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상자 - 3

나무와 불의 격돌.
나무의 잔재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꺄악!”
파이브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낮췄다.
“어..어째서?...설마!”
넘어 온 기억 속에 파이브도 광신도들에게 조종당한 생물의 목에 있던 문양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문양과 모양이 미묘하게 다른 것이 라호 목에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도 그건데 라호 손에 왜 나무가 있는 거야?!”
그 말을 듣고 파이브도 뒤늦게 자신의 손에 있는 나무를 쳐다봤다.
전에 라호가 나무에 대해 간단하게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나무도 어떻게 보면 헌터들의 온처럼 오직 본인 만 자신의 나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분명 라호 손에 있는 건 라호의 나무가 맞다는 소리다. 그럼...파이브 손에 있는 나무는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일단 이 문제는 넘어가고 눈앞의 문제부터 직시하기로 했다. 라호는 환각이 아닌 지금 최면 상태다. 환각에 빠진 거면 파이브 때처럼 쉬운 문제지만 저 상태에서는 지금 라호를 깨울 방법이 없었다.
라호를 조종하고 있는 존재를 죽이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럼 역시 저 검도 채찍처럼 맞으면 최면에 걸리는 건가? 그럼 최면사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목에 문양은 있지만 모양이 다르니 불상이 원인일 수도...
놈들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던 중 화성 작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경마공원 때는 광신도를 죽이니 자연스레 사람들도 최면에 풀렸지만 불상에 묶여 있는 자들은 아니었다.
불상과 광신도를 동시에 파괴하니 조종당했던 종족들이 고장난 로봇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덕분에 윤견은 아무 힘 안 들고 전부 죽일 수 있었다. 그 모습은 결코 최면에 풀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닥터!”
{시드 플래닛 - 철갑의 오르리}
갑옷을 입은 나무의 줄기들이 창처럼 윤견을 향해 날아왔다. 앞으로 뛰어 자리를 먼저 잡고 흑도를 휘둘렀다. 어둠 속 검은 궤적이 푸른 열을 그리며 가지들을 쳐냈다.
다른 가지와 달리 단단하게 버티는 철갑의 가지를 보며 윤견은 다시 한 번 레버를 당겼다.
나무로 전해지는 흑도의 힘에 라호의 손에 작은 진동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난 라호가 다시 한 번 나무를 움직이려던 찰나 그 보다 빠르게 두 발작 파고든 흑도가 나무를 내리치며 바닥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바로 한 쪽 팔로 라호의 목을 파고들어 조였다.
“커흑..!”
윤견의 팔에 휘감긴 라호가 붉어진 얼굴로 빠져나가려 몸부림을 쳤지만 작은 미동만 있을 뿐 윤견의 암 바를 풀 수 없었다.
“...뭔가 학교 폭력을 목격한 기분이야.”
그 모습을 세 발짝 뒤에서 보던 파이브가 작게 중얼거렸다.
점차 약해지는 반항과 풀리는 라호의 눈을 보며 조금씩 힘 조절을 하다 보니 금세 라호의 의식은 약해지며 곧이어 꺼졌다. 라호를 그대로 둘러메고 나무는 파이브에게 던져줬다.
“그럼 이건 어떻게 해?”
파이브가 처음부터 들고 있던 나무를 가리켰다.
“같다 버려. 그럼 이제, 민혁이랑 강후만 찾으면 되는 건가?”
“으...근데 나만 답답해? 무슨 건물이 창 하나 없냐?”
“...어? 그러고 보니...”
그간 너무 신경을 곤두 세워서 그런 가.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었던 윤견이 파이브의 말을 듣고 주변을 살폈다.
이곳도 그렇고 기억 속 어느 한 곳도 창문 하나 없었다. 보통 건물, 적어도 고시원도 창문 하나는 있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 건물에 창문 하나 본 적 없었다.
창문이 있는 데 막은 흔적도 없었다. 그냥 벽만 있는 건물이었다.
-이런 건물이 있을 수가 있나? 그리고 분명 근처에 이렇게 높은 건물도 안 보였어.
점차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업고 있던 라호를 벽에 기대서 내려놓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벽 앞에 도착했다. 문 넘어 파이브가 고개를 내밀며 지켜봤다.
흑도의 검기가 서서히 날카로워지더니 그대로 벽을 강타했다.
콰앙-!!
거친 파괴음과 함께 벽이 무너졌다.
“...밤인 거야?”
멀리서 지켜보던 파이브도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밖을 보며 말했다. 윤견도 파이브처럼 어두운 야외를 보며 밤인가 싶었다. 하지만 정말 어둠 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땅이며 하늘이며 모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뭔가 우주에 떠다니는 거 같아.”
부서진 벽 넘어로 손을 뻗어 봤지만 당연히 잡히는 건 아무도 것도 없었다.
“우리 둘 다 다시 환각을 보는 건 아니지?”
“...어. 둘 다 동시에 같은 걸 보고 있으니깐...”
조심히 고개를 내밀어 위와 아래를 봤지만 역시나 보이는 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뿐이었다. 게다가 건물의 층수를 파악하려 해도 웬만한 고층 빌딩보다 아래로 길게 뻗어있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끝없는 어둠 속 파이브가 점차 불안해졌는지 윤견의 옷소매를 잡았다. 윤견도 건물 층수를 7층까지 세고는 포기해 깊은 한숨을 뱉었다.
“나 참, 살다 살다...”
머리로는 도저히 현 상황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모든 원흉인 것들을 빨리 끝내야겠다는 한 가지 목표만 뚜렷해졌다.
“파이브, 라호를 부탁할 게. 그리고...”
“알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쓰라는 거지?”
