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견추인록(殺犬追人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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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김금토
작품등록일 :
2023.06.3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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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5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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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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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불복 (19)

DUMMY

지고가 밖으로 나왔다.


이번엔 그의 빈자리를 메우려 더 많은 이들이 안으로 사라졌다. 딱히 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고는 부정하지 않을 따름이었다. 적어도 오답은 아니라 여겼다.


밖엔 그와 미전, 그리고 정백만이 두런두런 자기들끼리의 잡담을 이어갈 뿐이었다.


“미전 자네는 안 들어가도 되나?”

“똑같은 얘길 몇 번이나 들으면 질리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잘 지냈다는 얘기를, 그러니 사내와의 세 번째 약속은 지켜냈다는 얘기를 굳이 본인의 입으로 할 필요가 없었다.


“정이 아가씨가 몇 번이고 자랑을 해댔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심정의 수없이 많은 조잘거림. 그 대부분이 장안에서의 일화였다. 소녀가 그 말을 한 의도가 다분했다. 당신 덕분에 잘 지냈다는 말이었다.


의도야 어찌되었든 그 덕에 미전은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소녀의 안락엔 분명 그의 공도 적잖았으니까.


“백이 너는?”

“저도 일 없슴다.”

“왜?”

“무인이 어찌 말로 하겠습니까?”


정백은 팔을 뻗어 허연 산고양이 한 마리를 가리켰다. 얻어맞아서 생긴 상처가 아팠는지 온몸에 진흙을 치덕치덕 바른 상태였다.


“예전이었으면 진즉 호랭이밥이 되어 저놈 겨드랑이에나 매달려 있었을 겁니다.”


그만큼 강해졌다는 의미였다. 사내 본인이 보기엔 별 의미가 없을 지도 몰랐지만 정백은 크게 연연치 않았다. 강함은 타인의 평가보다도, 무인 자신의 평가가 중요할 때도 있었으니까.


그런 정백을 지고는 말없이 쳐다봤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얼굴에선 어릴 때 젖살 포동포동하게 올라있던 소년의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새삼 시간이란 참 빠르단 생각을 했다. 그는 피식했다. 그리곤 범을 쳐다보며 몇 마디를 보탰다.


“그나저나 저놈 좀 먹여라.”


범은 살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이 주위를 부지런히도 뽈뽈 거리며 돌아다닌 것 치고도 살이 유독 많이 빠진 상태였다. 그런 주제에 볼은 늘 볼록했다. 지고는 놈이 뭘 하고 다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아, 소백(小白)이 말하세요?”

“아주 그냥 동생 삼았구나.”

“저놈도 어디 갈 데 없어 보여서요.”

“...지랄도 풍년이다.”

“풀만 뜯어먹는 소백이만 할까요?”


지고는 어이가 없었다. 범이 원래 머리가 좋고, 영물은 특히나 머리가 좋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젠 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얼마나 머리가 좋으면 자살이란 지능의 산물을 그대로 답습할까 싶었다.


“저놈 고기 먹여라.”

“제 말 잘 듣지도 않아요. 그리고 잘 먹어서 가죽만 번지르르 해지면 그거 때문에 죽을 텐데요.”


지고의 눈이 빛났다. 흙속에 코를 박고 있던 범의 등 쪽 털이 우수수 떨렸다.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뒤지고, 인간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더니만.”


지고가 어디서 들은 소리였다. 아마 황산이 굽어 살피는 들판을 지키던 장군이 들었던 소리였을 터였다. 원래 이렇게 쓰이는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엔 꽤나 어울렸다.


“오래 살리고 싶거든 고기 먹여라. 그래야 끽해야 사냥꾼들만 상대할 거다.”


지고가 눈살을 찌푸렸다. 몸을 떨던 호랑이의 엉덩이가 바닥에 착 붙었다. 늘상 살랑거리던 꼬리도 지금은 물에 절여진 현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이름에 죽으려는 바보는 한 시대에 하나면 족하다.”


뱉고 보니 이상했다.

지고는 곧장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아니, 한 시대에 한 놈도 많다.”





『三四四. 역우불복』





기골이 빼어난 청년이 자리에 앉았다. 피부가 까무잡잡했다. 두터운 붓으로 그린 듯 이목구비도 서역인들처럼 큼지막했다. 제법 인상이 강렬한 쾌남이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사내와는 다른 느낌의 청년이었다.


“뭔 고생을 그리 사서 하십니까?”


사부와 제자보단, 사형과 사제에 가까운 둘이었다. 그래서 제일 허물이 없었고, 서로의 밑바닥을 가장 많이 본 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말도 질타에 가까웠다.


