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도시 - 2

“흠...확실히 흥미롭군.”
한참 카페에 들어가 이것저것 감상하고 있던 신이 갑작스레 피어난 푸른 화염에 다급히 윤견 쪽에 도착했다. 그 후 윤견에게 무슨 상황인지를 설명 들을 수 있었다.
한참 생각을 하던 신도 생각이 끝났는지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빌딩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인이 나타났다. 분명 이런 상황이었으면 분명 주변에서 비명소리가 난무했을 것이다.
그러나 들리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밟히지 않게 조심하게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주먹이 빌딩을 관통했다.
콰아앙-!
잊고 있던 익숙한 소리가 윤견의 귀를 때렸다. 하지만 무너지는 소리와 동반돼서 들려왔던 비명은 없었다.
아무 것도 담지 않은 표정과 달리 거인의 주먹과 발은 건물을 무너트렸다. 레고 불럭처럼 무너지는 건물들 속 한 명의 헌터가 복잡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분명 예전에는 이와 반대인 입장이었다. 비록 거짓된 세계일지라도 무너지는 건물을 유유히 보는 윤견도 썩 유쾌하지 않았다.
건물이 무너지며 만든 소음에 귀를 지긋이 막았지만 귀에 속삭이듯 들린 비명소리까지는 막지 못했다.
벌써 빌딩 몇 채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지만 아직 어떠한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윤견도 다시 검을 들고 다시 시작하려던 찰나.
탁.
소란스러운 소리 속에서 귀신같이 한 소리가 귀에 잡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작은 인형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방금까지 없었던 인형에 조심히 다가가 잡던 순간 인형의 털이 붉게 물들더니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으며 인형을 쳐냈다.
그 때, 거인에게 모든 걸 잃은 그 때. 홀로 남은 윤견을 반겼던 그 인형이었다.
입술이 떨어졌음에도 말을 하지 않던 윤견이 곧장 흑도로 인형을 찔렀다. 혹여나 환상으로 생각해 한 행동이었지만 변하는 건 역시 없었다.
“어...내 인형인데..”
또 다시 귀에 잡힌 소리에 그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유독 저쪽에 그림자가 깊게 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도 중성적이라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 수도 없었다.
“아..미..미안하다..?”
자신도 모르게 검을 치우고 사과를 뱉었다. 그러나 곧장 다시 검을 보이며 자세를 잡았다. 처음으로 이 도시에 윤견과 신 외에 다른 생명이 나타났다.
“정체가 뭐냐? 모습을 보여라.”
“나? 사람이지.”
경계를 멈추지 않은 윤견과 달리 그림자에서 나온 목소리는 여유 가득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 때문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절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콰앙-!!
그 순간 건물을 무너트리며 신이 등장했다. 그리고 곧장 그림자를 향해 넓은 발바닥을 내리찍었다.
거센 풍압이 거리를 덮쳤다. 윤견도 흑도를 바닥에 박아 넣자 잠시 뒤로 밀리뿐 굳건히 풍압을 버텼다. 그러나 거인이 이번에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흙먼지 가득한 곳에 연타를 날렸다.
쉬지 않고 몰아치는 주먹에 반격하듯 바닥에서 쇠사슬들이 솟아났다. 쇠사슬은 거인의 팔과 몸, 목을 칭칭 감았다.
“크아아아-!!”
거인이 울부짖으며 쇠사슬을 끊어내려 했다. 하지만 쇠사슬은 끔쩍도 하지 않았다. 쇠사슬의 끝이 서서히 올라오더니 먼지 속에서 깔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흑백의 노신사가 떠올랐다.
“벌써 나온 건가...최대한 상처 없이 제압하고 싶은데.”
“너 놈...너 놈은 누구냐!!”
신이 노신사를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분노보단 공포가 가득한 포효였다.
“그간 모든 종족을 봤었다. 그런데 너놈은...너 놈은 도대체 정체가 뭐냔 말이냐!”
