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훈련 (6)

200화
눈 한 번 깜빡거리는 사이에 코앞까지 들이닥친 해맑은 악귀의 면상을 향해, 코끼리머리 용사가 통한의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뒷걸음질 중에 날린 펀치여서 체중이 제대로 실리지는 못했지만, 칠 미터 정도의 높이에서 내리꽂히는 위력이 무시해도 될 수준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우측 상반신이 앞으로 오도록 허리를 틀면서 코끼리머리의 주먹을 피한 하지운이 좌측으로 한 걸음 옮기며 왼발로 바닥을 강하게 디뎠다.
그러고는 오른발을 우측으로 시원하게 질러 버렸다.
코끼리머리 용사의 오른 무릎 바깥쪽 측면에 하지운의 오른발 족도 즉 바깥 모서리 부분이 순식간에 파고들어 간 것이다.
원래도 튼튼했던 뼈대를 저승에서 업그레이드까지 해 줬기에, 부러지진 않고 겨우 버텨 내기는 하였다.
하지만 애초에 한 대만 때릴 생각도 없었던 하지운이다.
당연히 후속타가 연달아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옆 차기로 들어갔던 오른발이 땅에 닿기가 무섭게, 하지운의 왼쪽 정강이가 코끼리머리 용사의 오금에 쑤셔 박혔다.
찰나의 시간이 지난 후, 이번에는 하지운의 오른 발바닥 앞부분이 코끼리머리의 복숭아뼈 윗부분에 박혀 버렸다.
발차기를 깔끔하게 성공시킨 하지운이 지체 없이 백 스텝을 밟았다.
그러는 하지운의 눈앞으로 코끼리머리 용사의 오른 주먹이 광풍을 일으키며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주먹이 지나가기가 무섭게, 저승에서 강제로 떠넘긴, 무기를 꺼내 든 하지운이 허공에서 두어 바퀴 돌리고는 곧바로 코끼리머리의 오른 발목을 향해 던져 버렸다.
눈부신 은빛 사슬이 놈의 발목에 감기는 순간, 공기가 터져 나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코끼리머리 용사의 입에서도 모골이 송연해지게 만드는 괴성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타의에 의한 갑작스런 다리 찢기 시도로, 놈의 양쪽 고관절이 모두 작살이 나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격렬한 운동 전에는 반드시 스트레칭을 하라고 하는 거. 아이, 씨발! 말하고 있잖아!”
하지운의 왼손에 밀려 방향이 꺾인 물기둥이 코끼리 아저씨의 오른 팔꿈치를 뚫고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분노 조절에 실패한 하지운이 일부러 한 짓이었다.
“너, 한 번만 더 내 말 끊으면, 그때는 네 불알 쪽으로 꺾어 버린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중간에 내 말을 끊는 거야. 느닷없이 대가 끊기기 싫으면 행동 조심해서 해.”
사람 말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하지운의 면상만 보고 있으면 대충 의미를 알아먹을 수 있는 코끼리머리 용사다.
사실 하지운의 의사소통 능력은 이미, 수도 없이 많은 괴물들을 통해, 그 탁월함이 입증된 지 오래이다.
그래서 코끼리 아저씨가 용사라는 것이다.
눈앞의 악귀 놈이 무슨 말을 씨불인 건지 다 알아들었음에도, 기어이 다음 공격을 이어 나가는 우직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이다.
마음 약한 하가 놈이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코끼리 아저씨의 왼쪽 무릎을 향해 물기둥을 꺾어 버렸다.
이제는 평생 써먹어야 할 정직원을 뽑는 시기이기 때문에, 채용 예정자의 소중한 곳을 훼손하는 짓만은 차마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화살 정도면 몰라도 물대포를 거기다 맞혔다가는 형체가 남아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 새끼가... 날 우습게 만드네...”
면상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하가 놈이 자제하고 있던 염동력을 일으켰다.
금세 수백 발의 무자비한 주먹질이 허공에 작렬했다.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몸을 웅크린 코끼리머리 용사의 입에서 구슬픈 비명이 줄줄 새어 나왔다.
“어어! 저, 저런 미친! 저거 말려야 돼!”
“알아, 이 새끼야! 너도 말만 하지 말고 뛰어!”
단숨에 스물일곱 개체의 복제 인간들이 하지운의 옆으로 날아와 그의 팔다리에 매달렸다.
“이러지 마라, 본체야! 언데드로 만들려던 거 아니었냐! 빵가루 묻혀서 튀길 거냐? 겁 좀 주고 말 거였잖아! 왜 다지고 있는 거냐?”
“그래, 진정 좀 해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건 생각 안 하냐? 네 여자 친구가 얼마나 실망하겠냐!”
“야, 이 철딱서니 없는 새끼야! 너 이제 삼십 대 중반이야! 올해도 다 끝나 간다고! 넌 도대체 언제 철들 거냐!”
승아 얘기에 나이 얘기까지 나오자, 눈이 뒤집혔던 하지운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분이 덜 풀렸던지,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건 멈추지를 못하고 있었다.
“저, 저 새끼가 내 말을 다 알아듣고도!”
“야, 이런 씨! 눈 좀 크게 뜨고 제대로 봐라! 이거 짐승이다! 얘가 영어를 배웠겠냐? 한국어를 배웠겠냐? 뭘 기대하는 거야!”