“추울 땐 추운 곳에 계시더니, 그 한기를 못내 못 잊어 이리 더운 곳까지 끌고 오셨습니까? 아님 저희 더울까 그 한기 품다가 이제야 풀어놓으시는 겁니까?”


한기에 덮인 듯, 구전 속의 설녀를 보는 듯. 하늘에서 내려 땅에 닿기 전의 하얗기만 한 눈으로만 이루어진 모습이었다. 청년은 거기서 사내의 고생을 엿볼 수 있었다.


“....저는 잘 지냅니다.”


산에서 홀로 엽사노릇하다 평생을 홀로 살았어야 했을지도 몰랐을 청년이었다.


“희도 잘 지냅니다. 저보다 너무 잘 지내서 문제지만요.”


청년은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풀어놓았다. 맛난 거 잘 먹고 지낸다. 재밌는 거 많이 하고 지낸다. 이젠 고향에 모셔두었던 부모님 묘도 모셔와서 잘 지내고 있다. 그 덕에 오랜만에 마을 사람들 얼굴도 봤고, 천희도 소개를 시켰다.


“헌데 제 고향사람들인데, 죄다 천희 걱정만 했습니다. 못 배워먹은 놈에게 시집을 갔으니 불만이 많을 게 분명하다느니, 그런 주제에 시집살이가 고되지는 않냐느니 하더군요. 흐흐. 참 웃기지도 않아서.”


반응만 보면 괴물한테 시집간 사람을 걱정하는 투였다. 사실 그런 걱정이 일엽 때문에 생긴 일은 아니었다. 마을에서 제일 똘똘하던 일엽을 오래보고 지낸 이들이었다. 그러니 그 걱정이란, 일엽의 뒤에 사내가 있었기에 나온 말들이었다.


그들은 한 여인을 위해 두 개의 탑이 타올랐던 밤을 잊지 못했다.


“남들은 다 시집살이 걱정하던데, 저는 처가살이를 걱정합니다.”


일엽은 흐흐하며 웃었다. 사내는 낄낄거리지 않았다. 청년은 그걸 봤다. 마지못해 웃으면서도 연기는 하지 않았다.


“그야 제 스승이랍시고 있는 사람이 매번 천희 편만 들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내심 서운하다는 투였다. 스승이면 자기편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냔 거였다. 겨우 편지로 전해오는 소식에도 늘상 천희에 대한 칭찬만 가득했고, 자신에 대한 것은 걱정만 가득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투덜거림이 길지는 않았다. 처와의 다툼도 스승에 대한 불만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희도 그걸 잘 알고 있나 봅니다. 대놓고 절 약 올리기도 하고, 속상한 일 있으면 ‘무사님 돌아오시면 죄다 이를 거다’라며 놀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원래 아들은 다 잘 알아서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음속에선 이런 말들을 하는 게 맞나 싶었지만, 또 어떠랴 싶었다. 잘못된 게 있으면 언제나 그렇듯 사내가 지적을 해주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일 끝나시면 집에 갑시다. 천희가 맛난 거 많이 준비해두었으니까.”



*


귀공자 같은 소년이 자리에 앉았다. 사내를 닮아 얼굴의 선들이 얇고 유려했다. 긴 세월을 길거리에서 보냈다곤 믿기지 않을 얼굴이었다. 다만, 손에서. 아니 손만이 그 흔적을 아로간직한 채였다.


소년의 손이 자신이 사부라 부르는 이의 그것을 맞잡았다. 맞잡은 손은 더더욱 엉망이었다.


“사부님, 전 영악한 애였습니다.”


사내의 앞이었다. 살의와 분노가 꿈틀거리는 눈을 봤다. 맞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두목의 화를 북돋았다. 그래서 당신의 눈앞에서 피를 흘렸고 당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했다. 참고 있던 분노와 살의에 두목이라는 자를 죽이게끔 했다.


그것은 당신을 이용해 먹었노라는 고해와 사죄의 말들이었다.


“죄송합니다.”


소년은 연달아 죄송하단 말을 흐느꼈다. 무섭다는 감정이 흐느낌 속에 스며있었다. 사내가 자신을 이제라도 버리진 않을까, 그리고 혹여 자신 때문에 사내가 대신 벌을 받는 게 아닐까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파문하신다 하여도 받들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신다고 하여도 좋습니다.”


소년이 고개를 숙였다. 사내의 엉망이 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덮었다. 윤기 나는 머릿결과 손이 더 대비가 되었다. 필시 쓰다듬는다면, 머리가 아닌 손의 거침으로 인해 터럭들이 빠질 정도였다.


