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인 (3)

“순수한 선의로만 고안한 것인가?”
혈의의 말이었다. 얼굴엔 웃음기 하나 없었다. 환자를 진찰하는 의원의 얼굴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본디 이기적인 놈이었다. 개과천선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본성을 뜯어 고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전 진정한 무로써, 지금과 미래에 있을 과거의 저들을 죽이려 함입니다.”
내가 칼을 휘두른다. 그래봐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나’만 죽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나를 죽인들, 어디선가 다른 ‘나’들 열이 생겨났다. 내가 영원히 산다한들 내가 죽이는 이들보다 생기는 나들이 더 많았다.
그러니 살인은 더 치밀해야 했고, 더 근본적이어야만 했다. 시간에 무너지지 않아야 했고, 공간에 제약당하지 않아야 했다.
의원을 봤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더니 피식하곤 옅게 웃었다.
“사람 참, 괜스레 부정적이긴.”
그는 말을 이었다. 부정이 자기의 영역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제법 큰 부정이었다.
“헌데 살벌한 것치곤, 자네가 보여준 것은 체조에 가까워.”
“월랑 어르신이 그러셨습니다. 강해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명쾌함이 있다고.”
여인의 얘기에 의원이 움찔거렸다. 신기루처럼 과거가 지나갔다. 그는 신기루임에도 쉬이 부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무인이 강해진다는 것은 그런 명쾌함이 있지. 허나 그것은 ‘강건함’을 말하는 것이고, 또한 그 목표는 천하제일을 말함일세.”
지금 내 무공에는 강건함이 없다. 그것을 배운다 한들 어찌 천하제일에 이르겠느냐. 설령 그런 이가 있다 한들, 그 많은 거지에게 어찌 제일을 꿈꾸게 하냔 말이기도 했다. 그것이야말로 슬픈 신기루가 아니면 무엇이겠냔 말처럼 들렸다. 그의 말이 슬펐다.
“어르신, 강건함이 반드시 절대적인 강함을 말하진 않습니다. 그러했다면, 저나 어르신이 그리도 괴로웠겠습니까?”
“그럼 뭔가? 무엇이 강건함인가?”
“신도(申到)입니다.”
거듭하여 도달하면 되었다.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나으면 되었고, 오늘보단 내일이 조금 더 나으면 되었다.
그렇게 하루를 쌓아 한 주를 만들고, 한 주를 만들어 달을 쌓다보면 년이 된다. 그러다보면 술과 약이 보여주는 환상이 아닌 스스로의 목표에 취할 수 있었다.
“어차피 거지들은 더 떨어질 곳도 없는 이들입니다. 작은 성취라도 조금씩 이뤄감이 옳습니다. 걷는 법도 모르는데 어찌 뛰기부터 바라겠습니까?”
그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하며 건드렸다. 속에서 의원과 무인으로서의 관점이 대립하고 있었다.
“...재활의 측면에선 더 할 나위 없겠지. 꾸준히만 하면 몸에 도움이 되긴 할 거야.”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깃드는 법입니다. 스님들도 몸을 다스리는 법을 배운다 들었습니다.”
‘부정할 순 없겠다’란 말이 돌아왔다. 적어도 심마엔 도움이 된다는 것은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문제는 ‘적어도’란 것에 있었지만.
“난(亂)은 밖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는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긴 하지.”
그는 어딘가의 민담을 꺼냈다.
‘바보 이만(伊万)’이란 얘기였다.
이만(伊万)이란 농부가 있었다. 순박하여 바보라고 불렸고, 너무 순박하여 불화가 없었다. 하여 그걸 아니꼽게 여긴 마인이 그를 괴롭히고 타락시키기 위해 온갖 수를 꾀어내었다. 그러나 꾀는 성실함을 이기지 못했고, 그는 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의 치세는 무위지치(無爲之治)의 끝이었지. 순박한 왕의 밑에 있던 총신과 맹장들은 모두 나라를 떠났고, 남아있는 것은 왕을 닮아 농사짓는 것 밖에 몰랐던 농민들이었다. 바보들의 왕국이었다. 이제 불화는 그 왕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인은 옆 나라로 갔다. 그리고 왕을 꼬드겨 군세를 출병시켰다. 왕의 군대는 이만의 나라를 약탈했고, 불태웠다.
하지만 이만 나라의 민(民)들은 저항하지도 않았고, 부족하여 약탈을 하는 것이면 약탈만 하면 되지 왜 아무도 쓰질 못하게 불태우냐며 울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군인들은 왕명에도 와해될 뿐이었다.
혈의란 사람은 이 부분에서 이를 갈아댔다. 눈엔 핏발마저 서 있었다.
“좋은 이야기지. 너무 좋아서 개소리에 가까울 정도야.”
꿈과 같은 얘기에서조차 전쟁은 일어났다. 원한도, 불화도 없음에도 그러했다. 그런데 현실의 전쟁은 더 끔찍했다. 약하고 바보 같을수록 침략 당했고, 노예로 굴려졌다.
“아니, 전쟁이 아니라 인간의 실상이 다른 것이겠지. 소나 돼지들을 보게. 닭과 개들을 보게. 그들에게 인간과 같은 지성이 있었다면 순순히 가축이 되었겠는가?”
‘필히 저항을 했을 거다’란 말을 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렇네. 내 보기엔 저 병사들도 병신이야. 아니면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든지. 현실이었다면, 저들 모두 가축이 되었네. 특히나 유순하고 사람말 알아먹을 수 있다하여 교배까지 시켜서 널리 널리 팔아먹었겠지. 인간이란 그런 것일세. 조금만 강해도 어떻게든 그 힘을 뿜어내지 못해 안달이지.”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그를 쳐다봤다. 군과 전쟁을 지독한 병신들의 만담이라 했던 사내는, 어느덧 자신도 그 한가운데에서 지독한 만담을 털어놓고 있었다.
