라호다!”
파이브가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가려는 순간 투박한 손이 파이브를 붙잡았다. 당황한 파이브가 윤견에게 이유를 묻기도 전에 라호의 손에서 나무가 모습을 드러내며 움직였다.
{시드 플래닛}
{온 – 착화(着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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