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 2

“아~함~.”
이미 해가 지고 달이 하늘에 떠있던 시간.
산이라기에는 낮고, 언덕이라기에는 높은 뒷동산 위에 있는 백정들의 본거지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백정이 턱이 빠질라 하품을 했다. 그야 그동안 사람은커녕 이종족들의 그림자조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아~씨. 그냥 다른 쪽처럼 몰래 빠져서 놀다 올까...?”
백정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머릿속으로 몰래 과학관에 들어가 노예들 데리고 놀고 다시 돌아오는 것에 대해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 순간 밤의 어둠을 틈타 어두운 옷을 입고 온 윤견이 백정 뒤로 슬며시 다가가 입을 막고 목을 졸랐다. 윤견과 같이 올라온 문하와 민혁은 주변을 경계했다.
백정은 날뛰며 윤견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윤견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백정의 날뛰던 몸에 힘이 빠지자 윤견은 학교 밖으로 굴려 버리고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는 타고, 타며 대학교 동쪽 정문에 있는 무리에게 전달됐다. 정문에서부터 학교까지 거리가 길어 정문에 있어도 학교까지 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후...다들 가자.”
한편 윤견과 민혁은 주변을 살피며 가까이 있는 식당과 운동장을 찾았다. 문하는 따로 움직였다.
-솔직히, 반신반의 했는데, 그 정보가 진짜였군...
한 때 바돌을 심문하며 다른 백정들과는 다르게 꽤 상세한 정보들을 얻었었다. 보초를 서는 백정들은 있지만 어느 누구도 제대로 서는 놈들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지금 윤견의 눈에도 학교 밖을 돌아다니는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몸을 숨기며 식당으로 향하자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대학교 서쪽에 있는 건물은 식당과 과학관 이렇게 두 개가 있는데, 두 곳 모두 잡아온 사람들을 활용하는 건물이다.
역시 웅성거리는 소리는 운동장 객석에 앉아 있는 백정들이 내는 소리였다.
“죽여! 아오! 저 등신이 그걸 못 피해??”
“그렇지~. 피하고, 원 투!”
운동장은 놈들이 제작한 벽이 있어 안까지는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소리로 더러운 경기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아.
이들은 몸을 숨기며 옆에 있는 과학관으로 숨어 들어갔다.
“읍!”
과학관에 들어가자마자 역겨운 냄새가 풍겨왔다. 피 냄새는 기본이고 소변이나 정액 같은 냄새도 섞여 있었다. 문하와 민혁 역시 숨쉬기 힘든지 괴로워하며 손으로 코를 막고 있었다.
그들은 작전대로 화장실로 들어가 몸을 숨기며 신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몇 분 기다리자.
정문에서 사람들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선두에는 총알도 막을 수 있도록 겹겹이 쌓은 방패를 들고 있었고 그 뒤로는 거의 총을 든 사수들로 채워졌다. 진작에 그들을 발견했어야 할 보초들은 이미 문하에게 당해 쓰려져 있다.
하지만 좀 더 올라가면 문하가 갈 수 없는 곳에 위치한 백정들에게 발각 된다.
그걸 알기에 그들은 잠시 멈춰서 깊은 숨을 뱉었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있던 전직 경찰 간부가 소리쳤다.
“진격!!”
그 말에 멈췄던 수많은 발들이 대지를 밟으며 학교로 올라갔다.
땡땡땡땡-!!
그 모습을 발견한 백정이 종을 연타하자, 평소 100명이 넘는 백정들의 숙소로 쓰였던 인문관에서 백정들이 창을 통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들도 방패들을 앞세우고 사격을 개시했다.
화장실에서 총소리를 들은 민혁과 윤견이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총소리는 처음 윤견이 올라갔던 언덕 아래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귀에도 들렸다. 이들은 대부분 검이나 창 같은 근접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언덕을 올라 학교에 들어섰다.
그리고 정문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백정들을 향해 돌진했다.
“뭐..뭐야!”
“기습이다! 이쪽도 커헉...”
한편 윤견과 민혁은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학교 안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기 시작했다. 구출한 사람들에게는 언덕에서 올라온 사람들과 합류하라고 말을 남겼다. 비록 몇 몇은 끔찍한 몰골로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 모두 보듬어줄 여유가 없었다.
도중에 이종족들도 보였지만 일단 사람들부터 구출시킨 다음에 풀어줄 생각이니 일단은 넘어갔다. 하지만 모든 층을 뒤졌음에도 기랑은 보이지 않았다. 민혁의 낯빛이 어두워졌지만 윤견은 눈을 번뜩이며 운동장 쪽을 바라봤다.
“민혁아, 운동장! 운동장에 있을 수 있어!”
“제가 가겠습니다.”
“너 혼자? 나랑 같이...”
“형님은 파이브한테 가셔야죠.”
민혁의 말에 윤견은 입을 닫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민혁의 어깨를 잡았다.
“무리하지 마. 너의 임무는 중위님 구출이지, 전투가 아냐.”
“네...걱정 마세요.”
민혁이 이를 보이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민혁이 총을 두 손에 쥐며 건물을 내려갔다. 윤견도 다시 건물을 내려가며 이종족들을 풀어줬다.
이종족들 중 풀어지자마자 달려든 놈들도 있었고, 윤견은 빤히 보고기만 하는 놈들도 있었다. 반응은 달랐지만 놈들은 곧바로 과학관을 나가 인문관과 본관으로 달려갔다.
윤견은 창문으로 밖을 바라봤다.
