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색

윤견과 파이브가 나간 후 그 옆 옆방으로 군복을 입은 장성 두 명과 사복을 입은 각 길드장 세 명이 들어섰다.
군복은 입은 이들은 왼쪽에 사복을 입은 이들은 오른쪽에 나눠 앉았다. 그들의 앞에는 파일과 종이 두 장 정도가 놓여 있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고 그 중앙에 위치하는 의자에 이화가 앉았다.
그들은 앞에 놓인 자료들을 빠르게 훑었다. 어깨에 별 네 개를 단 대장이나 청룡 길드장은 담담한 눈치였지만 다른 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종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2세대에 대해 소문으로 듣긴 했습니다만...설마 시간 이동이라니...”
현무 길드장인 이지훈이 짧은 헛웃음과 함께 파일을 테이블 위로 던지듯 올렸다. 그 옆에서 아직도 읽고 있는 해태 길드장인 박지수도 긴 머리를 쓸어 넘기곤 파일을 덮었다.
“총괄 책임자님께서 이걸 저희에게 보여준 이유는 그럼...”
반면 여전히 담담한 김 대장이 이화를 보며 말했다.
“네, 그 아이가 지금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덤덤히 말하는 이화의 반응에는 장내는 반응은 뜨거웠다. 이런저런 목소리들이 오갔다.
멈출 줄 모르던 소란은 이화의 손뼉에 사라졌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물건들 말이군요.”
김 대장의 말에 이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아시다시피 물품들은 거제시에 있습니다. 저희는 그동안 그곳을 외면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곳에는...”
“맞아요. 확실히 위험하긴 하죠. 괜히 벌집을 쑤셔서 이곳만 위험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그래서 포기할 건가? 지금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미래를 바꿀 수도 있다고!”
이화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려다 멈칫했다.
“확실히 위험한 곳인 거 맞아. 하지만...정말 마지막 기회입니다. 우리에겐 마지막 기회입니다. 다들 떠나간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화의 말에 일동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청룡 길드장 하용진은 이화만 흘긋 노려볼 뿐이었다.
그것도 잠시 용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입을 열었다.
“책임자님께서 명령 하시죠. 지금까지 저희가 따랐듯이 명에 따라 따를 것입니다.”
용진의 말에 다들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용진의 말대로 이화가 이곳을 이 정도까지 세운 거나 다름이 없으니.
“그럼 세 길드 중 한 쪽만 이곳에 남았으면 하는데..”
“제가 남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현무 길드장 지훈이 손을 들었다.
“여기 길드장님들 중에서 제가 제일 약하니깐 남는 게 맞지 않을 까요?”
이화가 잠시 고민했지만 확실히 거제시를 건너려면 지금까지 있었던 위험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할 것이다.
“..그래, 그럼 대장님이 저 대신 이곳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들 단단히 준비하도록 하세요. 절대 쉽게 끝나지는 않을 테니.”
*
한편 긴 시간 동안 샤워를 끝낸 파이브가 개운한 표정으로 나왔다.
“와...진짜 그 동안 내 몸에서 악취가 풍겼던 거구나.”
“하하, 코가 뚫리긴 했지. 것보다 배 안 고프냐?”
“고파!”
준이 나눠준 팔찌를 끼고선 2층으로 향했다.
2층에는 요리하는 식당을 제외하고는 전부 밥을 먹을 수 있는 식탁과 의자만이 있었다.
“몇 명 있긴 하네.”
“저기서 배급 받나봐!”
파이브가 가리킨 곳을 가니 수북이 쌓인 식판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이름.”
“네? 저희요?”
“그래, 이..아! 빨간색이시구나.”
퉁명스럽던 그가 갑작스레 부드러워지며 길을 비켰다. 혼란스러운 파이브를 슬며시 밀며 윤견이 꾸벅 인사하곤 식판을 들었다.
“길 막지 말고 빨랑 받아라.”
“무슨 학교 급식실 같네.”
윤견도 마침 그렇게 생각했다.
식판을 내밀면 넘어에서 음식들이 넘어왔다.
메뉴는 죽이랑 계란국, 그리고 일반적인 반찬들과 후식으로 보이는 귤 세 개였다.
너무 일반적인 식단에 둘은 모두 멍 때릴 뿐이었다. 하지만 식판을 지키던 남성이 다가왔다.
“아이고 처음 오셨나 보네요. 잠시 기다려 주세요.”
그는 식당으로 가 뭐라 말하더니 사발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자, 잔치국수입니다. 앞으로는 받기 전에 팔찌 먼저 보여주면 특별 메뉴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하하.”
유난히 친절한 그를 보니 아까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듯 했다. 윤견이 일반적인 감사 인사를 보내자 그는 안도한 듯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를 지나 식사 중인 다른 사람들을 훑어보니 국수를 가진 건 둘 뿐이었다.
“뭔..계급 사회도 아니고...그치?”
슬쩍 파이브를 보자 이미 파이브는 국수를 흡입하고 있었다.
“음? 뭐라고?”
“...아냐, 천천히 먹으라고.”
윤견도 파이브 따라 국수를 입에 담자마자 미친 듯이 흡입했다. 기억 속 그 맛있다. 잊고 있었던 국수의 맛에 윤견의 그릇도 어느새 국물 한 방울도 없이 비었다.
“후우...”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그저 배만 채우는 식사가 아닌 맛까지 챙긴 평범한 식사시간이었다. 파이브의 표정을 보니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앞으로 이런 생활을 하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
의자에 기대 팔과 다리를 쭉 피며 파이브가 말했다. 옆에서 입을 닦던 윤견도 파이브를 따라 팔 다리를 폈다.
