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견추인록(殺犬追人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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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김금토
작품등록일 :
2023.06.3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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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5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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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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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불복 (18)

DUMMY

말은 온순하지 못했다.


차라리 허언에 가까운 광언이었고,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눈먼 예언자가 아무렇게나 끄적인 삼류 묵시록에 가까웠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는 게 미전의 생각이었다. 그의 손과 눈이 무엇인가를 애타게 찾았다. 예전 구견의 평가가 떠올랐다.


[시대가 달랐고]


미전은 편지와 함께 있던 서류들을 넘겨보았다. 사람, 말, 곡식, 패물, 병기구 등 빼곡한 숫자의 나열들이 머리를 헤집었다. 숫자에 가장 익숙한 상인조차 겨우 전체적인 규모를 헤아릴만한 거대한 파도였다.


[진정 사내로 태어났으면]


직접 엮여서 죽은 사람만 일만, 간접적으로 휩쓸린 이들까지 합하면 십만이 넘었다. 미전은 그것만으로도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고작 전조였다.


[태공이 되었을 놈이지.]


망인은 인고와 곤고 속에서 천하를 주물렀다. 오직 단 한 사람의 사내를 위해서.


“.........허......”


미전은 그제야 진짜 광기가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엿본 기분이었다.



*


제 눈을 믿지 못하는 것은 미전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감각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구견은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의 손톱 끝으로 뭐하나 딸려 나오는 것 하나 없었다. 오견은 인상을 찌푸린 채 앞만 보고 있었다. 죽통에서 흘러내린 재들이 그의 바지에 구멍을 뚫고, 살을 지졌으나 그의 죽통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미전.”


구견이 상인을 불렀다. 상인은 구견을 쳐다봤다. 눈에 담긴 당혹감에서 구견은 그 편지의 진실성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


그래, 묻지 않았음에도 구견은 이견의 말이 허황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병법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아군은 성하게 하고, 적은 쇠하게 해라 했던가. 딱 그 말 대로였다.


그녀는 믿을 수 있는 세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보이지 않게 감췄고, 남들끼리 치고받게 했다. 관에 충성하는 이들은 허상을 쫓게 만들고 그 끝에서 죽게 만들었다. 낙양 역시 자기들끼리의 상잔을 가속하게 만들었고 인망을 잃게 만들었다.


이제 그들이 쓸 수 있는 손 패는 말라만 가건만,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은 많아져만 갔다.


“진짜 저놈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거군.”


구견의 손아귀에서 죽통이 부서졌다. 그는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몰랐다. 그런 구견을 향해 미전이 물었다.


“어르신은 알고 있던 게 아니었습니까?”

“나는 그저 먼저 봤을 뿐이야.”


무엇인가를 본다고 해서 그걸 아는 것은 아니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을 본 게 다였다. 그때엔 끽해야 개주인을 제치려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리고 이젠 그 미답의 영역으로 사내가 발을 디뎌야만 했다. 감 좋은 구견의 눈에도 그건 도무지 형체조차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모두가 복잡한 셈속에서 미래를 걱정할 때, 계속 말없이 비만 보던 혈의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다들 그를 불렀다. 허나 그는 답이 없었다. 그렇게 동굴의 안으로, 그리고 사내의 앞으로 다가갈 뿐이었다.





『三四三. 역우불복』





혈의는 사내를 내려다봤다.


하늘에 이상이 생겨 달이 붉게 빛나는 혈월(血月)이 이젠 그의 두 눈에 떠 있었다.


빛은 선명했어도, 그 속내는 탁했다. 고작 강의 표면에 비치는 것만으론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듯 지금 그의 눈도 그러했다.


부정과 긍정이 공존했다. 무엇에 대한 부정이고, 무엇에 대한 긍정일지는 혈의 본인만 알았다. 점점 불길함만이 주위에 일렁일 뿐이었다. 성스러운 제의에 끼어든 불청객이었고, 한때 불귀의 객이라 생각되던 이었다.


그 모습에 제자들은 긴장을 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연기 속에서 거짓을 이어가던 이들이 이젠 그것을 그만두었다.


요리를 하던 일엽은 향신료 대신 독과 단도를 챙겼다. 남명에게 독설을 내뱉던 이송은 검게 변하려는 칼의 자루를 쥐었다. 사내의 옷을 수선하기 위해 바늘을 잡고 있던 남명은 목봉을 챙겼다. 남명을 돕기 위해 천가위로 천을 자르던 사향도 이젠 암기를 준비했다. 그리고 심정은 향기로운 빗을 떨어트리곤, 늘상 자신을 지키던 채도를 쥐었다.


“너희가 모인다 한들, 나 하나 막을 수 있을 것 같더냐?”


