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2056년 11월 2일 (100층) - 암살자의 일기
"크윽..."
[나는 헌터들 중에서 멜른이 항상 궁금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너였지.]
바란이 이야기했다.
[나와 같은 아우라를 뿜는 너는 결국 탑의 존재들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아주 훌륭해.]
녀석은 내 목을 그리 세게 잡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든 내 목을 졸라 죽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나도 똑같아... 네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한 번 알아봐야겠구나.]
바란은 내 반대쪽 손을 내 이마에 가져다 댔다.
"헉..."
그러자 무언가 알 수 없는 마력이 내게 스며들었다.
"...."
외로움이 사무친다.
공허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친근하다.
'이게 도대체...'
기억이 흘러 들어오고 있다.
알 수 없지만 희미하고 친근한 기억이 내게 흘러들어 오고 있다.
'....'
데우스 바란...
에네라브...
비에고 2...
"...."
"커헉....!!!!!"
바란의 마력이 스며드는 것이 멈췄다.
"허억...허억..."
[그런 거였군....]
순간 나와 바란의 마력이 한데 모여 하나가 되었다.
바란의 기억은 내게로, 내 기억은 바란에게로 전해져 공명 하였다.
바란은 내 목을 조르고 있던 손과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뗀 뒤 한 걸음 물러났다.
[....]
"...."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다른 모두는 이 상황을 숨죽여 지켜 보고만 있었다.
충격적이다.
녀석도 충격적일 것이다.
도대체 왜...?
어째서...
위화감이 든 적은 있다.
바란에게서 느꼈던 친근한 느낌.
바란의 마력에서 느껴진 내 마력.
나는 헌터로 각성하기 이전, 죽어가는 몸이었다.
고아로 태어난 나는 심장병을 앓으며 죽기 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세상에 미련도 없었다.
그저 용사가 활약하는 소설을 읽으며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던 중 탑이 세워지고 각성하여 탑을 오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바란과 마주했다.
바란의 기억을 단편적으로 모두 보았다.
녀석이 탑을 만든 것이 아니다.
바란 또한 탑에 소환된 탑 지킴이였다.
그리고 그가 탑에 소환되기 전, 그는 나였다.
병든 나였다.
우리는 병들어 죽어가던 '김원준'에서 시작했다.
병든 김원준의 일부는 나에게, 또 다른 일부는 바란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
[이상하다 생각은 했다. 하지만... 어찌 이럴 수가...]
바란도 적잖게 당황한 모양이다.
나는 몸을 두르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거의 다 부서진 가면도 던져 버렸다.
내가 충격 받은 것은 바란과 내가 같은 존재라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탑을 지키는 삶은 어땠지?"
바란에게 물었다.
지상에 있는 모두는 아직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고독했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도 많이 고독했다. 우리는 힘을 가지게 됐어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군."
[....]
모양은 다르고, 오랜 기간 동안 살아온 나날은 다르지만 어쨌든 지금 이곳에 있는 나와 바란은 같은 존재이다.
바란의 마력과 공명 하며 새로운 스킬을 하나 획득했다.
'기사회생'
나의 목숨을 사용하여 다른 이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다.
나도, 바란도 얻은 스킬이다.
그리고 바란과 마력을 공유하며 탑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바란이 우리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탑을 정복하기 위해 헌터가 된 것이 아니다.
바란은 헌터에게서 탑을 지켜내는 것이 궁극적인 사명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에 도달하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다.
어째서 바란과 내가 마력을 공유함과 동시에 탑의 비밀이 밝혀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우리 모두 놀아났다는 것이다.
나는 바란을 바라보았다.
녀석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다.
나는 지상으로 서서히 내려갔다.
바란이 내 뒤를 따랐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있을 것 같다.
나는 지상을 밟고 나서야 모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에나라브'로서 모두를 볼 수 있었다.
"에나라브..."
카타리아가 나를 응시했다.
나 또한 에빌러 군단의 일원이었다.
카타리아와 비르보르, 피에르가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해 주었다.
"도대체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지...?"
피에르가 물었다.
그와 동시에 구지라트와 바지라트, 페르기우스가 내 곁으로 와주었다.
그리고 헤네시아와 발락, 메루시아르도 함께 해주었다.
<우리가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에나라브의 공이야.>
헤네시아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래, 이 녀석이 없었다면 우리는 각자의 구역을 절대 벗어날 수 없었을 거야."
발락이 거들었다.