“아마도 그렇겠지? 우리가 얼마나 굴러다녔는데 쉴 때 됐지.”
“하하하, 그럼 그 동안 뭐하지? 벌써 샤워는 질렸는데?”
“글쎄...돌아가면 말할 대본이라도 짜야지.”
“이미 7황 껀 다 외웠거든?”
마치 시험공부 하듯 시간이 날 때마다 봤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아니 그거 말고. 거래들이 있잖아.”
뭔 소린가 잠시 생각했지만 금방 깨닫고 피식 웃었다.
“아~ 이런 거 잘 못하는데.”
“그러니깐 대본 잘 써야지. 뺄 건 빼고, 추가할 건 추가하고. 각색 알지?”
민혁의 부탁이기도 했고 정보상 태인의 투자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싶진 않았다.
“음~그래. 방으로 돌아가자.”
방으로 돌아온 둘은 무전기로 종이와 펜을 요청했다. 무전 후 2분도 되지 않아 바로 배달이 왔다.
종이 맨 윗줄에는 당연히 둘의 첫 만났던 그 때로 시작했다. 물론 당시 주도권이 없는 파이브 대신 거의 윤견의 의견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점점 내려가는 잉크가 지난 이들의 이름들이 기록했다.
슈퍼에 있던 태준과 미양, 백정들에게 잡힌 아버지를 구하며 한 층 성장한 민석, 어른 들 없이 홀로 일어서야 했던 미호와 나준, 가족들을 위해 날아오른 슈퍼맨 아빠.
한참 나아가던 중 파이브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닥터도 각색 좀 해줘?”
“어? 나?”
윤견과 함께 머리를 맞대며 이야기 하던 중 파이브는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윤견은 지금까지 말하면서 한 번도 자신을 넣지 않았다. 물론 윤견의 시점이니 빠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한 번도 자시를 빼놓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음....별로?"
진지하게 고민한 것인지 아님 장난스런 미소처럼 대충 생각한 것인지 모를 답이 나오자 파이브가 눈썹을 구겼다.
"왜? 뭐가 불만이야?"
"아니, 솔직히 닥터한게 얼마인데 내가 각색 많이 해줄게. 질질 짠 거 빼줄게."
"누..누가 질질 짰다고!"
얼굴이 화끈 뜨거워지며 반박했지만 파이브는 전혀 듣지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맞아. 그들을 줄 세워 놓고 누가 길고 짧은지 비교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 중 가장 큰 건 닥터인데.."
누구보다 윤견이 더 보상 받았으면 싶었다. 물론 다른 이들도 고맙고 감사하지만 닥터는 다르다.
이미 파이브에게 있어 그는 가족이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팔은 안으로 굽힌다.
"그럼...나한테 특권 하나 있다는 소리네?"
"그치? 뭐? 하늘을 날았다고 해줄까? 아님 바다를..."
"뭔...우상화도 아니고...그냥 나는 빼줘."
"...뭐?"
예상하지 못한 말에 파이브가 멍하니 바라봤다. 그럼에도 윤견은 헛웃음과 함께 등받이에 기댔다.
"그냥 조용히 있게 해줘. 그 때의 나에겐 그게 최고의 선물일 거야."
말도 안 된다.
윤견이 얼마나 노력해서 싸웠음에도 어떤 곳도 받을 수가 없다니. 당장 입을 열어 반박하려 했지만 전에 윤견이 했던 자신의 얘기가 떠올랐다.
이젠 그의 과거를 알기에, 고통을 알기에 수궁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분하다는듯이 입술을 깨무는 파이브에 윤견은 가슴이 울렸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이리 생각하는 모습에 확실할 수 있었다.
이미 파이브는 가족이었다는 것을. 이지와 지수처럼 피는 석여있지 않지만 말이다.
"파이브, 그거면 돼. 모두가 살아 있기만 하면 돼. ...그래,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건 있다."
"오! 뭔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
"만약에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날 찾아와라."
나름 윤견이 오글거리는 것을 참고 말했지만 말이 끝나자마자 파이브의 발길질이 날아왔다.
"그건 당연한 거고! 아으, 사람이 답답한 면이 있었네?! 뭐, 물론 내가 그곳에서 나갈 수 있을 지는 모르는데 만약 기회가 있다면..."
잠시 말끝이 흐려진 파이브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기적이 있다면 만나러 갈거야. ...아~그럼 진짜 닥터는 뺀다?"
"오냐. 그 때 날 만나면 아마 내가 재수없게 굴 거야."
"? 어떤 식으로?"
"착한 척 오질나게 할 거야."
"프하하하-!"
파이브의 웃음소리가 싸늘한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건 그거대로 보고 싶은데?"
"시끄러, 아무튼 그래도 계속 들이밀면 짜증 낼거야. 꽤 싸가지 없게 말 할 수도 있어."
"흥, 그런다고 내가 물러서지는 않지."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은 정말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잠시 미래를 예상했다.
파이브가 찾아오는 미래를.
"그러면 먼저 동물원부터 가야겠네?"
넌지시 말하는 윤견에 파이브도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펭귄이나 봐야지."
"동물원 다음은 수원에 가서 다들 얼굴 한 번 씩 보면 되겠다."
키득 웃으며 앞으로의, 아니 뒤, 과거부터 계획을 쌓던 안과 달리 밖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러 대의 수송차가 줄을 지어 도착하자 군인들과 헌터들이 부리나케 올라탔다.
가장 앞에 있는 차량에는 이화가 당당히 올랐다.
“책임자님 출발 할까요?”
자리에 착석한 이화가 가볍게 목을 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절반 이상의 병력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빤히 보던 지훈이 손에 묻은 붉은 피를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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