혈의의 몸에서 피바람이 불어왔다. 순식간에 제대로 죽지 못한 비망인들의 밤이 되었다. 피와 불꽃이 튀었다. 사내의 조용한 하계와는 다른 소란스런 모습의 하계였다.


제자들은 팔을 들어 올려 바람을 견뎌냈다.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거나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폭풍 속에서 천천히 다가갔다. 그 탓에 밖에 있던 호랑이 새끼만 피냄새에 눈깔을 뒤집고 기절했을 뿐이었다.


“물러서십시오, 어르신.”


제자들이 사내의 주위로 어렵사리 도착했다. 지고는 도전자들을 맞이하는 혈마처럼 굳건히 서 있었다. 그의 입이 움직였다. 당장에라도 그들을 애송이라 칭하며, 덤비라고 할 것만 같았다.


“힘은 이런 것이다.”


그는 압도를 보이지 않았다. 피바람이 사그라들었다. 비명도 없었다. 모든 내기를 거둬들인 지고는 서글프게 말을 이었다.


“본의가 무엇이든지간에, 너무 강대한 힘은 견제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차라리 그 뿐이면 덜했을 수도 있었다. 견제와 의심만이 아닌, 타의(他意)를 짊어져야만 하는 상황이 오고야 마니까.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건만. 강자도 사람이다. 고작해야 가을바람 겨우 견딜 억새만한 것이 사람 마음이다.”


지고는 사내의 앞에 앉았다. 그의 눈엔 혈월이 없었다. 그저 붉을 뿐인 한 사람의 눈이었다. 그렇게 그는 그저 눈이 검을 뿐인 한 사람을 쳐다봤다. 동정이기도, 동병상련이기도 한 무엇이었다. 하지만 그가 말을 거는 것은 아직 사내가 아니었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말입니까?”

“이 놈에게 꿈을 꾸게 하잖느냐.”


사내는 자신의 꿈이 아닌 것을 마치 자신의 꿈처럼 꾸고야 말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남의 꿈속을 헤매느라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지고는 그리 생각했다.


“너희도 여기서 미전의 목소리를 들었을 거다.”


긍정의 침묵이 돌아왔다.


“그것만큼 부담스러운 게 또 없을 테지.”


지고의 말에 제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너희도 마찬가지’란 말이 이제야 감춰둔 암기처럼 그들을 꿰었다. 그는 그들을 향해 밖에서 찬 공기나 좀 쐬고 오라고 말했다. 제자들은 말없이 밖을 향했다.


“너희를 탓함이 아니다.”


그들의 뒤에 대고 한 말이었다. 단순한 위로는 아니었다. 지고 본인은 그런 것을 할 줄 몰랐다. 따지자면 진실로 그는 그리 생각할 뿐이었다.


이제 동굴 안에는 그와 사내 둘 만이 숨을 내쉬었다. 밖에선 지겹고, 규칙적인 빗소리를 뚫고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숨이 넘어갈 듯하나, 결국 넘어가지 않고 머금고 있던 뜨거움을 잔뜩 토해내는 어린애들의 악이었다. 누군가는 고함을, 누군가는 울음을 잔뜩 토해냈다.


그리고 밖에 있는 어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쓰디쓴 약초향 머금지 않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런 제자들에게 위로를 건넬 뿐이었다.


“또한 그녀를 탓하는 것도 아닐세.”


정인이 손가락질 받는 걸 못견뎌했던 여인이었다. 그러면서 세상을 욕하지 않는 정인을 답답해하면서도 미워하지 않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침묵을 유지하는 정인을 대신해 모든 것을 미워하고, 그 모든 것들을 다 태워버리려던 여인이었다.


오로지 폭력만이 정답이고 출구인 이 시대에 태어난 여인이기도 했다. 미래는 어떨지 모르지만, 너무 빨리 태어난 거였다.


그리고 지고 본인이 보기에 그건,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서투름을 탓하겠나.”


모두에게 삶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기도 했다. 그래서 부모가 있고, 스승이 있는 거였다. 자기들이 살아보니 이렇더라는 그 짧은 말 한마디라도 듣고 살아보라고.


그런데 사내에게 그 짧은 말 한마디 해주는 이가 없었다.


“...만약 내 스승님이 지금의 날 보신다면, 아마 날 죽이려 달려드실 걸세.”


톱 들고 설치는 자신보다 훨씬 의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지금은 의술 실력이 옛날의 스승을 뛰어넘었을 지라도, 그 마음가짐만큼은 그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스승님 인생도 참 기구했지. 하, 아니지. 그분은 자기 팔자 자기가 꼬운 거에 가깝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얼굴 허연 의원 하나가 진영을 찾아왔었다고 했다. 왜 찾아왔냐고 물으니 의원은 그리 답했었다고 했다. 거적때기 덮은 소달구지가 참 부지런히도 내려오는 것을 봤다고.