허나 그런 일은 없었다. 소년과 사내는 그 상태로 움직이질 않았다. 눈 내리지 않는 여름의 한낮임에도, 소년은 더없이 추웠다.


“그저 깨어나시기만을 간곡히 빌 따름입니다.”



*


눈 밑이 어두컴컴한 소년이 자리했다. 일에 지쳐있었다. 원래의 도련님 같은 느낌은 보이지 않았다. 무인다워진 손에선 힘이 느껴졌다. 동시에 예전처럼 조그마한 바늘을 다루는 섬세함도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전 아미산을 향했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이모라 불러야 하는 이의 수하, 그 수하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검이 그들의 목을 베어냈다. 그리고 지체 없이 그들에 대한 소멸을 결의한 것이 사내였다.


조금의 후환이라도 남겨놓지 않겠다는 완고함이었다. 그렇게 본인을 원수라 부르는 이를 위해 사내는 산을 올랐다.


살육의 등정이었다. 그저 안개뿐인 길을 피로 물들였다. 그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말들을 요란스레 했고, 굳이 그렇게 죽이지 않았어도 되는 이들을 잔혹하게 찢어발겼다.


서투른 위악이었다.


“그리하시면 속이 편하셨습니까?”


소년은 아미산을 내려왔다. 혼자가 된 사내가 거기서 무엇을 더 했는지는 몰랐다. 다시 만났을 때에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스님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가져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전부인 무를 가르쳐 준다는 게 다였다.


“그때 이후로 꿈을 꾸지 않습니다.”


팔선보를 익혔다. 이제 팔방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언제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내의 위태로운 보법과는 달랐다. 균형이 잡혀있었다. 목적지가 있었다. 방황이 있을지언정 길을 잃지는 않았다.


꿈도 마찬가지였다. 어둠 속에서 본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당신께선 꿈을 헤집어놓지 않으셨다. 어머니도 아시리라 생각했다.


“아니, 알았던 것은 제 자신일 겁니다.”


소년은 사내의 어깨 위로 따뜻한 가죽을 덮어주었다. 사람의 온기가 돌아왔을지언정, 그가 아직 추워보였기 때문이었다.



*


경어를 입에 달고 사니는 소년이 앉았다. 도망이 평생의 삶이었던 소년이었다.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정신없이 어디론가 달리고만 있었다.


“그렇게 달려서 지금 사백의 앞에 있습니다.”


도망의 종착지일지, 아니면 자신을 잡으려던 무엇이 자신을 앞질러 선 것인지는 몰랐다. 몰랐었다. 하지만 이젠 사내가 어떤 이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백 께서도 지독한 도망자시더군요.”


비단 사백 만이 아니었다. 팔월이라는 사부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도망쳤다.


흐릿해져가는 부모의 얼굴과 처음으로 목격한 죽은 아이의 얼굴.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 돌에 깔려야만 했던 친구의 얼굴로부터 소년은 도망쳤다. 소년은 그게 죽음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죽음의 얼굴이 아니었다. 삶의 얼굴이었다.


그러니 자신들은 죽음이 아닌 당장의 삶으로부터 도망쳐 정신없이 달리던 이들이었다. 소년은 그래서 사내가 이해가 됐지만, 한편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긴 시간이었습니다. 고작 제 삶도 그러했는데 사백은 어떠셨습니까?”


이제 소년은 도망치지 않는다. 사실 포기했던 것에 가까웠다. 그래도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그의 옆에는 도망치지 않더라도 같이 걸어줄 이들이 있었다.


헌데 사내는 그런 것도 없었다. 족히 자신의 두 배는 될 시간을 도망쳤다. 그러다 소년을 만났다. 마찬가지로 도망치던 소년에게서, 고작 열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둘은 마주쳤다. 둘은 거기서 많은 것을 봤을 터였다. 소년은 사내가 무엇을 봤는지 몰랐다. 그저 자신의 미래를 그로부터 엿본 게 다였다. 그게 도망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도망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니, 그게 삶에 대한 의욕으로 이어진 게 참 웃겼다.


“...헌데도 전 사백께 감히 그런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그만 도망치시라고.”


사내의 얼굴을 기어 다니던 지네와 지네의 다리가 그의 살을 파고들며 나던 사각거림을 소년은 기억했다. 그는 소년에게 감이 좋다고 했다. 나쁘지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

정작 사내 본인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아마 묻는다면 그는 똑같이 ‘나쁘지 않다’란 말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어찌 피부에 지네가 기어 다니는 삶이 나쁘지 않는 삶일까.