파이브가 싱긋 웃으며 자신의 팔찌를 보였다. 그 미소에 윤견도 따라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미소는 방을 벗어나자마자 사라지며 딱딱한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목표가 세워지긴 했으나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불상을 부셔도 라호나 다른 일행들에게 문제가 없는 지, 이 건물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지, 여전히 모른다. 그나마 윤견의 발걸음이 위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 이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층, 두 층 올라가며 마지막 층만이 남았을 때 낯선 발소리가 다가왔다. 분명 위층에 남아 있는 광신도는 없고 누구도 올라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최면에 빠진 누군가 깨어났나?
위에서부터 훑고 오면서 딱히 강한 종족은 없었다. 가볍게 든 고개에 답지 않은 상대가 윤견 앞에 나타났다.
놈을 보자 절로 수원종합운동장의 풍경이 펼쳐졌고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소리가 들렸다. 푸른 손이 만든 검은 상자에서 태어난 검은 생명.
아직 놈의 면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손가락으로 입 부분을 길게 찢으며 입을 만들었다.
이제 그걸 가만히 볼 이유가 없기에 흑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놈이 품격 있는 자세로 손을 내밀며 입을 움직였다.
"멈추게."
놈의 입에서 한국어가 곧바로 나왔다. 전에는 고블린이나 수인 등 여러 언어들을 뱉었었다.
"한국어 잘 하네?"
"내 다른 정신과 만난 적이 있지 않은 가.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지 않은가."
"하! 미친놈이..."
만약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면 지금 사람과 대화하는 걸로 착각할 것이다. 그 정도의 언어구사력에 윤견이 헛웃음을 쳤다.
"다른 정신이라고? 그럼 수원에서 그 때 놈이라고 봐도 되나?"
"음...뭐, 그 때의 나의 기억이 전승 됐으니 맞다고 해야 할지...이제 막 눈을 떴으니 아니라고 해야 할 지."
"그래도 뭐 나한테 적인 건 변화가 없지."
"아, 그것에 대해 잠시 얘기를 나눴으면 해."
놈은 눈앞의 살기 가득한 검과 눈을 보고도 전혀 움츠려 들지 않고 얘기했다. 그럼에도 윤견은 검과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
놈은 그래도 아직 검이 움직이지 않았단느 것에 의의를 뒀는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자네와 같은 처지네."
"....뭐?"
생각지 못한 발언에 검 끝이 흔들렸다.
"일단 이 곳은 여기인지 설명하지. 자네도 본 적이 있을 거야. 나의 요람, 침대? 음...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
"설마...그 검은색 상자를 말하는 거냐?"
"아하하! 그래, 그 상자라네."
상자라는 표현에 한 방 먹었다는듯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윤견의 표정은 더욱 굳어지며 손아귀에 힘이 더해졌다.
"그러면 너와 우리의 처지가 같다고 할 순 없잖아."
"아니, 나도 신도들에 의해 갇혔어."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야. 신도들이 나를 밀어내고 새로운 신을 받들기로 했나봐. 그래서 나를 깨우지 않고 순수하지 않은 제물들을 바치더군."
-거짓인가...?
거짓을 간파하려 해도 보이는 건 저 찢어진 아가리 뿐. 믿을 근거는 없지만 그래도 놈이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에 검을 치웠다.
"그럼 최면사...아니, 신도들이 너를 배신하고 새로운 신을 만들겠다는 건가?"
“음...솔직히 말하면 목적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딴 배를 탔다는 건 알 수 있지.”
한국인이라고 해도 속을 정도의 검은 생명체가 계단에 걸터앉으며 고개를 살랑 저었다.
“그러면 지금 이 놈들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왜, 이 많은 이들을 데려왔고 배신할 너에게 제물을 받치는 거지?”
“그야 날, 태어나게 하려는 거지. 신도들이 원하는 건 이 육신이거든. 그래서 계속해서 완전하지 않은 제물들을 먹이더군.”
완전하지 않은 제물이란 말에 수많은 팔과 다리가 걸려있던 방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런 걸 먹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이 몸이 가장 약할 때가 그 때거든. 그리고 제물에 뭔가 섞여 있었거든. 그렇게 불상에 묶인 채 제물만 받아먹던 중 자네가 난리친 덕분에 결박이 약해져 그 틈에 나올 수 있었지. 그리고 이제 이번에는 자네와 손을 잡고 이...검은 상자에서 나갈 생각이지.”
“그럼...방법은 안다는 소리로군.”
어색하게 찢긴 입꼬리가 길게 찢어지며 검은 고개가 끄덕였다.
“만약...너 놈이 아는 방법으로 밖으로 나간다면 이 안에 있는 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전부 뱉어지지.”
입을 크게 벌려 헛구역질 하는 놈을 보며 더욱 심란해져 흑도로 이마를 문질렀다. 놈의 손만 잡으면 윤견이 앓던 모든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저 놈을 믿을 수가 있느냐 말인가.
결국 놈도 어떻게 보면 수원에서의 놈과 같다. 인간을 벌레 취급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종족이다. 게다가 정말 뱉어지지는 지도 의심이 간다.
아무 답도 못 내리고 인상이 더욱 구겨지자 놈이 속을 간파했는지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너희 종족과 달리,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너희 종족처럼 남을 속이는 짓은 하지 않는 다고. 믿음에게는 그만큼 관용을 베풀고, 배신에게는 그만큼 심판을 내리는 신이다. 고작 미물들 속이려고 거짓말은 하지 않는 다는 뜻이다.”
-...씨발, 이건 이거대로 열 받네..
하지만 정말 믿음이 가는 발언이다. 놈이라면 저놈이라면 그럴만하기도 하기에.
“하아...좋다, 받아들이지.”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