그러니 자기 할 일은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보다 원망도 많이 들으셨었네.”


지고가 성깔이 더러워 욕과 폭력을 입에 담고 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경험이 철저히 야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면, 스승은 전형적인 중원의 한의학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탕약과 침술이 그의 특기였다.


허나 수년 치의 내공을 거저 늘려준다는 탕약의 약재들은 너무 비쌌기에 전장에서 쉬이 구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침술이 아무리 현묘하더라도 당장 살이 째지고 머리가 깨진 이를 살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마터면 얻어맞고 쫓겨날 뻔 한 적도 몇 차례 있으셨다고 했고. 뒤에서 대놓고 침 뱉는 놈들도 있었고. 뭐, 그래도 사람이 참 좋았지. 나 같은 놈도 거둬준 거 보면 말이야.”


지고는 먹고 살기 위해 군영을 찾은 소년이었다. 흔히 있는 심부름 해주는 잡역꾼의 역할을 한 것이 지고란 소년이었다.


“난 어릴 적에도 성질이 더러웠지. 그래서 돈 때먹으려던 군인들한테도 지랄발광을 했었고. 뭐, 그러다 사소한 다툼이 일어났지.”


군인에겐 사소했다. 아무렇지 않게 가볍게 소년을 밀쳤다. 하지만 소년은 적들에 비해 너무도 가벼웠다. 몸이 떴다. 머리도 떴다. ‘어?’하는 생각 속에서 말랑한 땅이 아닌 돌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렇게 군문에 있던 스승에게 치료를 받았다.


“깨어나자마자 대뜸 스승님이라며 절부터 했네. 스승님도 날 아셨던 건지 긴말 하지 않으셨네. 당장 내일부터 여기 일 거들라고만 하셨지.”


당장 약초나 부상에 대해서 배운 것은 없었다. 그가 처음 한 일은 청소였다. 고작이라고 할 만했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피에 젖은 붕대나 썩은 고기 위에서 꿈틀거리는 구더기들을 치웠다. 비위 좋은 시골 청년들도 토악질을 참기 힘들어 했다.


하지만 그건 약과였다. 진짜는 사람의 몸에 붙어있던 것들이었다. 지고란 소년은, 인간의 지방이란 것이 노란색을 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한 한 달을 내리 청소만 시키시더니 날 부르시더군.”


‘뭐라고 하셨습니까?’란 물음은 없었다. 그저 그 말을 했을 법한 시간이 지나자 지고가 웃으며 답을 할 뿐이었다.


“아직도 의원일을 배우고 싶냐는 거였네. 난 두 말 할 것도 없이 하고 싶다고 했고. 그제야 스승님도 날 제자로 불러주시더군.”


그 뒤는 뻔한 얘기였다. 늙은 의원이 오욕의 나날 속에서 익힌 것을 젊은 놈이 물려받는 것. 그리고 새로운 욕받이가 되어 그 자리를 지킨 게 다였다.


“하지만 스승님은 아셨을까? 그 어린놈이 제법 영악했다는 것을 말이야.”


소년이 의원의 제자를 청했던 이유는 별 게 없었다. 그게 몸 쓰는 일보단 편해보였으니까. 하다못해 기술이라도 있으면 조용히 먼 곳으로 떠나 의원질이라도 할 수 있으리란 계산에서였다.


“그런데 어쩌다가 난 거기에 매여 버렸을까? 그리고 어쩌다가 난 거기서 제일가는 살인귀가 되어버렸을까?”


지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견의 약초향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너무 내 얘기만 했지만, 지금의 자네한테 이게 제일 필요하겠지. 거기서 충분히 생각해보고 나중에 말해주게.”


그럼 사내가 좋아하는 말싸움이나 한 번 하잔 것으로, 지고는 동굴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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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 용이 오르고 남은 자리 24.09.10 62 1 15쪽
401 용이 오르고 남은 자리 24.09.09 51 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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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 용이 오르고 남은 자리 24.09.07 50 1 13쪽
398 용이 오르고 남은 자리 24.09.05 51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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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9.02 55 2 19쪽
395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9.01 49 1 17쪽
394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31 49 1 15쪽
393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30 46 1 17쪽
392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9 50 2 16쪽
391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7 50 1 14쪽
390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5 45 1 16쪽
389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4 49 1 15쪽
388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3 52 2 15쪽
387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2 47 1 16쪽
386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1 50 2 19쪽
385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9 49 1 17쪽
384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8 61 1 16쪽
383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7 60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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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5 53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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