“흐음...꽤 나쁘지 않은 감각을 가졌구나. 비록 분신이지만 그래도 간파는 한 거니.”
노신사가 팔을 쭉 뻗자 쇠사슬들이 서서히 조였다. 신은 잠시 몸부림치다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바로 몸을 줄였다. 노신사는 곧장 쇠사슬을 조종해 신을 쫓았으나 흑도가 끼어들며 막아냈다.
“흠...”
윤견을 천천히 훑던 노신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세계와 같은 회색의 불덩이들이 나타나더니 윤견을 향해 날아갔다.
{온 – 착화(着火)}
그에 맞서듯 청염이 울부짖으며 불덩이들을 베었다. 모든 것들을 베자 순식간에 접근한 노신사가 윤견의 목을 잡고 건물에 날렸다.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며 박힌 유리조각들을 떼어내는 사이 벼락시니의 팔이 만든 번개가 노신사에게 떨어졌다.
거리의 가로등들이 반짝이다 전구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창 한 자루가 번개들을 역류하며 날아가 신의 어깨를 관통했다.
그 틈에 끊어진 번개와 함께 노신가다 접근해 신의 목을 잡고 그대로 바닥에 메어꽂았다. 신은 밀려오는 고통을 뒤로 한 채 얼굴을 변형시켜 수 십 개의 눈을 만들어 노신사를 바라봤다.
“호오. 아까 그것인가.”
노신사의 머리가 결계에 갇혔다. 하지만 눈과 달리 노신사는 여유롭게 결계를 살폈다.
{아티라의 결계 - 형벌}
수많은 눈들이 동시에 피눈물을 흘리자 결계 안에 뿌연 연기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연기는 어느새 결계 안이 안 보일 정도로 가득 차다니 천천히 사라졌다. 노신사의 머리와 함께.
그러나 머리 없는 몸은 아직도 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놀랍군. 설마 이렇게 공격할 줄이야.”
머리가 없으니 당연히 입도 없는 법. 그러나 들려오는 노신사의 목소리에 신의 외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노신사의 몸 역시 불꽃처럼 일렁거리더니 몸에서 불꽃이 솟아났다. 불꽃은 금세 진화되며 그 안에서 노신사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역시 탐나는 육체군. 우리도 이런 육체는 만들지 못하는데 말이지. 정말 알면 알수록 재밌는 세계야!!”
방금까지 타오르던 불꽃처럼 노신사의 눈이 불타올랐다. 그리고 광기 어린 미소는 마치 새로운 보물을 찾은 도둑 같기도 했다.
광기의 미소에 신은 예전의 몸이 가졌던 감각이 하나 떠올랐다. 부들부들 떨던 신의 입술이 움직이려던 찰나 흑도가 푸른 궤적을 그리며 노신사를 베었다.
-...그래...저 눈이었어.
신은 예전 기억 속 그 감정을 불러 일으켰던 눈을 바라봤다. 그 때와 같은 눈, 그 때와 같은 인물이다. 그 때도 그는 그런 눈을 가지고 예전의 자신을 죽였다.
벌레와도 같다고 생각했었던 그, 그들에게.
한편 몸이 베인 노신사의 상체가 빙글 돌더니 손가락으로 윤견을 가리켰다.
그리고 바로 윤견의 몸체 앞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커헉!”
폭발에 윤견이 그대로 날아가자 어느새 몸이 붙은 노신사가 다시 불덩이들을 날렸다. 날아가는 도중에 서둘러 몸을 굴려 자세를 잡고 검을 휘둘렀다.
단 칼에 하나 둘 베이는 불덩이.
그러나 그 다음으로 날아오는 검은 구체에 흑도가 멈췄다. 흑도의 주인이 본능적으로 피해야 한다고 판단을 내렸다. 땅을 박차고 옆으로 몸을 던졌다.
검은 구체가 그대로 윤견이 있던 바닥을 강타하자 검은 가시들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윤견은 흑도를 크게 휘둘러 푸른 궤적을 둘러 검은 가시들을 막아냈다.