녀석들은 나를 걱정해주었는지 대변을 해주었다.
"아주 오래 전... 혼자가 된 이후로 나는 늘 외로운 싸움을 해왔어. 그러던 중 구지라트 형제를 만났고, 탑의 존재들과 함께 움직였다... 물론 비에고 2로서 너희와도 함께 했지..."
모두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 방금... 바란과 마력을 공유하고 나서 모든 비밀을 알게 됐어."
"....?"
"....."
모두가 놀란 눈을 하고 나를 응시했다.
'그럴만하지...'
"비밀...?"
카타리아가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공중에 떠서 우리 쪽을 응시만 하고 있는 바란을 경계했다.
바란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너희 모두 그러하듯... 나도 평범한 인간이었다. 평범한 인간에서 각성하여 헌터가 되었지..."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킨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바란도 똑같아. 녀석도 평범한 인간이었어..."
"...."
모두가 충격에 빠진듯한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목표이자 죽여야 하는 바란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이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많은 헌터들을 죽여온 인물이다...
"거짓말 하지마... 인간이었던 자가 우리를 그렇게 죽인다고...?"
나는 모든 것을 봤다.
바란이 방황하는 것, 우리가 지구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한 가지 더 말해주고 싶은 건... 바란의 평범한 인간이었던 시절의 인물이 바로 나라는 거야. 우리 둘은 같은 한 몸에서 시작되었어..."
"...."
"지금 그걸 믿으라는 거야?"
피에르가 물었다.
"사실이야. 녀석도 탑의 시스템에 의해 생겨난 탑의 존재일 뿐이야. 그리고 그것 만이 아니라... 우리 둘은 탑의 비밀을 알아버렸어."
나는 새로 생긴 스킬, '기사회생'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자신의 목숨 사용하여 타인의 죽은 목숨을 살려낸다.'
어쩌면... 우리엘이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비밀이라는 게 뭔데...?"
페르기우스가 물었다.
"확신한 건, 우리 모두 탑의 시험에 통과했다는 거야. 우리 뿐만이 아니라 바란 또한..."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 해!!!"
데미안에 의해 안정화가 된 반헤임이 다가와 물었다.
그는 아직도 힘든 기색이 보였다.
아주 오래 전, 조종 당한 내게 등을 찔렸던 반헤임...
"오랜만이야 반헤임..."
"갑자기 나타나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바란은 왜 또 저렇게 잠잠한 건데!!!"
반헤임은 여전히 뒤에서 묵묵히 있던 바란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탑은... 우리에게 주어진 재앙이 아니야. 어떻게 보면 재앙일 수도 있겠지만, 지구만이 아닌, 지구를 넘어 전 우주를 구하기 위한 튜토리얼이라고 볼 수 있어."
내 이야기를 듣는 모두가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얼굴을 하고 있다.
그제서야 바란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공략대는 전투 태세를 유지했지만 바란에게서 살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설명해봐야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에나라브, 네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
알고 있다.
사실 이렇게 빙빙 돌려 이야기 한 이유는 미련 때문이다.
페르기우스와 탑의 존재들을 제외하고 공략대에게 내 진짜 모습을 보인 것은 30년만이다.
이렇게 오랜만에 녀석들 앞에 나타나서는...
곧바로 사라져야 한다니...
"에나라브!!"
모두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챘다.
나는 시체가 된 멜른에게 다가갔다.
히단의 마법에 의해 잘 보존되어 있는 것 같다.
"구지라트, 바지라트. 그동안 고마웠어. 너희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헤네시아, 발락, 메루시아르. 너희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는데..."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내 목숨을 대가로 멜른을 살려야 하는 사실을 모두에게 전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된다...
나는 멜른의 앞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에나라브...! 도대체 뭐야. 왜 작별 인사 같은 걸 하는 건데."
페르기우스가 내 어깨를 붙잡고 이야기했다.
"페르기우스, 내 유일한 지구인 친구... 날 믿어줘서 고맙다."
"...."
나는 단전 안에 있던 마력을 끌어 올렸다.
"기사회생..."
심장이 멈출 것 같은 통증이 가슴 안 쪽에서 느껴진다.
숨이 가빠지고 마력이 전부 빠져나가고 있다.
"큭..."
헌터 이전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아...'
'이 얼마나 허무한 마지막인가...'
'고독한 순간이 더 많았지...'
'그래도 마지막은 모두의 앞에서 가는구나...'
내 안의 불씨가 꺼져 가는 것이 느껴진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