『三四八. 추인』
만담은 끝이 났다.
거친 호흡이 몇 번이고 오갔다. 그는 겨우 지금의 현실로 돌아오는 듯 했다.
“....전쟁은 오만한 이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 끝인 평화가 하늘에 순응하는 바보들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닐세.”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아파왔는지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 손끝조차 아주 약하지만, 분명 떨리고 있었다.
“어르신.”
“왜 부르나?”
“그래도 제 생각만큼 부정적이신 것은 아니라 놀랐습니다.”
그의 손이 멎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봤다. 그를 향해 옅게 웃어주었다.
“그래도 전쟁의 끝을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평화란 고작, ‘다음 전쟁을 위한 준비기간’ 내지는 ‘싸우다 지친 놈들이 가지는 일시적인 소강상태’라는 말을 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허나 그는 그리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전쟁엔 끝이 있었고, 평화가 있었다. 다만 그걸 직접 본 적이 없을 뿐이었다.
“말씀 중에 틀린 게 없습니다. 그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일 따름입니다.”
“....지금 자네의 생각을 모르진 않네.”
그저 붉은 눈에 빛이 돌았다. 빛은 그의 눈을 한 바퀴 돌았다. 그게 지금 그의 물음이었다.
과거의 자신처럼,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대물림일지 윤회일지 알 수 없는 그 무거운 책무를 소수의 누군가에게 지게끔 하려냔 말이었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아직은 명확한 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도 제자들에게 그 길을 물려주고 싶진 않습니다. 하여, 더 고민해 볼 것입니다.”
그에게 계속해서 웃어보였다. 이견에게 배운 거였다. 할 말이 없을 때엔 이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었다. 그도 이걸 봤다. 그는 피식했다. ‘사람 실없긴’이란 핀잔이 들려왔다. 그런 말을 내뱉는 게 싫지 않아 보였다.
“...내 얘기가 도움이 되었나?”
“예, 더없이 좋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번에도 참으로 많이 배워갑니다.”
“하! ‘나쁘지 않다’란 말은 어디로 갔나?”
“그걸 바라시는 듯 하여 긍정문을 써보았습니다. 예전 어르신처럼요.”
그는 기어코 시원하게 웃었다. 어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농은 아니었다.
학문의 발전엔 이렇게 좋은 반대자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무학도 마찬가지였다. 무가 인간의 활동이라면, 무도 사람을 위해야만 했다. 그도 이걸 알았다. 그는 부정적인 사람이었을 지언정, 부정을 위한 부정을 하진 않았다. 그가 어른인 까닭이었다.
“그래, 알겠네. 이 사람아. 뭐, 그런데 내 앞에서 그런 것을 보여준 데에는 따른 목적도 있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마냥 재롱은 아니었다. 그것보단 증명에 가까웠다.
“슬슬 또 움직여볼까 합니다.”
“...개주인이었나?”
“그리고 놈에게 잡혀있는 사문의 가족들을 구하고자 합니다.”
이견에 의해 반쯤 유폐당한 처지였다. 막판에 가서야 가만히 있다간 죽겠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아직 자신에게 딸랑거리는 이들을 데리고 인질들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이견은 막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괜찮단 말을 전해주지 못한 게 아쉬웠다.
“자네 주치의로서 경고하자면, 이대로 남은 평생 요양만 해도 얼마를 살지를 몰라.”
그는 내 몸을 가리켰다. ‘지금도 겨우 움직일 정도지 않냐?’란 지적이 따랐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빤히 쳐다봤다. 붉은 눈이 옆으로 굴러가 버렸다.
“...하, 뭐. 환자들이 죄다 의원 말 잘 들었으면 애초에 의원이란 족속들이 필요가 없었겠지.”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도 가벼웠다. 어디 산보라도 나갈 사람처럼 보였다. 어깨에 톱만 걸치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랬을 터였다.
“자네도 눈치 챘겠지만, 난 못 따라가네.”
정백과 소백은 엊저녁 아주 늦게 돌아왔다. 그리곤 혈의에게만 죽통을 건넬 뿐이었다. 죽통 안의 내용물을 보진 못했다. 그것을 몰래 꺼내보는 혈의의 눈이 불타오르는 것만 봤을 뿐이었다.
“낙양입니까?”
“그래, 다시 꼬리가 붙을 건 분명했지.”
그것을 끊어내기 위해 다시금 뒤에 남겠다는 말을 했다. 사실 생각보다도 여유가 길었다. 다른 누군가가 뒤에서 또 다른 분탕을 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군지 짐작이 갔다. 문득 정신 사납던 쇳소리들이 그리웠다.
“...감사합니다.”
“알면 됐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난 혼자 날뛰는 게 제일 편해.”
‘오견은 전투에서 영 쓸모가 없고, 구견은 개주인에 대해 이를 박박 갈고 있을 테니 데리고 가지 않겠다’란 부연이 붙었다. 그는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게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를 위해 뭐라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를 다시 언제 볼지 몰랐다.
“...어르신, 금방 끝내겠습니다.”
“아니, 마지막으로 남은 과거잖나? 제대로 털어내야만 하네. 그러니 길어야겠지.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끝내지 말게. 안 그럼 자네 얼굴, 다신 안 보겠네.”
그친 하늘, 이젠 햇빛만 가득한 맑은 여름날의 공기 속에서. 그의 몸이 나의 비를 대신해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명심하게. 영웅도, 바보도 되지 말게.”
그는 전장으로 향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래야 오래 살아.”
꼭, 다시보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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