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되풀이#1

시골 마을도, 그윽한 자연도 아닌, 적당히 우거진 풀숲과 나무였다. 그 사이에 폐허 안 채가 덩그러니 있다.
창공을 나는 섬과는 완벽히 대조되는 황망한 흙 위로 우뚝 솟은 건물이었다.
교정이나 수련, 수감 등등 시설로 쓰였던 것 같았다.
옥상에는 그림자들이 바삐 오갔다.
“뭐래, 뭐래.”
수인 하나가 다른 수인에게 물었다.
“있는 그대로 말했지.”
“졌다고?”
“질 리가 없잖아! 그런 똥개한테.”
“따지고 보면 넌 장비도 있는데 제대로 못 잡았다면서. 결국 이은이 나서서 해결했잖아.”
“누가 그래?”
“소문 다 났지. 안 되겠다. 넌 천우 잡으러 가면 방해만 되겠다.”
“내가 왜 방해야. 잠깐, 천우를 잡는다고? 왜? 이은 형님을 배신하는 거냐!”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 넌 보초만 서.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두 수인의 신경전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직접 김(金)한테 가 봐야겠어. 제대로 따질 거야.”
무시당하던 수인이 근무를 이탈했다. 옥상 문으로 향했다.
“야, 잠깐! 아니, 김은 바쁠 텐데 왜 그래.”
그러자 허세를 부리던 수인이 당황했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아, 천우 잡는 건 말하면 안 되는 거였구나?”
대답하지 않았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식은땀이 대신 자백했다.
“설명 안 해주면, 김, 이(李), 박(朴)한테 다 물어보고 다닐 거야. 네가 알려줬다고 하면서.”
“알아서. 근데 진짜 절대 소문내면 안 돼. 널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번 일은 이은이랑 김이박의 둘째까지만 움직이기로 해서 그래.”
“알겠어. 움직이는 건 김이(金二)인 너까지라고 쳐도, 나도 명색에 김삼인데, 알고만 있을게. 그렇게 결정한 거면 나도 방해 안 해. 분업은 철저히 해야지.”
소문은 이미 나고 있었다. 다행이 이 소문 덕분에 둘의 명줄은 조금 길어졌다.
“자, 봐봐. 이번에 명각리 새끼들이랑 짝짜꿍하는 인간들을 조지면서 천우가 영 수상했단 말이야. 그쪽 수인이랑 뭔가 교류가 있었대. 근데, 잘 들어. 사건이 종료되니까 천우가 사라져버렸네?”
조금 전까지 심히 당황한 것에 비해, 김이는 기밀을 신나서 풀었다.
“그럼 죽여야지!”
“그게 아니지. 이러니까 네가 세 번째인 거야. 내가 김가의 두 번째인 이유가 있지. 자, 만약에 나라면, ‘이 배신자 새끼! 반드시 죽인다.’라는 듯 막 쫓아가다가, 마지막에 아슬아슬하게 놓칠 거야.”
“왜. 쪼다야?”
“이 미친놈이. 닭대가리 티 내? 볏 수준 자랑하냐?”
김삼은 약점을 지적당하자 부리를 딱딱대며 토라졌다.
“우린 아직 천우가 왜 그랬는지 몰라. 압박하면 어떤 행동을 취할 거 아니야. 그리고 그 행동은 우리의 압박으로 인한 거고. 이걸 분석하면 천우의 판단 근거가 나오지 않겠어?”
“와, 그건 어떻게 알아? 천우를 잡아야 물어볼 수 있잖아.”
“맞추는 거지. 본인한테 안 물어보고.”
“왜?”
“그래야 상대방 모르게 의도를 파악하고, 상대도 감출 틈이 없을 테니까! 어때, 완벽하지.”
“왜? 의도는 자기만 아는 거잖아.”
“넌 왜 사냐고? 그러게, 뇌는 이미 꺼진 것 같은데.”
김이가 답답해했다. 당장 쥐어박고 싶은 것 같지만, 단순 무식한 김삼이 시끄럽게 굴게 분명했다.
“모르겠네. 나 같으면 일단 여기로 끌고 올 거야. 여기는 우리밖에 없잖아. 우리는 머릿수가 많아. 그리고 아무리 천우라도 해도 김이박이 합치면 힘들걸. 이은이 오면 끝나는 거고.”
“제발 넌 꼭 뒈질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
김삼은 완력의 우위 문제가 아닌, 정보 선점의 문제라는 걸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며 닭대가리를 몸소 증명했다.