“그래, 본체야. 얜 짐승이다. 너 이러는 것도 동물 학대다. 네 여친 보는 앞에서 이러는 거 아니야. 여자애들 동물 학대하는 거 정말 싫어한다.”
그러던 중 이성이 어느 정도 돌아온 하지운의 입에서 서글픈 고백이 흘러나왔다.
“나 이 새끼랑 싸우는 동안 ‘신체 재생’ 레벨이 하나 올랐어.”
“야, 잘됐네! 축하할 일인데... 근데 표정이 왜 이래?”
“재생 이거 말야. 반복 사용으로 레벨 하나 올리려면 십만 번을 다쳐야 하잖아.”
“그렇지...”
“첫 환골탈태 때 불구덩이 속에서 팔만 포인트가 조금 넘게 쌓였었어. 다음 두 번의 환골탈태 과정 중에 합쳐서 대략 삼천 포인트 정도가 더 쌓였고. 원래 도마뱀들 잡으면서 구십오 레벨 찍고 더 쌓였던 게 만 오천 포인트 정도 됐었으니까, 이래저래 잡다하게 쌓인 것까지 해서 레벨 업이 코앞이었다고.”
“그럼 방금 레벨 업을 한 게 당연한 거였잖아. 뭐가 문제라는 거야?”
“구십육 레벨을 찍은 건 좋은데, 왜 벌써 만 포인트가 넘게 쌓여 있냐고.”
“아아...”
“내가 이 새끼한테 만 이천 대를 넘게 맞았어. 그런데도 최대한 봐 주면서 하려고 했는데... 이 새끼가... 흐윽... 이 새끼 불알 두 쪽을 다 잡아 뜯어 버리고 싶어...”
복제 인간들이 하지운을 감싸 안고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많이도 맞았네... 그래도 어쩌겠냐. 네가 좀 참아라. 원래 좆같은 일도 꾹 참고 해 내는 게 어른 아니냐.”
“그래, 너도 여기서 나갈 때쯤 되면 삼십 대 후반이다. 지구로 돌아가기 전에 철이 좀 들어야지. 언제까지 미친 애새끼처럼 굴래? 이제 그만 뚝 그쳐.”
복제 인간들의 따뜻한 보살핌 덕에 겨우 진정을 한 하지운이, 다짐육이 될 뻔한, 코끼리 아저씨를 염동력으로 들쳐 메고는 앞서 기절한 다른 두 코끼리머리를 향해 다가갔다.
“쟤들이 용케 팔다리를 뜯어 먹지 않았네.”
“우리가 한 놈 기절시키고는 부리나케 뛰어가서 말렸지. 애들이 그래도 많이 순하더라. 별로 반항도 하지 않고 금세 단념하더라고.”
“그래? 착하네. 저 쌍것들과는 달리.”
하지운의 시선을 따라서 복제 인간들의 고개도 따라 돌아갔다.
개망나니들의 시선의 끝에는, 쭈뼛거리며 숲 밖으로 기어 나오는, 한 쌍의 선남선녀가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잘한다, 잘해. 본체는 매 맞아 가면서 훈련에 임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소환수라는 것들은 틈만 나면 떡을 치느라 정신이 없고.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기합 빠져 가지고. 본체야, 혼 좀 내라.”
손을 들어 복제 인간들을 조용히 시킨 하지운이 잔뜩 겁을 먹은 커플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부리나케 뛰어온 둘을 보고, 혀를 차 대던 하지운이 침착한 목소리로 질책을 시작하였다.
“하아... 내가 한동안 저승에 불평불만이 아주 많았다. 기왕 보게 해 주는 거, 일주일에 이틀씩 보게 해 주면 뭔 큰일이라도 나는 거냐고 생지랄을 했었지. 너희 두 연놈을 보고 있으니, 이제야 저승의 방침이 이해가 간다. 이래서 관리하는 자리에 올라가면, 입장이 달라진다고 하는 거야.”
“면목 없다. 앞으로 자중하마.”
“됐어. 연애 첫날인데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알아서 잘 조정해 줄게. 앞으로 불여시 가드는 얘가 설 거야. 금 부장 너는 새로 들어오는 애들 모아서 검술이나 가르쳐.”
“뭐!”
“아, 안 돼요!”
하지운의 옆에는 어느새 튀어나온 은빛 전사가, 위무도 당당하게, 폼을 잡고 서 있는 것이었다.
전사의 안면이 대부분 가려진 상태임에도, 자잘한 동작만으로도, 은빛 사나이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동안 저승에 삐친 게 좀 있었지. 그래서 이놈도 그렇고 새로 받은 무기들도 그렇고, 좀 등한시했던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어.”
그 순간 은빛 전사가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었다.
눈물도 안 나오는 놈이 그동안 서러웠던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앞으로는 중용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렇게들 알아라.”
아우성을 치며 애원 중인 커플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하지운에게 복제 인간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한 채로, 질문을 던졌다.
“본체야, 얘 꼴이 이게 뭐냐? 707이야?”
“아니, 해군 특수전.”
“아, UDT. 제정신이야? 너야말로 시대 고증을 쌈 싸 먹은 거냐?”
“뭐 어때! 브리갠트에서만 조심하면 되지. 여기에 사람이 나 하나 빼고 누가 있다고.”
“... 하긴 그렇기는 하네.”
- 작가의말
업로드하고 두 번을 더 읽어 보는데도 오타가 남아 있네요.
지난편에 있던 오타는 수정했습니다.
그럼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