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2051년 11월 1일 (99층) - 마왕의 일기
“이제 한 층 남았구나”
“네, 맞습니다.”
몇 십, 아니 몇 백만은 되어 보이는 악마들의 머리 위로 내 목소리는 크게 울려 퍼졌다.
가장 먼저 대답한 것은 깔끔한 복장의 흡혈귀, 그레고리였다.
그는 머리를 한 번, 안경을 한 번 쓸어 넘기고는 내 옆을 지켰다.
이 자리에 앉아 보낸 시간도 꽤 많이 흘렀다.
광활한 탑 안에 홀로 덩그러니 태어나, 이제는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군대를 부리고 있다.
종지부를 찍을 차례이다.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헌터들이 99층을 클리어 하였습니다.
곧 100층에 입장합니다.
보상 : ??? 지도 1장
‘???지도 1장’이 유독 눈에 띈다.
표기가 안 된 보상은 여태 까지 없었는데 말이다.
물론 내게 필요한 것을 줄 테지.
탑을 늘 그래왔으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키를 한참 넘기는 커다란 창을 땅에 내리쳤다.
창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는 성 전체를 울렸다.
“헌터들이 100층에 올랐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해온 녀석들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때가 왔다. 흥분이 되지 않느냐."
나의 악마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각자의 자리에서 원래의 일상을 즐기도록 하여라. 때가 되어 녀석들이 오거든 전력을 다하도록."
내 지시에 모두가 분주해졌다.
열을 맞춰 움직여 나의 성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레고리만이 내 옆을 지키며 99층의 공략대를 주시했다.
바알은 그만의 부대를 이끌고 협곡으로 향하였고, 파이몬 또한 부대를 통솔하였다.
장엄했던 부대로 가득했던 나의 성은 금세 공허함이 느껴질 정도로 한산해졌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고는 눈을 감고 이곳에 처음 들어온 날을 회상했다.
'28년 전 나의 이야기.'
2023년 5월 26일 (0층) - 마왕의 일기
머리가 어지럽다.
깨질 듯이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상하다.
나는 방금까지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체 누워 있었는데···
나는 이상하리 만큼 큰 의자에 앉아 텅 빈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를 마주 보고 있는 곳은 간신히 문이 보일 만큼 넓은 공간이다.
이 커다란 공간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은 하나같이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다.
기둥 하나 하나가 엄청난 크기이다.
층고 또한 얼마나 높은지 천장은 어두운 밤하늘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공간에 압도된 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아찔함 마저 드는 공간에 놓인 나는 혼란스럽다...
-당신은 탑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탑을 정복하려는 헌터들에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하십시오.
-탑을 끝까지 지켜낸다면 당신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내 눈앞에 무언가 홀로그램 같은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마치 게임에서 설명이라도 해주듯 파란 불빛이 일렁인다.
‘탑의 주인' ...?
이 시스템은 나를 탑의 주인이라고 칭했다.
그 말은 즉 내가 앉아있는 이곳을 이루고 있는 게 탑이라는 얘기 일 텐데...
혼란스럽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홀로 누워있었다.
물론 쇠약 해져 있을 터인 몸인데 지금의 내 몸은 전혀 그러하지 않다.
오히려 평소의 몸을 훨씬 상회 하는, 건강함을 떠나 힘이 넘쳐 오른다.
하늘 높이 점프라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지금 이 의자에서 저 멀리 있는 문까지 단숨에 돌파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는 가뿐히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씩 걸었다.
"..."
알 수 없는 장비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내 몸은 이미 이전의 내 것이 아니었다.
온통 보랏 빛을 띄고 있었으며 굉장히 두꺼웠다.
잘 벼려진 칼로 내 몸을 찔러도 칼날이 쉽게 박히지 않을 것 같다.
다리만 하더라도 일반 남성의 몸통만 하다.
허리에서 발끝까지 내려오는 울퉁불퉁한 라인은 마치 작은 산맥을 보는 것 같다.
얄쌍 했던 발은 마치 큰 공룡의 발 마냥 두껍고 발톱이 엄청났다.
또한 내 입술을 아까 전부터 간지럽히던 것의 정체는 큰 송곳니였다.
아니나 다를까 내 양쪽 관자놀이에는 큰 뿔이 자리하고 있다.
살짝 만져보니 전류가 흐르는지 정전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손끝이 따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
나는 지금 흔히 들 이야기하는 누군가로 환생, 아니면 어딘가로 전생한 것 같다.
그것도 탑의 마왕에 해당하는 자에게 내 영혼이 들어온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내가 살던 곳인가, 아니면 다른 세계의 공간인가···
혼란스럽지만 건강해진 내 육체에 왠지 모를 설렘이 느껴졌다.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간단하게 몸을 움직여 봤다.
확실히 이전과 다르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거였구나.
하지만 어째서 인지 내가 이곳에 도달했는지 의문이다.
나는 그저 조금 지쳐 있을 뿐이었는데···
'탑의 주인이라...'
2051년 11월 1일 (99층) - 누군가의 일기
“여기는 탑의 입구입니다. ‘에빌러 군단'을 비롯한 모든 군단이 탑의 마지막 층을 공략하기 20분 전입니다. 현재 마지막 점검 및 회의를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에빌러 군단...'
"인류에게 있어 가장 뜻 깊은 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 28년 동안 우리는 고군분투하였습니다. 악의 무리를 내쫓기 위해, 아니 인류의 존속을 위해 싸우고 또 싸워왔습니다."
"우리는 그저 탑의 100층 아래에서 전투를 준비 중인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최후의 헌터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기자가 격양된 톤으로 연실 말을 쏟아냈다.
시끄럽네...
'최후의 헌터들이라···'
그들을 최후의 헌터라고 칭하는 것이 딱히 불만스럽지는 않다.
사실 대로라면 실제로 70층 이후 헌터의 각성 사례가 없어졌으니까.
나는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작은 방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는 목의 워머를 눈 밑까지 올리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장비를 체크하고 심호흡을 두 번 정도 했다.
방과 대비되는 큼지막한 크기의 창문을 활짝 열고 밖을 향해 뛰었다.
-탑의 99층 귀환서
SSS급 주문서
탑의 99층, 소지자가 지정해 두었던 포인트에 귀환합니다.
사용 시 주문서는 사라집니다.-
비바람이 살짝 분다.
하지만 내 몸으로는 빗방울들이 닿지 않는다.
아마 내 스킬의 효과겠지.
살짝 오한이 드는 날씨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내 마음이 이전 같지 않아서 그런가?
나는 주문서를 두 손으로 세게 찢었다.
-탑의 99층에 입장합니다.
입장자 : ???
100층에 들어서면 바빠지겠지...?
혼자 다니면 외로울 테니... 빠르게 움직이자.
- 작가의말
탑의 1층부터, 100층의 과정과 100층의 ‘5년 전쟁’이 함께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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