“그래서 이은은 뭐래?”
김이가 포기하고 화제를 돌렸다.
“아, 그거. 별말 아니야. 걔가 누구지··· 자경?”
“좌견.”
“맞아. 내가 어떻게 했냐면!”
불과 몇 초 전에 한 질문은 이은이 한 말의 내용이었다. 김이는 체념하고 그냥 듣기로 했다.
“시작부터 전기충격기로 지졌어. 박이 개조해 준 걸 썼지. 진짜 멀리서도 공격할 수 있더라. 좌견이 막 발광하는데, 무섭긴 했어. 그 와중에도 내 방향을 딱 응시했다니까. 나랑 눈이 마주치기까지 했어.”
“잠깐, 은폐한 상태로 충격을 계속 줘서 힘을 뺀 뒤에 기습할 생각은 못 했냐?”
“이은 지시는 그랬는데, 막상 하니까 놀라서 까먹었어. 날 쳐다봤다니까.”
김이는 김삼의 발톱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내가 믿을 건 내 힘밖에 없지 않냐. 얼른 날아가서 막 할퀴었지. 발톱을 꽂고 싶었는데 그걸 노리는 눈치였어. 앞발로만 날 상대하면서 주둥이는 내가 깊게 들어갈 때만 기다리더라고. 방어를 너무 잘해서 생채기밖에 못 입혔어.”
그래도 김삼은 전투는 똑바로 한다. 이 부분은 김이도 진지하게 들었다.
“개가 원래 뒷발로 잘 쓰나?”
김이는 의아했다. 말이나 사슴, 고라니 같은 수인이 아니면 뒷말로 정면에 있는 상대를 치는 건 드물다.
“개치고 다리가 길긴 했는데, 태권도 선수인 줄 알았어. 다리를 쭉쭉 뻗으면서 자기 머리 위까지는 거뜬히 차더라. 나도 방식을 바꿔서 점프하고 내려찍으려고 했지. 견제만 해야 할 것 같았어. 그러니까 좌견도 따라서 움직임을 바꾸더라. 전투에 능해. 약간 내 과야.”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졌다.
“그러다가 배를 차였어.”
“좌견이?”
“아니, 내가.”
이야기가 끝났다.
“하, 멍청한 놈. 네가 그렇지 뭐. 그래서, 이은이 바로 구해줬고?”
“응. 맞아. 다행이야.”
김삼이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사고라는 걸 하는 표정이었다.
“왜 그래. 이상한 게 있었어?”
김이도 눈치챘다.
“이은이 물어본 게 그거였거든, 자기가 본 걸 나한테 확인해 본 거야. 좌견이 내 배를 정확히 후렸는데, 닿는 순간 발톱을 감췄어. 덕분에 난 멍만 들고 끝났어. 이은도 내가 차이고 나서 물리고 뜯길까 봐 달려왔는데, 좌견을 날 차고 나서도 거리만 두더라.”
이상하긴 했다.
이은은 멀리서 지켜봤다. 좌견이 김삼의 배를 찰 때, 타격 직전에 발을 인간 모습으로 바꾼 걸 봤다. 능숙한 변환과 더불어 타격이 성공한다는 확신도 있어야 했다.
김삼과 좌견의 전투는 좌견이 가지고 놀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도 좌견은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고, 반격도 애매했다. 전기충격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의도된 행동이었고, 무언가를 염두에 둔 움직임이었다.
“이은이 오니까 바로 도망쳤어. 엄청 빠르더라. 이은이 기습한 건데로 몇 번 못 베었어. 도망간 방향은 잘못 잡은 것 같았지만.”
김이가 계산해 봤다.
“자, 김이. 어때. 이은은 확인만 하고 다른 말은 안 해주더라. 난 좌견이 어떤지 잘 모르겠어.”
“좌견이 공격당하기 전부터 이은을 눈치챘나?”
“좌견이면 홍매의 직속이잖아. 그럼 너희 둘은 죽어도 못 이길 거야. 그리고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닐걸.”
“갑자기 아는 척이야, 닭대···”
김이는 방금 들린 말이 김삼의 목소리가 아닌 걸 알아챘다.
김삼도 목소리의 방향을 보니, 옥상 끝이었다.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확인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다람쥐 새끼, 닭 새끼. 오랜만이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을 중심으로 그림자가 졌다.
김이와 김삼의 눈동자에 비친 달빛은 새하얀 호랑이의 등에 업혔다.
두려움을 느끼지도 못한 채, 생의 마지막 보초 근무를 끝냈다.