이종족까지 참전해 밖은 많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백정들은 사방에서 오는 적들을 상대하랴 정신이 없어 보였고, 아직 까지 아군들은 큰 문제없이 싸우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드디어, 슬슬 본관에서도 반응이 보이기 시작했다.
본관에는 백정들의 대장과 간부들 그리고 간부의 친위대가 지낸다. 그들 모두 본관에서 지내는 만큼 거의 각성자로 이루어져있다.
“으아...이게 다 뭐고?”
“난리다, 난리.”
본관에서 나온 백정들이 난장판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는 긴장감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분명, 그 놈이 말했던 남은 간부들은 강히리와 마체테를 쓰는 누님과 만났던 이두정이란 놈. 그리고 내가 만났던 이지강... 이렇게 셋. 놈들은 아직 안에 있는 건가...
친위대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온과 무기를 들고 혼란 속 파티에 참가했다. 그들은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며 나아갔지만 금세 상대의 방어에 막혔다.
각성자가 거기에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
생존자 속 헌터들이 곧바로 상황을 인지하고 친위대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친위대와 반대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로지 복수로 불타는 눈으로 백정들을 바라봤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인데...음?
창으로 상황을 읽던 윤견의 눈에 각각 다른 입구로 본관으로 들어가는 아군들과 이종족들이 보였다.
아군이 본관에 들어갔다는 건 다른 쪽 상황에 여유가 있다는 신호다. 윤견도 바로 건물을 나가 본관으로 달려갔다.
그런 그의 앞에 이제 막 나온 친위대가 막으려 했지만, 흑도에 단칼에 목이 베이며 쓰러졌다. 본관에 들어서자마자 밖보다는 아니지만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분명 자신의 아군들이 싸움을 시작한 모양이다. 하지만 윤견은 그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그의 목표는 변함이 없었으니.
처음 바돌에게 파이브에 대해 물었을 때, 바돌은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걸로 넘어갈 윤견은 아니었다. 그의 손가락 3개를 혼내니 그제야 바돌이 뭔가 떠올랐는지 다급히 말을 꺼냈었다.
‘잠깐!! 그..그러고 보니 본관 4층 한 강의실을 무슨 애기방으로 만들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 당시에는 간부나 친위대 중에서 누가 자식을 낳으려나하나 했지, 숨길 생각은 없었어...’
윤견이 손가락을 다시 집었지만 무슨 강의실인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층은 알았으니 그 충만 하나하나 뒤져보면 된다.
3층까지 올라선 윤견의 앞에 내려오던 친위대 셋과 마주했다. 그들이 상황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윤견의 흑도가 가장 앞에 있는 백정의 발목을 잘랐다.
“끄아아아아!!”
놈의 비명으로 정신을 차린 나머지 둘이 계단에 자빠져 있는 동료를 넘어 윤견에게 달려들었다.
“하앗!”
먼저 백정이 윤견의 목을 노렸으나 윤견이 그보다 빨리 주먹으로 팔을 쳐내 막았다. 그리고 흑도로 이어지는 공격을 막았다.
그렇게 윤견은 두 백정의 공격을 가볍게 막고 흘리며 조그만 틈이 보이면 바로 흑도를 집어넣었다.
“커헉!”
흑도가 목을 뚫고, 바로 옆 상대에 배를 갈랐다. 윤견은 다시 계단을 밟으며 쓰러져 있는 백정의 몸을 찌르며 4층으로 올라갔다.
휘이이이-.
4층은 아래층과 달리 고요한 바람만이 흘렀다. 윤견은 보이는 문들은 닥치는 대로 열며 파이브를 찾았다. 그런 도중 잠겨 있는 강의실 문을 발견했다. 그러자 바로 발을 올려 문고리를 부수고 문을 억지로 열었던 순간.
윤견의 눈앞으로 수리검이 날아왔다. 윤견도 바로 몸을 돌리며 수리검을 피했다.
“이야~. 여전히 봐도 미친 반응속도야.”
강히리가 아기작이한 의자에 앉아 히죽 웃었다.
“...파이브 어딨냐?”
“그게 뭐야?? 나 보러 온 거 아니었어~?”
윤견은 그대로 히리에게 달려들었다. 히리도 의자에서 일어나며 수리검들을 던졌다. 흑도가 수리검들을 전부 튕기며 들소처럼 돌진했다.
히리는 옆으로 몸을 던짐과 동시에 윤견의 허벅지에 수리검을 날렸다. 윤견은 히리가 앉던 의자를 차며 수리검들을 막았다.
그와 동시에 윤견에게 달려든 하리가 수리검을 휘둘렀다. 그녀는 현란하게 수리검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윤견을 몰아세웠다. 윤견도 재깍재깍 검을 움직이며 방어했지만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그녀의 수리검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
“쯧.”
{온 - 발화}
결국 푸른 불을 휘둘러 그녀를 억지로 떼어냈다. 가까운 거리에서 거센 불길 때문에 히리의 눈이 잠시 가려진 틈에 윤견이 검을 찌르려던 순간.
타다다다-!
거친 발소리가 문턱을 넘으며 윤견의 옆으로 다가왔다.
거센 도끼가 먼지를 가르며 윤견에게 돌진해 히리에게 향하던 검을 돌려 도끼를 막았다.
카앙-!!
윤견에게 손이 잘렸던 백정, 이지강이 증오 밖에 안 남은 눈을 부릅뜨며 윤견을 마주했다.
“간만이다. 이 개새끼야...”
“...하아~씨. 그 때, 그냥 찾아 죽일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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