그러자 땅이 작게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쇠사슬이 솟아났다.
“크호악!”
갑작스런 기습에 알 수 없는 비명과 함께 몸을 뒤로 굴렸다. 도망가는 윤견을 쫓아오듯 쇠사슬이 계속해서 솟아났다.
-뭐지, 쇠사슬을 만들고, 불덩이를 던지고 창을 만들어 던진다고? 저 놈도 미개신과 새의 자식처럼 여러 가지 공격을 할 수 있는 건가?
윤견에게 몰아치는 쇠사슬들을 쳐내며 그 뒤로 번개가 다시 윤견을 지나 노신사를 날렸다. 덕분에 멈춘 쇠사슬과 흑도에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 윤견을 향해 신이 터벅터벅 다가갔다.
“저 놈 맞는 거 같지?”
윤견이 턱짓으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뭔데?"
비록 정상적인 눈은 하나도 없지만 자신을 보는 시선이 이상하다고 느낀 윤견이 넌지시 물었다.
신은 여전히 윤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움직였다.
"너 놈이 특이한 건지 너희 종족이 특이한 건지 이제는 헷갈리는 군."
"...엉? 뭔 개 소리여?"
신의 입이 떨어지려던 찰나 참격이 날아왔다. 신과 윤견은 각자 피하고 번개와 청염을 날려 반격했다. 청염과 참격이 만든 연기 속에서 또 다시 참격들이 쏟아졌다.
신의 다리가 변하고 바닥을 치자 특이한 문양이 있는 벽이 솟아나며 참격들을 막아냈다. 그러나 참격을 굳건히 막아냈던 벽이 금이가더니 그대로 부서지며 미형의 여성이 나타났다.
여인이 등장하자마자 흑도가 검기를 세우며 움직였다. 여인은 유연하게 몸을 꺾어 피하고는 손가락으로 윤견을 가리켰다.
또 다시 허공에서 터진 폭발에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노인은 보이지 않은 걸 보니 저 여자가 방금 그 노인이라고 봐야겠군. 능력도 딱히 변하지 않은 모양이고.
윤견이 잠시 적을 파악하는 사이 양 손을 가위로 바꾼 신이 달려들며 여인을 몰아붙혔다.
하지만 수 백 번의 가위질을 미꾸라지처럼 피하는 여인이 손을 뻗자 쇠사슬들이 나와 신의 팔을 묶었다.
신이 다시 스탭을 밟자 여인의 사방으로 벽이 솟아났다. 그리고 뛰어 올라 위에서 불을 내뿜었다.
-확실히 나와 달리 저 놈은 제압하려는 목적인 거 같아. 그것도 그건데...어떻게 죽여야 하는 거야? 머리를 없에도 칼을 베어도 재생되잖아.
지금도 벽이 그을리며 조금씩 무너질 정도의 화염에도 여인은 가볍게 뚫고 나와 화염구를 던졌다.
"크흑!"
미쳐 피하지 못한 신이 그대로 화염구에 맞으며 건물로 날아갔다.
"흠...둘 다 생각보다 제법이네? 한 쪽은 완벽하지 않은 상태일테고, 다른 쪽은 인간인데?"
"카핡, 퉤."
깊게 고인 침이 섞인 가래를 뱉고는 천천히 여인 앞에 다가갔다.
분명 외형은 완벽한 사람이다. 하지만 내뿜는 아우라는 종을 넘어 느낄 수 있었다.
여인의 무색의 눈동자가 윤견에게 향했다. 윤견이 처음부터 다가오고 있었음에도 지금에서야 눈동자가 마중을 나온 것이다.
"자네의 목적은 뭔가?"
"..뭐?"
"자네의 목적이 뭐길레 그릇을 도와주는 거지?"
"그릇...아...미개신."
윤견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여인의 질문에 고민했다. 방금까지 자신의 목을 노렸던 적임에도 윤견은 꽤 깊게 고민하고 답을 내놨다.
"...돌아가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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