천우는 두 시신을 갈가리 찢었다.
원래는 도착한 즉시 죽이려 했지만, 유용한 얘기가 들렸다. 옥상 벽에 매달려 듣기로 했다.
김삼은 멍청해서 방어도 모르고, 변칙적인 공격도 할 줄 몰랐다. 그래도 견고한 발톱과 근력만은 뛰어났다.
좌견은 그런 김삼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짓궂은 아이의 장난 정도로 받아친 것이다.
천우는 홍매에게 당했던 일이 떠올랐고, 납치단의 모든 수인이 한없이 강한 것 같았다.
‘난 그 토끼도 못 이기려나.’
자신감이 바닥을 쳐 버렸다.
‘이런 걸 사람 말로는, 우물 안에 무슨 짐승이라고 했는데.’
자신이 우물 안에 개구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천우는 홍매에게 참패를 당한 후, 줄곧 납치단을 공격한 이유를 돌이켰다.
이십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자, 다른 짐승의 가죽을 덮어 몸을 데우는 것에 안락함을 느꼈다. 과일이 달았으며, 고기는 포만감을 주었다. 끊임없는 단잠이 평화로웠고, 자연의 소리를 감상했다.
어릴 적 명각리 주민과 웃고 떠드는 장면이 새삼 떠올랐다. 그리웠고, 왜 이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그리움은 납치단 수인을 만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본능적인 생각이 들었다.
폐허 근처로는 초식 수인이 깔려 있지만, 전부 허수아비다.
보초를 서는 수인 둘도 깔끔하게 처리했다.
건물 내부에는 김이박이 있지만, 김은 놀고, 박은 연구를 하고, 이는 컴퓨터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세 수인의 근처로만 가지 않으면 안전했다.
옥상을 핏빛으로 물들여 이은을 자극하려고 했다.
자신이 사라지면 바로 찾거나 어떤 연락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한동안 조용한 걸 보니 폭력적인 계획을 짜는 것 같았다.
‘김이박 이것들은 어차피 마음에 안 들었어. 여유만 되면 박살내는 건데.’
초식 수인은 천우에게 열등감이 있었다.
이은 조직의 모든 수인이 천우를 싫어했고, 노골적으로 따돌렸다.
그렇기에, 천우는 유일하게 이은과 유대감이 있었다. 동지라는 관계로 서로를 도왔다.
지금 천우는 자신의 감정과 정체성이 영순위였다.
삶의 의미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나그네 같았다.
‘이래도 날 잡을 오지 않으면, 분명 꿍꿍이가 있는 거야. 그땐 명각리에 가볼까. 설마 날 죽이지는 않겠지.’
명각리 납치단의 업무가 드디어 정해졌다.
나귀가 연락두절되고, 홍매도 사소한 변덕을 부렸다. 이누도 심심치 않게 퉁명스러운 반응을 하는 바람에 조율이 버거웠다.
납치단은 1조에 이누와 명재, 2조는 두 웅이 많았다.
이제 물리력보다는 정보력과 지략을 중심으로 납치 수단을 짜야 했다.
이걸 1조에서 담당하고, 힘이 필요할 시 2조가 나서기로 했다.
행정원은 악인이 맡았다. 뜬금없었지만, 납치단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부분에 초점을 두었다. 행정원으로서 업무 능력보다는, 안정적인 소통이 중요했다.
이게 잘 되면, 본부는 납치단이 진행하는 실무의 관리를 악인 한 명을 통해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견은 수색과가 되었다.
그리고 나귀와 홍매, 신철은 새로운 이름을 달았다. 조사과라고 불렸지만, 왠지 홍매 혼자 두 광견을 통솔하는 장면이 연상됐다.
초식 수인의 관리는 태주와 가영이 맡기로 했다.
태주에 대한 조사를 통해, 좌견을 습격한 건 이은이라는 걸 알았다.
“홍매. 할 말이 있어.”
좌견이 홍매를 따로 불렀다.
자신이 습격당한 날의 이야기를 해줬다.
홍매는 듣는 중간부터 왜 이제야 이걸 말하는지 의아했다.
저의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고민거리나 문제는 항상 자신 아니면 우견에게만 말하니,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중요한 업무 내용을 여태껏 말하지 않은 건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홍매는 경위를 다 듣고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은이 주범인 게 더 확실해졌고, 이십 년의 악연인 만큼 이은의 집착도 억척스러웠다.
좌견은 반응 없는 홍매가 내심 어색했다. 굳이 말로 꺼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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