고작 모기가 귀를 울려댐에도 잠 못 이루는 게 사람이었으니까.


“다만 이것만은 알아주십시오.”


사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 비해 눈에 띄게 키가 자라 있었다.


“이젠 사백의 속도에 맞춰서 같이 뛸 수 있습니다.”



*


소녀가 앉았다. 과거, 밤 떠오르는 동쪽을 보며 기나긴 애도와 비탄의 노래를 부르던 소녀였다.


찢어진 목청으로 소녀는 바랐다. 은혜를 베풀어 교화한다는 혜화루가 무너져 한줌 재로도 남지 않기를.


그리고 그리도 바라던 높디높은 혜화루가 불에 타 폭싹 주저앉던 날, 그녀의 언니도 돌아왔다.


“언니가 말하길, 솔직히 처음에는 어르신이 참 많이도 무서웠었대요.”


백마를 탄 왕자 같은 모습은 없었다. 수없이 많은 짐승들이 몸으로 펼쳐놓은 춘화첩의 한 가운데에서 사내를 봤다.


사내는 자신이 걸어온 어둠을 등지고 있었다. 그는 참으로 검었다. 너무 검어서 춘화들도, 춘화로 인해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붉은 색정도 모두 남김없이 지워버릴 것 같은 사내였다.


그래서 심혜는 그리도 생각했었다.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는, 저 자에게 바쳐지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다가서려 하니, 칼을 겨눠 들고 있던 죽간만 넘기라고 하셨다면서요.”


소녀는 피식했다. 언니를 손대지 않았기에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손대지 않았던 것이 살짝 이지만 자존심 상해했던 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언니가 참 예뻐요. 빈민가의 때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요. 그래서... 그래서 솔직히 어르신이 고자가 아닌가란 생각도 해 봤어요.”


참 웃기는 말이었다. 상황에 걸맞지도 않았다. 지금은 진지해야만 했는데, 자꾸 과거의 얘기를 꺼내던 언니가 여기에 있는 것만 같았다. 둘은 늘 붙어 있었었다.


“그런데 그만큼 제가 독해졌어야 했어요.”


심혜는 심정을 챙겼다. 심정도 심혜를 챙겼다. 감히 음흉한 눈깔을 한 채 언니를 쳐다보던 이들에게 녹슨 채도를 휘둘러 협박과 저주를 일삼았다. 자신은 성정이 본디 그렇기에, 자연스레 그리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독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나 보죠. 왜냐면....왜냐면...”


아무도 그녀를 대신해서 독해주지 않았으니까. 기껏해야 모두 지나가듯 건네는 말뿐인 위로가 다일 뿐이었다.


“말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때 그놈의 숨을 대신 끊어주셔서...감사했습니다. 안 그랬으면 저, 꽤나 오랫동안 미쳐있었을 거예요.”


설령 그게 아주 약간의 단축이었을지라도 소녀는 그게 고마웠다. 소녀는 그날 처음으로 누군가를 올려다볼 수 있었다.



*


“씨발, 좆나게 오그라드는구만.”


누군가 툴툴거렸다. 이런 걸 잘 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생각보다 수줍음이 많았는지 그는 연신 욕설만 중얼거렸다. 그래도 사내의 앞에 앉기는 했다.


“....씨벌, 난 할 말이 많지 않아.”


대부분의 얘기를 이미 지난번에 나눴기 때문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쏟아 붓고, 모든 것을 부정당한 날이었다.


“하,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 ‘삶이 고통이라면,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보거라’니. 어후 니글거려. 생각해보니 자넨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구만.”


그는 양팔을 털어냈다. 그런다고 소름도, 과거도 털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곧 그는 그걸 멈췄다. 한숨과 함께 말을 중얼거렸다.


“난 지금도 이기적이구만.”


늘상 이야기를 들어주던 이는 사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사내는 눈을 뜬 채 구견의 앞에 있었다. 입만 다물어진 채였다.


“자네 몸속에 있던 두 놈한테 꾸지람을 들었네. 언제 자네가 자기 얘기를 한 적이 있냐고. 맞아, 없었어. 난 그냥 자네가 솔직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네. 애초에 내가 물은 적이 없었던 거였어.”


사내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괜스레 헛기침을 해댔다. 야로의 열보다도 속에서 올라오는 무엇이 더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제라도 물어보려는데... 허, 이번엔 자네가 어디로 숨어버렸군.”


구견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들에 비해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에겐 아주 긴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내를 향해 솔직한 불만을 내뱉었다.


“나 성질 급한 거 알지? 그러니 오래 기다리진 않음세.”



*


허연 연기와 함께 누군가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자연스레 사내의 입에도 죽통을 물려주려다가도 이내 그만두었다. 그리고 연기 속에서 과거를 봤다. 거기엔 사내도, 자신도 그리고 자신을 미친 아저씨라 부르던 거지들도 있었다.


“내가 사회성이 좋은 놈은 아니야.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에서야 여기 앉았지. 거지들과도 인연이 깊진 않아. 그냥 거래를 하던 게 다였지.”


약초 얼마에 먹을 거 얼마. 실로 간단한 거래였다. 오견은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아니, 그때의 자신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예 아닌 게 아니더군. 하. 나도 자네랑 그들 얘기를 듣고 나니 속이 영 갑갑했네.”


독에 중독되어 십 수 년의 내공을 잃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고작 몇 개월의 인연이란 그런 것이었다.


“나도 요새엔 뒤를 참 많이 돌아봐. 그리고 후회도 참 많이 하고, 또 보이지 않던 것들도 참 많이 보고 있지.”


자신을 구태여 가맹으로 보내버린 것이 그러했다. 혈의도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고, 의술은 더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무학이니 뭐니 말은 해도 사내가 자신을 보낸 이유가 순수하지만은 않았으리란 게 오견의 생각이었다. 아마 ‘사람이 되라’는 뜻도 조금은 섞여 있었을 터였다.


“그래도 그 덕에 자네 명줄 붙여놓고 있었지. 지고 어르신 밑에서 안 굴렀으면 그것도 힘들었을 거야.”


‘굴렀다’라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약초 연기를 몇 번이나 머금다 뱉었음에도 그 단어는 빠져나가질 않았다. 오견은 씁쓸하게도 무엇인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구른 것조차 내 선택이었겠지.”


독으로 녹여 없앴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잔재가 조금이나마 보였기에.


“뭐, 이것도 자네의 선택이라면 내가 더 할 말은 없어. 하지만 이견에 대해서 어떻게 할지 확실히 결정하게.”


동굴의 안을 가리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선 여전히 이견이 누워 안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썩지를 않더군. 뭐랄까 정말로 시간이 홀로 멈춰있는 것처럼 보였네. 내가 이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마 자네를 기다리는 게 아닌가 싶어.”


마지막이 어찌 되었든 이젠 유일한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이었다. 그런 이가 움직이지 않으니 망자도 움직이지 않는 듯 했다.


“내가 불법(佛法)에 대해선 잘 몰라. 하지만 그런 말이 있더군. 망인을 보내고 마흔 아홉의 날이 지난 뒤, 망인의 유품들을 태워 재만 남길 때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말이야.”


죽통에서 재가 떨어졌다. 벌써 죽통에 담긴 약초가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산 사람이 뒤를 돌아보면, 망자도 걸음이 무거워 못 간다던가.”


오견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사내로부터 뒤 돌아섰다. 그를 망자 취급하는 게 아니었다.


믿는 것에 가까웠다.


사내가 스스로 걸어 나올 것이라는 그런 믿음.



*


모두 속에 있던 것을 털어냈다.


그게 서투르든, 서투르지 않든. 또한 더 잘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남든, 아님 후회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후련하든. 적어도 그들은 그 순간에서만큼은 솔직했다.


그런 것에 감읍하여 하늘이 비라도 좀 멎게 해줄까 싶었지만, 비는 멎음이 없었다.


대신 사내가 일어났다.


그는 걸었다. 밤이 되어 잠에 빠져든 이들을 뒤로하고 걸어서 동굴의 밖으로 향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빗방울들이 보였다. 그리고 먹구름이 보였다. 그 뒤에 있어야 할 것들이, 그래서 보여야만 할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더 걸어 나갔다. 이젠 먹구름의 방울들은 보이는 것을 넘어 그의 몸으로 느껴졌다. 그는 그 중심에서 정좌했다. 흙탕물의 위였다. 옷이 진흙에 더럽혀지고, 또 물들어갔다. 그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먼 옛날, 고행 속에서 답을 찾던 한 명의 왕자처럼 거대한 답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빗속에서, 그것이 언제쯤 그칠까를 생각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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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2 46 1 16쪽
386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1 49 2 19쪽
385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9 48 1 17쪽
384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8 60 1 16쪽
383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7 57 1 13쪽
382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6 52 1 14쪽
381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5 52 1 17쪽
380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4 65 1 14쪽
379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2 58 1 17쪽
378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1 56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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